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호모 데우스>(김영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신이 된 인간'(Homo Deus)이 살아갈 미래의 역사를 점친다. 유전공학과 인공지능, 나노기술의 발달은 불로불사와 지상 천국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끌어내렸다. 미래가 유토피아가 될 것인지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기술의 발달로 생물학적 인간 이후의 '포스트휴먼'(Posthuman)에 대한 이야기를 위험한 상상력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가운데 신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학제 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y)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에서도 소장파 학자들이 포스트휴먼 시대의 신학을 논의하고 있다. 박일준 박사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교(감신대) 종교철학과와 감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보스턴대학교(S.T.M.)와 드류대학교(Ph.D.)에서 '종교와 과학'을 공부한 이후,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 등의 연구 결과들을 신학적으로 성찰하는 글을 활발하게 발표하고 있다.

박일준 박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박일준 박사를 그가 소속해 있는 감신대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에서 1월 30일 만났다. "종교학과 철학과 신학의 접경 지역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집중해 왔다"는 그에게서, 물리학·생물학·인지과학 등을 오가는 독서 여정과 그가 학습한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 오늘날 교회 및 신학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들었다. 2시간 가까이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인터뷰는 2차례 나눠 게재한다.

- 평소 책을 어떻게 읽는가.

주로 재밌어 보이는 책을 고른다. 기존 생각을 강화해 주는 책이 있고, 기존의 생각을 깨 주는 책이 있는데, 나는 주로 후자에 관심이 많이 간다. 특정 분야 바깥으로 나가는 책이 더 끌린다. 그런 책들을 읽으면 지식이 잡다해지고 아는 범위가 넓어지는데, 깊이가 얇아지기 쉬운 단점이 있다.

책은 반드시 연필로 밑줄 치면서 읽는다. 볼펜으로 표시하면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읽고 난 뒤에는, 글을 쓸 때 참고하며 표시한 부분 중심으로 읽는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는 쏟아지는 책이 많아 한 권만 붙들고 있기가 힘들다. 깊이는 연관한 주제의 다른 책이나 글을 다량으로 읽으면서 보충하는 편이다.

나는 책을 빨리 읽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빨리 읽히는 책이 있다. 나에게 익숙한, 알고 있는 주제의 책이 그렇다. 그러다 처음 보는 분야를 읽으면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느려진다. 한 가지 나쁜 습관이 있는데, 스마트하게 못 읽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발췌 독을 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읽는다. 자기 쓸 내용만 읽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습관상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 보니 미련하다.(웃음)

책에는 보통 최신 정보보다 5년 전 10년 전 정보가 담긴다. 책으로 나온 연구는, 대개 결과가 나온 지 10년쯤 됐다 보면 된다. 보스턴대학교에서 '종교와 과학'을 공부할 때는 교수님이 인지과학 분야의 책을 소개해 줬다. 그때는 5년 이상 지난 글은 잘 읽지 않았다. 연구 결과가 너무 많이 쏟아지니까. 논문 같은 것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오래된 책은 잘 안 읽는 나쁜 습벽이 있다.

연필로 밑줄 친 흔적들이 보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나.

심심할 때 곧잘 읽었다. 지금도 화장실 갈 때는 그냥 못 간다. 꼭 읽을 것을 들고 가야 한다. 대학교에 들어와 이 습성이 조금 더 구체화했다. 당시 학교 상황과 국내 정치 상황의 영향이 컸다.

1985년에 대학교에 들어와 1987년에 군대를 갔다. 1989년에 복학해서 1990년에 학교를 다시 다녔다. 1987년만 해도 우리가 6월 항쟁을 통해 뭔가 새롭게 하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 상황이 상당히 복잡했다. 영화 '1987'(2017)을 보면 희망적인 정치혁명으로 끝나는데, 많은 사람이 이 영화에 댓글을 달지 않았나. "1987년도 대선 승자는 결국 노태우였어"라고. 이어지는 상황을 보면, 사건은 이한열에서 끝나지 않는다. 강경대 씨가 시위하다 죽는 일이 1991년에 있었다. 1987년 이후 복잡하고 암울한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도 비슷하다. 이분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실제로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여러 가지로 실망감이 팽배한 시대였고, 그때 일종의 도피처가 책이었다. 책만이 나에게 위로를 줬다. 뭔가 새로운 것을 읽으면 알아 가는 기쁨이 있었지만, 그 외 다른 모든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더 독서로 도망갔다.

