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교회세습반대를위한신학생연대가 보내온 두 번째 글입니다.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현재 진행 중인 명성교회 사태를 멀리서 전해 들으며, 10여 년 전에 떠나온 뒤 거의 발걸음을 향해 본 적이 없는 그곳, 그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적어도 한때 나에게, 그리고 '명성교회 교인'이라고 말하기를 즐겨 하던 많은 이에게 아름답고 감사하게 여겨졌을 뿐 아니라 자랑스럽기까지 했던 그곳이 이제는 부끄러움과 수치, 지탄의 대상이 됐다. 이 일은 세습이라는 사건이 가져온 일순간의 우발적인 결과일까. 아니면 명성교회라는 하나의 사회가 지녀 왔던, 혹은 그곳의 종으로 자처했던 왕과 같은 담임목사의 사고와 행동 속에 잠재해 왔던 어떤 치명적 요인의 참담한 결과일까.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순간을 돌이켜 볼 때, 소위 '은혜'를 받았던 적이 많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참으로 아버지와 같이 넉넉함과 풍성함을 지닌 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분 말씀의 주된 주제는,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아버지처럼 우리가 비록 잘못을 했을지라도 용납해 주시고 넉넉하게 받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였고, 현재는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예수를 잘 믿으면' 여느 동화의 결말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로 마무리되는 복된 삶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위로의 메시지는 젊은 시절 어려웠던 그분 자신의 삶에 대한 간증, 그리고 특유의 유머스러운 기교와 어우러져 내적·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많은 이를 감화했다.

그런데… 그런데… 가끔 이상해 보일 때도 있었다. 종종 그분의 용납이 이해를 초월해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이가 지탄해 마지않던, 그리고 그것이 지당하게 보였던 어떤 사건에 대해 그분은 줄곧 정의가 아닌 용납을 말씀하셨다. 기억나는 일례가 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르윈스키 사건으로 미국과 세계가 경악하고 있을 때, 그분은 수차례 반복적으로, 클린턴처럼 훌륭한 대통령이 없었다며 치켜세우기를 조금도 꺼려 하지 않았다. 이런 묵과적 용납 때문인지, 당시 어떤 부교역자들은 담임목사님의 스케일이 범인인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다며 선전하고 다녔다.

이런 무조건적인 용납의 경향성은 정의, 혹은 정의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 정의를 향한 행동에 대한 거리낌과 연결돼 있는 듯 보였다. 내 기억에 그분은 설교 중 이유가 어찌됐든 데모와 파업과 시위를 늘 굉장히 나쁜 것으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누가, 심지어 목사라 할지라도, 선지자들처럼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비웃는 듯 보였다(한때 교계에 날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어떤 목사님을 향해 그러했듯). 그분에게 정의를 추구하는 것, 불의에 대항해 일어나는 것은 젊을 때 잠깐 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계속적으로,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아닌 듯했다. 그분에게 인간은 무엇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이런 말씀을 오랫동안 듣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까. 나는 한때 명성교회에 대해 걱정 어린 말을 전해 주던 한 명성교회 교인에게 이번 세습 사태 이후 한 놀라운 말을 듣게 됐다. 나는 물었다. 교회 상황이 좀 그럴 텐데, 교회 생활하기 어렵지 않으시냐고. 그분은 말했다. 자신을 비롯해 현재 남아 있는 많은 교인은 이 세습 문제를 개의치 않는다고.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명일동 아파트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뿐이라고. 그분은 거기에 더해 나에게 충고하듯 말을 덧붙였다.

"전도사님이 아직 젊어서 모르시는 것 같은데, 목회는 서비스업이고 교회는 고급 문화 공간이에요."

이런 이해에 따르면, 교회는 교인들이 서로 경조사를 챙겨 주며 고급스럽게(?) 교류하고, 교역자는 교인들이 사회에서 '잘되도록' 말씀으로 토대를 닦아 주고 정신적·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곳이다. 이렇게 보면, 명성교회 세습에 대해, 교인들이 좋다는데 왜 다른 교회와 세상이 난리냐고 되레 힐난하는 현재 명성교회 교인들 속내를 알 만하다. 그들에게 교회는 자신들에게 행복을 제공하고 정당화해 주는 터전이면 되는 것이다.

