왜 유대인 중에 창의적이고 뛰어난 인물이 많을까. 최근만 해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모두 유대인이다. 앞으로 4차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 유대인 중에 더 많은 세계적 인물이 나올 것이다. 한국 학생들의 평균 IQ와 공부 시간은 세계적이지만 창의성은 몹시 뒤떨어진다. 문제는 교육 방식에 있다. 한국의 교육은 지식을 외우는 공부, 이를 평가하는 점수 따기와 등수에 치우쳐 있다. 한국 학생들은 시험을 위해 외우고 시험을 보고 나면 잊어버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유대인들의 교육 방식은 어떠한가. 요즘 세계가 주목하는 유대인 교육 방식은 동반자라는 뜻의 아람어 하브루타(Chavrusa, chavruta, havruta)다. 토라 연구와 관련해 사용하던 하브루타는 현재 토라와 상관없이 교육 방법론을 뜻한다. 대체로 일반 분야에서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말씀 해석을 주입식으로 배우지 않는다. 전통적 토라 도서관 예시바(yeshiva)와 교육기관 코렐(Kollel)의 분위기는 몹시 소란스럽다. 시끄러운 도서관, 시끄러운 교실이라니.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지만 놀랍게도 사실이다. 그곳 책상은 두 명이 마주 보는 식으로 놓여 있다.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에게 토라 구절들을 토론시키기 때문이다. 손을 마구 흔들며 언성을 높이는 것 역시 다반사다. 두 사람은 토라 본문을 놓고 서로에게 질문하고 토론하며, 이를 자신의 삶과 사회에 적용한다.

뇌는 자극을 받고 학생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력하는 이가 즐기는 이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브루타의 가장 큰 장점은 배움의 즐거움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하브루타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질문받고 질문하며 자기 견해를 객관화하고 지식을 내면화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터득하는 교육 방식이다. 지식을 알려 주기보다는 지식을 터득하는 법에 핵심이 있다. 하브루타가 토라 교육을 위해 유대인 사이에 대중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로 알려졌지만, 그 기원은 매우 오래됐다. 신명기 6장 7절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언제 어디서나 강론하라고 명한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여기서 "강론하라" 원어 디베르는 "그것에 관해 말하라", "이야기를 나누라"는 뜻이다. 16세기 이탈리아 랍비 오바디야 세포르노(Ovadiah Seforno)는, 전도서 4장 9-10절에서 혼자보다 두 사람이 함께할 때 좋은 것은 서로를 받쳐 주고 세워 주기 때문이라는 내용에 근거해 하브루타에서 왜 두 사람이 토론하는가를 설명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9-10)."

토라 연구에 하브루타식 교육을 하다 보면 상당수 학생이 토라를 해석하는 데 혼돈과 회의에 빠지는 기간이 온다고 한다. 선입관과 고정관념이 깨지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도약의 기회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거쳐서 더욱 성숙해진다.

정통 유대인에게 하브루타는 신명기에서 명령하듯 학교교육을 넘어 삶의 모든 부분에 일상적으로 쓰인다. 유대인 아버지는 자녀들과 토론하는 전통이 강하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부모와 형제와 친구와 동료와 짝을 지어 질문하고 토론하며 논쟁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모든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교육 방법이다.

하브루타에서는 경쟁보다는 귀 기울임과 존중을 배운다. 토론에는 관용과 화합, 불일치를 위한 개방성,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 태도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토론 시 상대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을 때 좋은 논쟁을 할 수 있다(변화는 자기 주도적으로 일어나야 진짜라는 뜻이다). 이는 토론할 때 충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랍비들은 잠언 27장 17절을 들며 하나의 칼이 다른 칼을 더 날카롭게 만들 듯, 토론할 때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해석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질문과 토론은 결과와 관계없이 그 과정 자체로 큰 배움이다. 탈무드는 두 학자 간 토론이 서로의 의견을 명확하게 한다고 기록한다(BT Ta’anit 7a). 토론은 서로의 통찰력을 강화한다.

최근 한국에 유대식 학습 방법에 관한 책과 강연, 하브루타 교육 학원이 유행한다. 태교 때부터 유대식 교육이 유행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로 유대인이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이라서, 우리 아이도 유대인처럼 똑똑하게 키우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등수와 점수를 올리는 수단으로 하브루타를 내세우는 책, 강연과 학원의 광고에는 과장과 허수가 많다.

필자가 읽어 본 한국에서 출판한 하브루타 관련 서적 대부분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유대 민족에 대한 허황한 이야기와 과대 포장이 있었고, 내세우는 정보도 정확하지 않을 뿐더러 하브루타 교육의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었다. 하브루타라고 해서 만능이 아니다. 하브루타 방식으로 토라를 연구한다고 해도 보수 유대인 중에는 대화가 어려운 수준의 극우거나 폐쇄적인 사람도 많다.

사실 대부분 유대인은 평범하다. 하브루타는 매우 탁월한 교육 방식이지만 모두를 뛰어나게 만들지는 못한다. 평균적으로 보면 사실 유대인은 그리 특별한 민족이 아니다. 일반 분야에서 몇몇의 엄청나게 뛰어난 인물이 유대 민족을 탁월하게 보이게 할 뿐이다. 그들 중 유대교 신앙에 헌신한 이들도 별로 없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트의 여왕이라고 한국 사람 모두가 피겨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 부모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가장 뜨겁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돼 있다. 부모의 관심은 교육 자체가 아니라 늘 등수, 점수, 경쟁력이다. 교육열에 교육 철학이 없다. 그저 얼마나 빨리 효과적으로 '점수'와 '등수'를 높일 것인지에 맞추어 있다. 점수와 등수도 형식적 객관성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반하브루타식 교육이다.

하브루타에는 점수와 등수, 서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친구와 소통하며 토론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는 동시에 상대를 존중하며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좋은 결과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목적이어서는 올바른 동기를 가질 수도 없고 지나친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 교육 목표가 잘못되고 철학 없이 하브루타를 통해 빠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이런 유사 하브루타는 한국 교육을 망치고 학생들 행복 지수를 낮추는 또 하나의 주범이 될 것이다.

한국의 교육기관과 교회에 하브루타를 도입해 정착하는 데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한다. 하브루타는 생생한 토론식이기에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수업 방식이 아니다. 최첨단 교육공학이나 장비로 이루어지는 교육 방식도 아니다. '질문과 토론'은 아주 오래된 고전적인 교육 방식이다.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 사회에서 사람들 간에 질문과 토론이 일상이 될 때, 하브루타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에도 입시나 노벨상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가정, 학교, 직장에서 가족, 친구, 동료와 자연스럽고 성숙하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것이 하브루타 교육이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신앙, 그 오해와 진실>(새물결플러스) 저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