- 책으로 도피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서 <정의의 신학>(동연)에 보면 '공부'를 통한 실천을 강조한다.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는 이 땅의 신학자들'로 함께 투쟁해 왔던 학문과 삶의 동지들에게" 책을 헌정하기도 했다.

1986년 공장노동자로 살았던 적이 있다. 돈이 없어 1년 휴학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주물공장으로 갔다. 6개월 일하고 2개월 월급을 못 받았다. 월급이 15만 원이었는데, 당시 등록금이 60만 원이었으니까, 밥값 제하고 생활비 제하면 등록금이 맞춰졌다. 그런데 2개월치를 못 받았으니까 등록금을 내고 복학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당시 내가 어울렸던 친구들은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이들이었다. 이 친구들은 '정의' 같은 것과 상관없이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지 다 했다. 주유소 기름 배달도 하고 레스토랑 웨이터도 하고 그랬다. 내가 돈을 못 받아 난감해하니까 이 친구들이 자기네 하는 일을 같이하게 했다. 일을 도와주며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됐다. 불빛 화려한 시내 다운타운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아닌, 그곳을 유지하는 서비스맨의 삶 이면에 있는 복잡다단함을 경험한 셈이다.

그때 '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실천적 방법이 나에게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비겁하지만, 그래도 이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은 이때 다 깨졌다. 자본주의의 복잡성을 느꼈고, 공부도 실천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크게 연관성 있는 것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비정규직이나 세월호 문제에 서명한다거나 성명서를 내는 일을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모든 실천을 때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나는 우리 시대가 직업이 다양하게 분화한 시대라서, 이 시대의 문제는 오히려 정치인이 정치인답지 못하고 경제인이 경제인답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본다. 각자의 역할을 잘하고 거기에 연대를 더해야 한다. 연대를 주로 하는데, 정작 자기 할 일은 잘 안 하는 것도 비실천이라고 본다.

박일준 박사는 자본주의 복잡성을 깨닫고서,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책을 비롯한 자본주의 관련 서적을 읽어 왔다. 최근에는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1933~)이나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 등의 책을 통해 계속해서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인생의 책을 시기별로 소개해 달라.

재밌게 읽었던 첫 책은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정신세계사)다. 30년 전 학부생 때 읽었다. 신학 서적인 줄 알았는데, 읽어 보니까 전혀 알지 못했던 현대물리학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신학교를 다녔지만 전공은 종교철학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공부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요즘 말로 '학제 간 연구' 방식의 공부를 이 책을 통해 시작할 수 있었다.

신학에는 신론·기독론 등 정규 커리큘럼이 있다. 나는 커리큘럼 밖에 있는 게 재밌더라. '현대물리학과 신학', '현대물리학과 종교' 같은 것은 커리큘럼에 없다. 심지어 신학과 철학의 만남도 커리큘럼에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커리큘럼 바깥의 책이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는 이정배 교수님 책이었다. 우리 학교는 분위기가 조금 거만하다.(웃음)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감신대에서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이유 없는 자부심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교만이기도 한데, 우리 때는 '토착화신학'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실질적인 텍스트가 많지 않다. (토착화신학 1세대) 윤성범·변선환 교수님을 비롯해 이쪽 분야 사람들은 다작 스타일이 아니다.

한국적 신학을 공부할 때는 이정배 교수님이 처음 썼던 <토착화와 생명 문화>(종로서적)로 공부했다. 이정배 교수님의 박사 학위 논문일 것이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적 신학에 대해 다뤘고, 유교와 서양 신학을 비교해 가면서 두 가지를 동등하게 대우하면서 썼다는 점이 상당히 재밌었다.

이후 10년 정도 뒤에 나온 이정배 교수님 책이 <한국 개신교 전위 토착신학 연구>(대한기독교서회)다. 한국적 신학의 내용이 상당히 진척한 수작이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하는 여러 토착화 신학자와 한국적 신학자를 깊이 있게 다뤘는데, 신학계에 널리 읽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다.

