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주원규 목사가 '예배당 건축 기행'을 격주 간격으로 연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1987'과 향린교회

작년 겨울에 개봉한 영화 '1987'이 화제다. 2016년 연말과 2017년 초반, 박근혜 탄핵 사태와 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촛불 혁명의 발생 기원을 탐색한다는 의미에서 1987년 6월 항쟁이 재조명된 게 그 이유다. 군사독재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총칼도 모자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야만에 맞선 민초들의 저항, 그 들불 같은 도화선을 담아낸 역사적 시기가 바로 1987년이다. 그렇기에 무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영화 '1987'의 여운을 복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려는 게 아닐까.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죽음,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한 대학생의 죽음 앞에서 시민사회 전체가 공분했고 결국 공의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권력이 아무리 힘이 강하다 해도 정의의 이름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 대학생, 가정주부, 넥타이 부대까지, 민중 전체가 들썩인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을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저항 의지로 담아낸 교회가 있다. 보수주의 신앙이 주류였던 한국 기독교에 '민중이 곧 예수'라는 예언자적 일갈을 쏟아 낸 안병무, 홍창의 등 12명의 젊은 진보 신앙인의 정신을 계승한 향린교회가 그렇다. 여러 질곡과 부침을 겪은 끝에 을지로 3가에 자리 잡은 오늘의 향린교회는 교회가 소외받고 가난한 민중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구현한 장소로 평가받는다.

향린교회 예배당. 뉴스앤조이 김은석

향린교회는 참된 인간다움과 삶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를 구현하고 이를 지속하는 게 예수 정신의 요체임을 표방한다. 그렇기에 향린 정신은 인간 존엄을 학살하는 독재 정권의 부당함과 맞서는 것을 교회의 본령으로 보았다. 교회는 본령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법, 향린교회는 신군부의 야만 앞에서 신음하는 민중을 해방하는 일이 비종교나 정치인의 몫이 아닌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교회의 역할임을 분명히 하며 그에 대한 저항을 계속해 왔다. 영화 '1987'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향린교회는 때론 민주화 투사들의 은신처로, 때론 민주화와 관련된 호소와 공론의 장으로 기능해 온 것이다.

이처럼 향린교회의 역사는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향린교회는 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 특별히 프로테스탄트의 존재 의미임을 주장해 왔다. 그 흔적의 발자취가 교회란 정신 공동체를 담아낸 공간을 통해 오롯이 표현되고 있다. 정신의 공간화가 역사의 숨길 사이사이에 스며든 것이다.

천민자본주의 심장부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는 교회

영하 10도 안팎의 매서운 강추위가 계속되던 2018년 1월 6일, 을지로3가역에 내려 향린교회를 찾으려 했던 필자는 20분 정도를 헤매야 했다. 2년 전 찾았던 향린교회가 건물을 이전한 건 분명 아니었다. 3호선 을지로3가역에서 도보로 먼 거리도 아니다. 하지만 교회 찾기는 2년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주위가 대형 은행과 그룹 계열사, 금융기관 등 강북 중심가를 대표하는 고층 빌딩들의 숲에 둘러싸였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글로벌 프랜차이즈 카페테리아와 첨단 시설들이 촘촘히 들어선 탓이다. 새로 건축을 시작한 공사 현장을 끼고 돌아야 나타나는 향린교회를 찾아내는 건 아쉽게도 작심하고 찾는 이가 아니라면 어려운 일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20여 분간의 칼바람을 뚫고 발견한 향린교회 앞에 선 필자의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교회 벽면에 내걸린 플래카드는 여전한 야성으로 펄럭였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마치 십자가에 매달린 양편의 강도처럼 내걸린 두 개의 플래카드가 한겨울 칼바람에 흩날렸고, 양편 중심에 자리한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표어가 향린교회의 교회론을 오롯이 드러내는 듯했다.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

빌딩숲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플래카드를 내건 예배당과 만날 수 있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한국의 자본주의 현실에 '천민화'란 이름을 붙여 왔다. 19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을 겪은 뒤 더한층 돈의 중요성이 강조된 이래 맘몬의 악순환이 가속화한 탓이다. 한국 사회는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자본의 노예가 된 2000년대 이후 평화·정의·민주화 등의 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했다. 이러한 천민자본주의의 물결에 맞춰 변화해 온 소위 주류 교회들은 향린교회의 랜드마크인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고루하고 진부한 것으로 취급했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독재 타령이냐, 국가보안법 운운하는 건 철 지난 구호가 아니냐. 누가 요즘 간첩 이야기를 꺼내는가.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 근본주의 교회 및 주요 종교계 인사들은 향린교회의 좌경화, 이적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향린교회를 예수님의 우주적 구원과 복음 정신을 훼손하는 위험천만한 정치 집단으로 낙인찍었다.