누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비난하겠는가. 행복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인간에게 보장돼야 할 정당한 욕구이자 권리 아닌가. 그런데 적어도 기독교 사상사의 한 시점에는 행복 추구를 악의 기원과 연관해 이해했다.

악에 대한 현대의 담론으로, 근래 박근혜 정부 덕에 더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담론이 있다. 반면 기독교 사상사에서는 악, 특히 악의 기원을 전통적으로 '천사의 타락', 소위 '루시퍼' 담론으로 이해했다. 이 '천사의 타락' 담론은 악과 관련한 신구약 여러 구절을 기초로 한 교부들의 성서 해석에서 기초 지어졌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독보적 준거가 되는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중략)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하략)"(요한복음 8장 44절)라고 말씀하실 때, 여기서 '처음'은 그가 창조됐을 '처음'이 아니다. 그의 죄의 '처음'(ab initio peccati)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구라도 본성 자체가 죄라면, 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마귀는 창조 때는 천사였지만, 그의 죄 때문에 타락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달리 말해, 죄가 마귀로의 타락을 야기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런 해석은 이사야 14장 12절(타락한 천사의 이름이 'Lucifer'로 불리는 근거가 되는 구절), 에스겔 28장 15절 등의 구절로 뒷받침된다. 어거스틴은 그 천사가 지은 죄를 이해할 때,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려 했던" 루시퍼의 예가 알려 주듯, 교만을 들었다. 교만은 질투보다 근본적인 악인데, "질투는 다른 이가 잘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지만, 교만은 자기 자신의 탁월함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자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은 어떻게 천사가 교만에 이르고 결국 타락하게 됐는지 이해하기 위해 가설을 세운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지을 때 우선적으로 먼저 '행복에로의 의지(beatitudinis voluntas)'만 주셨다. 이 경우, 천사는 행복 이외에 다른 것을 원하지 않으며, 스스로 이 행복에로의 욕구를 뿌리칠 수 없다. 그리고 더 큰 행복이 있다면 그는 이를 더욱 갖기 원할 것이며, 이 행복이 얼마나 더 높은지 깨닫는 만큼 더욱 행복해지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하와가 뱀에게 유혹당했듯,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복에로의 의지에서 비롯한 하나님과 같아지기 원하는 욕구는, 그것이 피조물인 그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기에 의롭지 않은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그에게 주어졌던 행복에로의 의지라는 어떤 필연적 원리에 의해 이뤄졌기에 불의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의로운 의지(justa voluntas)' 없이 '행복에로의 의지'만 가진 천사가 이익(commodum)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면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그는 타락했다. 그렇기에 안셀름은 "(천사는) 정의로운 의지가 없다면,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다시, 어느 순간 행복 공동체가 돼 버린 명성교회, 그리고 김 씨 부자父子 목사를 생각한다. 그들은 불의를 추구하지도, 악을 도모하지도 않는 것 같다. 다만 신앙의 이름 아래서 행복을 추구할 뿐이다. 이들은 행복의 극단에 이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는 총회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양심에 있는 정의의 요구를 행복의 추구 가운데서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들 양심에 정의의 음성이 없었더라면, 세습에 대한 말을 여러 번 번복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정의로운 의지'로부터 떨어져 나가 '행복에로의 의지'의 길 극단에 서 있다면, 또 하나의 악의 출현을 보게 될 것인데… 이것은 정말 애석하고 슬픈 일일 것이다.

최건우 /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생이며, 현재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에꼴 프라틱 데 오뜨 에튀드, 고등연구원, 파리) 중세연구 박사과정에서 수학 중이다. 중학교 때 명성교회에 등록해 10여 년간 명성교회 교인으로 신앙생활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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