그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세 번째 책은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1929~)의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이다. 1998년 나온 책이다. 내가 보스턴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교수님이 이 책을 수업 교재로 썼다. 재미있어서, 그해 여름에 다 번역했고 차후에 원고도 넘겼는데, 출판이 안 됐다. 최재천 교수님(이화여대 석좌)이 통째로 저작권 계약을 해 놓는 바람에 날아갔다.(웃음) 이 책은 2005년 <통섭>(사이언스북스)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멋지게 한국 사회에 소개됐다.

<통섭>을 처음 읽었을 때, 생물학이 앞으로 아주 큰 이슈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독서 경험이 진화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나 리처드 르원틴(Richard C. Lewontin, 1929~) 등이 쓴 책을 읽었다.

<통섭>은 유전자와 문화 간의 공진화에 대한 이야기다. '휴먼 게놈 프로젝트' 등을 언급할 때, '공부 잘하는 유전자'나 '키 크는 유전자' 등 특정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생명의 블루프린트'나 '유전자 가위'라는 표현을 쓰고, 소개할 때 우리 몸의 어떤 점을 크게 개선해 줄 것이라며 유전자를 막 부각한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는 놀랄 만한 이야기를 한다. 유전자 혼자 생명의 과정을 만들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다시 유전자를 유도하는 피드백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굴드나 르원틴 이론과 비교하면 훨씬 보수적이다. 그전까지 생물학은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에서처럼 '유전자 중심'으로만 그 과정을 파악했다.

내가 유학 가기 전 <이기적 유전자>가 한국 서점가를 휩쓸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유전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올 때였는데, 막상 현장에 들어가 생물학자가 쓴 책을 직접 읽으니 전혀 풍경이 달랐던 것이다. 우리 시대 유명한 생물학자 80%가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유전자와 환경, 유전자와 문화의 상호작용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세상이 바뀌는 경험이었다. '공부할 때는 신문·잡지에 나오는 유행어를 따라가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박일준 박사는 유학 시절 <통섭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을 읽고 세상이 바뀌는 듯한 경험을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통섭> 같은 책에서 말하는 것은, 앞으로 모든 학문에서 '학제 간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 분야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학제 간 연구'는 분야가 만나는 일이다. 신학자도 신학만 공부할 것이 아니라, 종교학과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현대 과학 분야에서 전문 학술지 수준은 아니더라도 교양서적 수준의 대화는 충분히 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인식에 도움을 줬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1949~)이나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 1901~1981)을 접하면 많이 낯설어한다. 그런데 서양 철학자나 신학자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해서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의 경우, 기독교인으로 회심해서 사도 바울에 대한 책을 쓴 게 아니다. 무신론자로서 사도 바울 텍스트를 읽었고, 철학적·종교적으로 성찰한 것이다. 지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 신학자들은 이들의 책을 잘 모른다.

이 사람들은 신학이 아니라 철학을 하겠다는 차원에서 이 책들을 썼다. 한국의 나쁜 풍토 중 하나가 신학자와 철학자 사이에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신학자만 문제가 아니라, 철학하는 사람도 공부하면서 신학 분야와 연관한 여러 사람을 배웠을 텐데, '신학'이라고 하면 고개를 가로젓는다. 서로 분리돼 자기만의 영토를 보존하려 하는 풍습이 있다. 이런 풍습이 인문학 발전을 저해한다. 종교철학적 공부가 신학 공부의 방향성이어야 한다.

- <통섭> 이후로 인상 깊게 읽은 책들이 있다면.

가장 임팩트가 컸던 책은 인지과학 분야 책 두 권이다. <Philosophy in the flesh>[마크 존슨(Mark L. Johnson, 1949~) <몸의 철학>(박이정)]와 <The Embodied Mind>[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 1946~2001) <몸의 인지과학>(김영사)]다. 이 책들은, 인간의 생각과 표현이 정신·이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몸에 따라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크 존슨은 인지과학에서 인간이 사용하는 은유를 분석한 사람이다. 영어에서 'depend upon', 'based upon'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면, 여기에 전치사들이 왜 붙어 있느냐는 말이다. 이분 말에 따르면, 몸을 가진 행위 주체자가 몸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전치사와 동사 같은 것이 결합하지 않는다. 몸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몸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고, 그뿐 아니라 몸이 우리 의식의 주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렐라 책도 같은 맥락이다. 보통 서양에서 '주체'라고 말할 때는 플라톤 이래로 '의식 주체' 아니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를 이야기한다. 몸과 분리한 주체 개념이다. 바렐라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내가 누군가와 어떤 행위를 하는 가운데 의식 주체가 세계와 더불어서 반응한다는 것이다. 몸이 세계와 만나서 반응할 때, 주체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내용을 다룬 책이다.