2018년의 오늘, 칼바람 앞에 선 향린교회는 외부의 동요엔 아랑곳없이 세 개의 플래카드로 그들 자신의 교회 역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건물 외관 역시 언뜻 볼 때엔 변화를 망각한 듯한 예전 분위기 그대로 고수하는 듯 보였다. 건물 벽체는 전체적으로 시간의 풍상을 입어 많이 낡았으며, 옥상에 가설로 처리된 가건물 느낌의 건축물 역시 전체적인 리모델링에 신경 쓰지 않은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교회 건물을 살피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주변은 거대 금융과 자본주의의 격랑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향린교회가 보여 준 외부 변화에 대한 묵묵부답적 외형 고수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변화를 거부한 고립인 걸까. 아님, 침묵을 통해 종교 본연의 가치로 인정받는 수도원 정신을 추구하는 걸까.

그 생각을 품고 교회 안으로 들어선 필자에겐 생각의 전면적인 수정이 요구되었다. 둘 다 틀렸다. 향린교회는 고립을 선택하지도 않았고 종교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는 소위 주류 교회로 돌아서지도 않았다. 그들의 공간은 저항의 몸짓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안팎으로 지켜 나가는,
안팎으로 저항하는

내부 공간 역시 2년 전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교회 사무를 보는 공간이 2층에 위치했고 – 각 사무실은 가벽을 설치해 구분해 놓은 듯한 가건물 느낌이 강했다. – 3층에 대예배실이 자리 잡은 구조 역시 예전과 같았다.

예배당 내부는 동양적이란 모호한 뉘앙스를 넘어선, 우리네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공간 구성이 돋보였다. 전통적인 장의자 위에 한 권씩 놓여 있는 국악 찬송가, 한국적 전통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창호지와 창틀로 만든 창문은 세련된 장인이 직조했다는 느낌보단 조금은 투박해도 한국적 가치를 보여 주려는 표현 의지로 충만해 보였다.

예배당 내부는 한국적 가치를 보여 주려는 표현 의지로 충만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강대상이 위치한 예배당 중앙에는 한국적 심벌이라 할 수 있는 징이 세워져 있었고, 성가대석으로 보이는 곳엔 가야금, 거문고 등 기본 국악 악기가 놓여 있었다.

어떤 이들은 향린교회의 예전 형태가 국악 예배와 유사하다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향린교회의 예전은 국악이 양념처럼 곁들여지는 국악 예배가 아니다. 한반도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로 예수를 호흡하고 느끼기 위한 근본적 방법론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 근본적 방법론을 소위 토착화라 부르기도 하지만 '토착화'란 단어로 단순화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향린교회 3층 대예배실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중심 메시지는 우리 사는 한반도의 역사적 실존을 외면하지 말자는 공동체적 호소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예배당 중앙 벽면엔 수많은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작은 십자가들의 중심에 위치한 큰 십자가의 머리에 걸려 있는 가시면류관, 공동번역성서를 올려놓은 상 위에 있는 남북 나눔 작정함이 공동체 호소의 절정을 장식하는 듯 보였다. 수많은 작은 십자가는 큰 십자가의 항구적 상징인 가시면류관을 감당해야 하는 작은 예수들인 우리네 민중의 열망이 스며들어 있다. 남북 분단이란 평화 실현과 거리가 먼 현실에 끊임없이 아파하며 소리치는 것이다.

강대상 근처에 놓인 국악기들. 뉴스앤조이 김은석
예배당 중앙 벽면에 걸린 십자가들. 민속 악기 징도 한쪽에 세워져 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이처럼 향린교회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여전히 정전 중인 분단국가이며, 권력만을 탐하는 세계열강의 군수물자가 거래되는 야만의 전시 상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안팎으로 호소하고 있다. 향린교회는 예수의 정신이 정의와 평화로 대표된다고 보고 있다. 그 정의와 평화가 한반도 역사에서 우리 모두가 일궈 나가야 할 생명 의무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 의무가 자본주의 요청에 의한 강제적 공간 변화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그로 인해 비록 낡은 구시대 건물 취급을 받고 '아직도 국가보안법 타령이냐'는 식의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교회로 오해받는다 해도 그들은 자신의 것을 묵묵히 지켜 내는 것으로 진정한 변화와 진보를 추구하는 건지도 모른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를 떠나기 전 필자는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 입구 벽면엔 야고보서 3장 18절의 가르침인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란 구호가 새겨진 6월 민주 항쟁 기념비가 걸려 있었다.

기념비를 바라보던 필자는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되었다. '교회란 무엇인가'란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선 가치 구현 측면에서 다양한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근본적인 공통분모는 변하지 않을 거란 기대가 있다. 교회는 신을 위한 곳이 아니라 신의 사랑을 통해 새로워진 인간다운 인간이 발견되는 곳이란 기대가 그것이다.

물론 예수의 사랑이 어떤 방식과 가치로 구현되고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신학적 의견도 많고 그 해결책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예수 사랑이란 하나의 가치로 수렴되는 갈망을 품은 곳이 아닌가. 만약 예수의 사랑을 통해 발견된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을 멈춘다면 그 교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맥락에서 1953년, 전후의 폐허 위에 창립된 이래 2018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향린교회가 보여 준 분명한 정체성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수 정신의 구현을 위해 끊임없는 역동성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그 증거다. 비록 그 역동성의 실마리가 자본주의의 진창 속에서 신음하는 모순을 통해 발견된다는 게 씁쓸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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