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이 아닌 집단 수용소

나는 이런 난민촌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난민촌이 아니라 집단 수용소다. 나치의 아우슈비츠나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처럼 군인들에게 감시당하고 통제받는 범죄자들 수용소다. 보통 난민촌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이곳저곳에 생겨난다. 로힝자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방글라데시는 이 난민들을 불법 입국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군대가 감독하는 특정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로힝자 난민들은 미얀마에서 버마족의 미움을 받아 1992년부터 내쫓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버마 군경의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에 무장으로 저항한 결과로, 미얀마 군부의 조직적인 군사작전에 의해 로힝자 주민 수십만이 대대적으로 추방당했다. 국제기구들은 이 과정에서 6000명 이상 살해당했고 2만 이상의 여인이 강간당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항해해 피난처를 찾았다. 이 피난처는 부패한 군부에 의해 휘둘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인구밀도도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로힝자족은 다른 피난처를 선택할 수 없었다. 방글라데시가 이들이 조상 대대로 거주해 온 라카인주에서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로힝자족은 미얀마의 시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민권, 자기 땅의 소유권과 모든 재산권을 빼앗긴 채 쫓겨났다. 내가 난민촌에서 만난 로힝자족 사람들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질러 많은 주민이 주민등록증을 미처 챙기지 못한 채 피난을 떠났다. 지금 난민촌의 로힝자족은 목에 하얀 미얀마 주민증을 걸고 다닌다. 이 주민증은 방글라데시 정부가 만들어 준 것이다. 단지 로힝자족을 방글라데시 시민과 구분하기 위한 것이고, 미얀마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는 휴지 조각이다.

방글라데시 난민촌의 비닐 천막들. 60만 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사진 제공 개척자들

쿠트팔롱, 발리칼리, 발랑칼리, 삼라푸르, 나야파라 등 여러 난민촌은 다시 여러 블록으로 나뉜다. 한 블록에는 로힝자 난민 100가정이 속하게 되며, 블록은 A, B, C, D… 순으로 나뉘어 있다. 로힝자 난민들은 정해진 블록에서 살아가며 배급을 받는 동시에 감시도 받는다. 현재 방글라데시에는 60만 명의 로힝자 난민이 비닐 천막을 친 채 갇혀 살고 있다. 내가 처음 난민촌을 들어섰을 때 눈에 비친 것은 언덕과 산을 넘어 끝없이 펼쳐진 비닐 천막의 행렬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강제로 내쫓을 수 있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와 명분으로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인지 울분이 치밀었다.

내 예상과 달리, 방글라데시로 방금 탈출하여 대나무로 새로이 집 구조를 만들고 그 위에 비닐 천막을 치는 사람들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안도의 한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천막촌에서 여러 고개를 넘어가면, 1992년 이 난민촌에 들어와 아직도 똑같은 비닐 천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다른 난민들에게서 25년이 지난 이후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방글라데시 난민촌에서 로힝자족은 정착할 수 있는 영구적인 집을 지을 수 없다. 취업도 할 수 없고 정식 교육을 받을 수도 없다. 로힝자 난민촌은, 사육되는 동물처럼 살다가 천천히 죽어 가는 집단 수용소 같았다.

외로운 로힝자족

로힝자족 사람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식량과 의약품 등의 인도적 지원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다시 미얀마의 고향 땅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이들이 방글라데시의 집단 수용소에서 벗어나 조상 대대로 살아온 미얀마 라카인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미얀마 정부에 압력을 가해야 하며, 미얀마의 정의로운 법조인들이 이 버림받은 로힝자족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로힝자는 터부다. 아무도 로힝자를 대변하려 하지 않는다. 입에 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도 예외가 아니다. 온 세계가 칭송하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정부의 실권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도 로힝자족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의 주역들이 여성 인권에 무관심했고 미국 독립 운동의 주역들이 흑인 해방에 반대했듯이, 버마 민주화의 영웅들도 로힝자족 차별에 아무런 의분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로힝자는 자기 국가에서 버림받았고 국제사회로부터 외면당했다. 사람들은 분쟁 난민들보다는 자연 재해로 발생한 난민들에게 더 깊은 동정심을 갖는다. 자연재해는 눈에 그려지고 그 고통이 쉽게 상상된다. 그러나 분쟁으로 인한 난민들에 대해서는 분쟁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판단이 앞서고, 도와준들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으로 지레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로힝자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일단 현재 로힝자족이 당한 심각한 재난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 사태를 알고 있는 그 소수의 사람들 중에서도 로힝자족이 겪는 박해가 과거 영국이 버마를 식민 통치하던 시절 그들의 앞잡이로 부렸던 역사적 경험 때문이라고 보면서, 미얀마 정부의 비인도적 살상과 탄압을 암묵적으로 편드는 이가 대부분이다. 알카에다나 IS 때문에 파급된 이슬람-포비아까지 겹쳐 무슬림이 겪는 고난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눈길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우리가 만난 로힝자 난민들은 우리처럼 사랑하는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은 맑게 빛나고 여인들은 아름답고 정숙했다. 어른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손 대접하기를 즐거워했고 자기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들이 겪는 고난은 단지 그들이 소수 부족이요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을 믿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또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뼈아프게 배운 교훈이다. 누구도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이 원칙을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된다.

로힝자족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손 대접하기를 즐거워했다. 사진 제공 개척자들

돗자리 학교를 열다

로힝자족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경작했던 땅을 다시 되찾고,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집터 위에 다시 자기 집을 지을 때까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다. 개척자들은 이 아득한 길에 들어섰다. 지금 당장은 급한 불을 꺼야 한다는 심정으로, 구호 활동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장애인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먼저 난민촌의 어린이들을 만나는 일부터 시작했다.

어린이들은 노래나 그림 놀이를 통해 쉽게 접촉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크레용과 종이를 준비해 난민촌을 찾아갔다. 돗자리를 깔기만 하면, 금방 어린이들이 몰려오고 미술 학교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들을 지켜보는 어른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이 아이들 손에 이끌려 난민 천막의 어두운 구석에서 병들어도 치료받지 못한 채 죽어 가고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개척자들은 로힝자 난민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이 걸어가야 할 멀고 먼 귀향길을 함께하기 위해 이제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돗자리 학교. 사진 제공 개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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