이렇듯 몸, 의식, 세계가 별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돼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생각이 최근 여러 학자에게서 공유된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도 그렇게 생각했고, 요즘에 내가 관심하는 철학자 앤디 클락(Andy Clark, 1957~)이나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공유하는 생각들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다.

- 인지과학·진화생물학·현대물리학에도 관심을 두고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학문들을 종교철학과 신학의 문제에 접목해 발표해 왔는데. 신학 작업을 할 때 '학제 간 연구'가 어떤 점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인지과학이나 다른 학문의 연구 결과를 신학과 접목할 때, 다른 분야가 묶이는 듯하나, 여러 측면에서 관계가 있다. '성육신'은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말 아닌가. 지젝의 책을 읽고 나서는 성육신에 대해 다른 통찰을 할 수 있었다. 보통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위해 대속했다는 것을 핵심적으로 부각한다. 지젝도 성육신을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지만, 그는 '그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아서 대신 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인간이 됐다. 보통 하나님이 인간이 되면 신적 능력을 갖고 있어서 위급할 때 자기도 구하고 자기를 돕는 주변 사람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너무 똑같이 인간이 돼 버렸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함의를, 쉽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속하셨구나'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대속설로 성육신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맞지 않다. 누가 죽을죄를 저질렀는데,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죄를 짊어진다?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근대 사법 체계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개념이다. 죄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인권 기준과 맞지 않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대신해서 자식이 저지른 범죄로 감옥에 갈 수는 없다. 인권 개념은 각 개인에게 자신의 행위를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치렀다는 게 말이 되는가. 가만 생각해 보면, 이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납득되는 경우는 하나다. 부모님이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는 유년기에다가 정신세계를 가둬 두는 것이다. 이들이 성인기로 들어갈 때, 근대 사법 체계로 대속이 용인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점을 금방 알 수 있는데도 그 개념을 바꾸지 못한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 있는 퇴행성의 근원이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대속으로 십자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

인지과학을 가져오면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우리는 보통 정신과 몸을 나눠서 생각한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물건처럼 고정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몸을 구멍이 뚫린 경계선으로 규정했다. 사실 몸은 뚫려 있고, 경계가 없다. 인지과학에서는 두뇌가 몸을 매개로 세상을 간접 경험한다고 지적한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고 할 때, 육신은 'flesh'다. 재밌는 지점이 있는데,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을 이야기했지만,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기관 없는 신체'를 이야기했다. 기관은 위계질서를 전제하기 때문에, 들뢰즈가 파악한 'body'가 아닌 'flesh'로서의 몸은 살처럼 완전 평평한 차원에서 모든 것이 수평적으로 위계질서 없이 리좀(Rhyzome)적으로 퍼져 나가는데, 이 속에 생명의 약동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와 그 세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감수성을 보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몸은 원래 감수성이다. 놀랍게도 두뇌 자체에는 감각이 없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두뇌 자체가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두뇌가 세상을 경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몸이라는 인터페이스를 갖는 것이다. 이 인터페이스를 통해, 감각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경험한다. 감각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실재는 경험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제한된 실재다. 말하자면 감각이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경험된 것을 뇌가 재현해서 세상을 재구성하는 셈이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감수성을 무한히 열어 놓은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말은, 배상賠償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죽음에 감수성 있게 반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예수만 죽은 것도 아니고, 예수만 십자가 처형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세상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죽음이 끊임없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 그때 어디 계셨느냐"고.

그렇게 물을 때, 전통적 신앙 담론은 하나님이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나중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고 답한다. 한 목사님이 세월호 때 이렇게 설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신정론적 대답으로는 틀린 게 아니었다. 유족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대답이었다는 게 문제다. 오늘날 신학의 현주소다. 전통적 신앙의 대답이 막상 그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것.

그들에게 가장 어필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안산 분향소에서 3년 동안 유족들과 개신교 예배를 함께했던 박인환 목사님(화정교회)이다. 자기 교회가 있는데도 3년간 분향소에서 계속 예배하며 함께했다. 함께하는 것이 곧 감수성이고 성육신이다.

