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주원규 목사가 '예배당 건축 기행'을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한국교회사를 이야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한경직 목사가 그렇다. 한경직 목사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어둠과 분단의 아픔을 겪은 한국 근현대사의 길목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보수적이고 헌신적으로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분단 이후에도 중단 없는 민족 복음화와 통일을 외쳤다. 또한 그 외침이 공허한 구호에 머무르지 않도록 종교와 사회 안팎에서 사랑을 실천했다. 거기다 우리네 이웃의 가난과 슬픔, 부박한 삶에 실제적 위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란 메시지를 남긴 것 역시 한경직 목사를 한국교회의 대표 이미지로 떠올리는 데 이견이 없는 이유가 된다.

그런 한경직 목사의 정신이 역사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영락교회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터전이기에 특정 인물의 이미지가 교회를 지배해선 곤란하다. 필자는 특정 인물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교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반추함에 있어 한 인물이 이끌어 온 주요 가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영락교회를 구축해 온 역사의 한자리를 유의미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계기로 한경직 목사를 떠올린 것이다.

교회 건축과 예배당은 교회가 걸어온 길을 담고 있다. 비록 그 길이 빛과 그림자라는 양면을 모두 드러낸다 해도 쉼 없이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것은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50주년기념관과 예배당. 신구의 조화가 엿보인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영락교회 - 대표적 개신교 랜드마크

서울시 중구 수표로에 위치한 영락교회는 명동성당과 평화방송사 등과 인접해 있는 일종의 종교 랜드마크로 알려져 있다. 영락교회 건축물은 종교 고유의 가치에 주목하는 클래식함과 세상과의 교감을 상징하는 현대적 이미지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현대사회에서의 대도시는 그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광의적 문화와 특징적 문화로 동시에 나타낸다. 광의적 문화라 함은 시민사회가 보여 주는 고유의 생활양식이 묻어 있는 보편적 건축 문화라 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상보적 개념인 특징적 문화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서울시 중심가로 인정받는 강북 명동에서 가톨릭의 종교 가치를 대표하는 명동성당과 더불어 자리한 영락교회는, 명동성당의 상징이 그렇듯, 단순한 종교 건축을 넘어선 한 국가와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불리기에 충분하다.

개신교 교회 건축이 매우 현대적이며 대중 친화적인 공간 구성을 지향하던 때가 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신군부를 거쳐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본격적으로 점화된 대표 전략이다. 만약 영락교회가 그러한 유행에 치우쳐 본래성을 잊고 획일화의 함정에 빠졌다면 영락교회는 특징적 문화의 상징도 잃고 랜드마크로서의 가치도 훼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락교회는 신구新舊의 조화로 보이는 본당의 클래식한 건축물과 50주년기념관으로 대표되는 모던한 건축물 사이의 시대적 간극 유지와 보존이란 두 주제를 적절히 공존시켰다. 그렇기에 영락교회는 한국교회사의 측면과 서울을 대표하는 특징적 문화라는 두 가지 점에서 공히 종교 랜드마크의 이미지를 상실하지 않고 유지한 건축물로 인정받는다.

영락교회를 둘러본 필자는 이번에도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이렇게 구별하는 게 적절한진 모르지만 신구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시대적 맥락을 입체적으로 담아낸 영락교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 답을 앞서 밝힌 한경직 목사의 발자취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뒤따랐다. 그때 떠오르는 키워드는 비교적 명료했다. 바로 복음과 통일이다. 역사 속에서의 복음, 복음 속에서의 통일.

역사 속에서의 복음

평양 대부흥회로 회자되는 초기 한국 기독교사에서 북한 교회의 활약과 구령에의 열정은 막대했다. 그 열정은 세계 교회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처음 북한 지역에 신앙의 가치를 뿌리내린 한경직 목사는 그 열정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이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생명 울림에서 찾았다. 그 지속성의 최종 표지는 단연코 복음이다.

그런데, 해방 이전엔 일제강점지의 핍박이, 해방 이후에는 소련(구 러시아) 스탈린주의의 광풍에 휩쓸린 공산주의가 복음의 순수 가치를 위협했다.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는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격랑 모두 복음의 순수성을 억압하는 실제 위협으로 보았다. 그래서 결국 월남의 길을 택하게 된다. 월남 이후 영락교회는 교회 정체성 수립의 측면에서 복음의 순수성이란 원형적 가치에 집중한다. 그와 동시에 영락교회는 '자유', '순수'란 역사적 의미와 이념에 천착하게 된다. 이러한 의지가 지금의 본당 건물에 오롯이 구현되어 있다.