인지과학을 직접 신학 언어로 바꿔서 신학을 만들 수는 없다. 다만 언급한 것처럼 인터페이스, 네트워크 등 몸을 새롭게 보는 개념들을 차용해 우리의 신학 언어를 재해석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조건은 이것이 임시방편이라는 점이다. 영원한 절대적 대답은 없는 듯하다. 하나의 랭귀지를 절대시하지 않는다면 꽤 유용할 것 같다.

박 박사는 인지과학 등의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현실에 맞게 신학 언어를 재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진화론도 같은 맥락이지만, 조금 민감한 문제다. 다윈이 <종의 기원>(동서문화사)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대부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진화론은 종의 기원을 설명한 뒤, 지금까지 와서 종이 고정됐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종의 경계가 매번 바뀌어서 새로운 종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오늘날로 적용하면, 인간이라는 종의 경계는 생각보다 느슨할 수 있다. 성도 느슨한 바운더리 안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집단으로 살아가는 경우 남녀 비율이 1:1~1:1.3을 넘어가면 큰 일이 생긴다. 여기서 1.3은 여성을 지칭한다. 1:1로 남녀 비율이 존재하면 그 집단은 다음 세대에 인구가 급락한다. 수컷들이 싸움을 통해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1.3이면 다음 세대 그 집단에 인구 폭발이 일어난다. 1:1.4면 유지가 안 된다. 다음 세대 인구가 과포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인공수정이나 낙태 같은 수단이 없을 때도, 놀랍게도 남녀 비율은 조절돼 왔다. 여기서 발견한 게 일종의 '집단 선택'이다.

요점은, 내가 남자로 만들어지고 누군가 여자로 만들어진 것이 하나님이 태초부터 정해 준 운명이라기보다, 자연이 인구 집단 전체 성비와 균형을 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 균형에 따라 내가 남자로 정해졌다는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젠더(Gender)나 섹스(Sex)가 영원히 보존 불변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성과 인구의 다이내믹이 가변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서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니까 종이 성적 욕망을 갖고 출산하고 번성하는 것을 성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생물학은 '번성'이, 성이 균형 있게 유지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성을 번식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 이들도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체 집단에서는 하나의 다이내믹이다.

조금 더 급진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시대에 '성'을 출산이나 번식 수단으로 삼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증가하는 것은 같은 역학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에 대한 충분한 토론 없이 성경 구절을 자기식대로, 기존 상식으로 해결한 다음, 기존의 도덕 기준에 따라 마녀사냥하고 있다. 이는 관계의 복잡성과 중층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공부는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충분히 생각하게 해서 몽매하지 않게 해 주는 '합의에 의한 해법과 대안'을 모색하는 징검다리가 돼야 한다. 교회도 신학도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학제 간 연구'는 해답을 주기보다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다양한 생각을 열어 주는 듯하다. 우리가 당면한 여러 시급한 과제에 대해, 성급한 해법이나 준비되지 않은 대안을 내지 않게 해 주는 수단이다.

박일준 박사는 '학제 간 연구' 및 '다중 학문적 연구'(Multidisciplinary Study)가 우리 시대의 복잡한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이 시대에 독서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가 몸으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책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책은 몸의 연장이다. 여행 몇 군데 가 봤느냐고 물었을 때, 10군데 이상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여행을 상당히 많이 해 본 사람일지 모른다. 세상에서 경험해야 할 장소가 10군데밖에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엄청 많다. 우리는 모든 곳을 체험할 수 없다. 책은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간접 경험을 폭넓게 할 수 있게 해 준다.

독서는 결국 자기 세계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다. 내가 나와 다른 것과 합일하는 것을 엑스터시(ecstasy)라고 말한다. 엑(eks=ex)은 'out of'라는 의미다. 스터시스(stasis)의 의미는 '현재 상태로부터'라고 풀 수 있다. '하나로 된다'는 엑스터시스(ekstasis), 그 신비적 합일의 어원은 바로 '자기로부터 끊임없이 나가는 것'인 셈이다. 독서는 일종의 엑스터시다.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나가서 새로운 자기 경계를 형성하고, 그 경계가 형성되면 또다시 나간다. 이 일을 멈춘다면, 인간은 그냥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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