1949년 첫 기공식을 시작으로 반세기를 넘어오기까지 여러 개축 과정을 거쳤지만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본당 건축물의 클래식한 익스테리어(exterior)는 얼핏 보면 서양 전통의 교회 건축양식을 단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락교회 본당 건축물을 단순 차용만으로 보긴 어렵다. 복음의 가치를 지키고 그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순수성에 대한 의지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 의지를 펼치는 부분에서 이념적으로 다소 편중된 모습을 보이긴 해도 한경직 목사가 이끌어 온 부분은 바로 이 지점, 복음의 순수성이다.

이 경우 오해가 생긴다. 소위 근본주의의 시선은 복음의 순수성을 사회와 역사에 대한 몰이해, 혹은 무관심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자신들의 편리에 따라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렇다. 정교분리를 강조하는 이들이 오히려 군사독재를 찬양하고 불의에 침묵하고 맘몬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의 노예처럼 굴어온 이율배반적 모습을 수시로 보여 왔다. 그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공공연히 보여 준 우민화된 현실 아닌가.

하지만 영락교회가 말하는 복음의 순수성은 우민화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애쓴다. 영락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한국 사회란 콘텍스트(context)와 연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통일에 대한 담론이 그렇다.

영락교회는 통일에 대한 개신교의 입장을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 비교적 선명히 밝혀 왔다. 그 실천 양태는 신구의 조화로 언명한 1994년에 착공된 50주년기념관 이하 여러 신축 건물의 공간 구성과 쓰임새의 펼침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50주년기념관(위)과 정면에서 본 예배당. 뉴스앤조이 박요셉

복음 속에서의 통일

진보와 보수의 이념 차이를 잠시만 내려놓고 보자. 영락교회가 보여 준 통일에 대한 입장, 그리고 실제로 이뤄 온 활동 스펙트럼을 보면 그 영향력에서만큼은 한국 사회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게 사실이다. 50주년기념관으로 대표되는 건물은 북한 주민 지원에서부터 시작해 교육, 통일 논의, 정책적 연구까지. 북한 지원과 통일 운동 차원에서 종교 기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가치를 산출하고 있다. 탈북자 지원과 교육에서부터 시작해 통일에 대한 시대적 요청과 실천 방향까지 말이다.

이러한 광폭의 행보가 가능한 건 공공연히 정교분리 입장과 복음의 순수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접근하는 태도와는 확실히 차별화된 것이다. 이를 단순히 월남한 실향민들이 주역이 된 영락교회만의 특징이라고 설명하기엔 설득이 어렵다. 도리어 그 반대의 입장에서 봐야 이해가 수월하다. 교회의 대사회적 가치는 당대 사회가 가진 시대적 콘텍스트와 본질적으로 교류해야만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본질적 교류를 위한 인식의 비판적 계승이 선행될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영락교회는 교회가 추진하는 통일 사업의 적실한 결과물인 50주년기념관이란 건축물을 통해 통일 운동을 지속하는 대사회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렇듯 영락교회는 반세기를 훌쩍 넘어 한 세기 가까이 겪어 온 격랑의 한국 사회, 특히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얽혀 있는 오늘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맞서 왔다. 통일과 복음이란 상징을 건축물을 통해 표현하고 그 공간 가치를 지속한다는 점에서 개신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기에 분명한 것이다. 그와 함께 영락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오늘의 우리는 개신교의 랜드마크인 영락교회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선교관 건물(위)과 측면에서 본 전경. 뉴스앤조이 박요셉

오늘의 영락교회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복음의 순수성은 어쩌면 빛과 그림자라는 두 얼굴 모두를 읽어 주길 요청하는지도 모른다. 복음이 천상적 차원에서의 유희가 아닌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네에게 건네는 말 건넴이라면 이 요청은 당연할 것이다.

영락교회가 선택한 복음의 순수성 속에 나타난 빛은 혈연, 지연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한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우주적 하나 됨이다. 바울의 표현처럼 복음 안에선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자의 차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인 것이다. 영락교회는 바로 이 복음의 빛인 하나 됨이란 대승적 기준에서 교회를 이해하고 오늘의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 그런 측면에서 영락교회는 하나 됨의 기준에서 추출된 종교적 보편성인 예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복음의 빛을 견지해 오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는 교회가 가져온 획일적 문제 해결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복음의 순수성을 진보와 보수의 가치 중 보수의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고 해법을 찾으려는 태도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그렇다. 분단 극복의 해법 역시 이념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여 준다는 건 복음의 순수성이 가진 그림자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영락교회는 결국 복음의 순수성이 나타내는 빛과 그림자를 모두 드러낸 개신교의 어제와 오늘을 대표한다.

빛과 그림자를 말하는 것은 단순한 비판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한국의 근현대사를 외면하지 않고 때론 돌파하고 때론 부대끼며 받아들인 민낯의 흔적으로 영락교회를 읽는 첫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그것이 영락교회를 비롯한 한국을 대표하는 개신교 랜드마크를 읽는 유의미한 독법이 되길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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