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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삼청교육대' 진실 폭로한 목사

[인터뷰] 이적 목사, 자전소설 <한국판 수용소군도 삼청교육대> 출간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8.01.03  18: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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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사회 정화를 빌미로 삼청교육대를 운영했다. 강제로 끌려온 교육생들이 목봉 체조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기존 영화와 드라마 속 '삼청교육대'에는 불량배와 깡패가 주로 등장한다. 이들은 조교의 호각 소리에 맞춰 구보를 하고, PT체조를 하고, 목봉을 들어 올린다. 한 달간 교육을 받은 뒤 '새사람'이 되어 사회로 복귀한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8월, 사회 정화를 취지로 삼청교육대를 운영했다. 깡패와 불량배만 잡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지지자, 언론인, 5·18민주화운동 참가자, 평범한 농부까지 '불순'한 기색만 보여도 끌어 들였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강제로 연행된 사람만 4만~6만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 온 이들 중에는 이적 목사(민통선평화교회)도 있었다. 당시 24세였던 이 목사는 수협에서 일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어느 날 호출을 받고 경찰서로 갔다. 처음에는 술집 외상값을 가지고 시비를 걸던 경찰은, 나중에 이 목사가 동인지에 발표한 시 '섬'을 문제 삼았다. 섬에 나오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라는 문구가 국가의 기층 민중을 비유하고, 그들의 피곤한 삶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고 경찰은 따졌다.

"시는 시로 봐 달라"는 이 목사의 요청은 묵살됐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삼청교육대 교육생은 A~D 등급으로 분류됐다. A급은 군법회의, B급은 4주 기본 교육에 6개월 근로봉사, C급은 2주 기본 교육에 귀가 조치, D급은 경찰서에서 훈방 조치됐다. A~C급 피해자들은 전국 25개 군부대로 흩어져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PT체조, 구보, 제식훈련, 목봉 체조 등 각종 훈련을 받았는데,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뒤에서는 구타와 가혹 행위가 행해졌다.

4주 순화 교육은 차라리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6개월 근로봉사는 지옥이었다. 당시 1만 명이 근로봉사대로 차출됐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노역과 고문이었다. 이적 목사는 최근 펴낸 자전소설 <한국판 수용소군도 삼청교육대>(시아)에서 이같이 말한다.

"말로는 근로봉사를 통해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것이 국보위의 교육 목적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교육과는 전혀 무관한 인간을 짐승 취급하는 현장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교육생들은 정말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의 생존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도 했다. 낮에는 진지 공사, 도로 신설과 보수, 통신망 매설, 무기고와 비행장 보수, 사격장 신설 등 갖가지 노역에 시달리며 굶주림과 추위 등을 견뎌야 했다." (292쪽)

삼청교육대는 한시적으로 운영됐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다행히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뒤 삼청교육대 진상을 밝히려는 움직임이 전개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총재 시절 "삼청 사건은 제2의 광주 사태"고 규탄했고,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정권에 반하는 이들을 상대로 한 정치 탄압이었다"며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1988년 국회 5공 청문회가 열릴 당시,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 관련 증인 및 참고인으로 출석해 삼청교육대 실상을 폭로했다.

논란이 커지자 노태우 정권은 1988년 10월 3일, 삼청교육대와 관련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교육 중 사망자는 50명, 부상자는 76명이라고 알렸다. 하지만 책임자 처벌과 피해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삼청교육대서 수천 명 사망
광주 학살 덮고, 국민 시야 가리려 운영
지금이라도 진상 규명해야"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의 산증인이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삼청교육대 실상을 폭로했다. 진상 규명을 위해 최근 책도 펴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이적 목사는 노태우 정권의 발표는 축소·왜곡됐다고 주장했다. 1월 3일, 서울 마포구 시아출판사 사무실에서 만난 이 목사는 "같은 부대로 끌려온 사람 중 10명이나 죽었다. 모두 고문과 구타로 숨졌다. 50명은 말도 안 된다. 삼청교육대는 학살 현장이었다. 나는 수천 명이 죽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삼청교육대 최장기수이기도 하다. 삼청교육대에서 1년간 억류됐고, 청송보호감호소에 2년간 수감됐다. 평범하던 직장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전과도 하나 없었고, 남들처럼 역사의식도 없어 데모도 한 번 안 나갔다. 평범한 청년을 역사적 사건에 끌어들인 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사건을 끝까지 살펴보고, 나와서 증언하라는. 그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마지막까지 있다가 풀려났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게 아니라고 이 목사는 주장했다. 1980년 5월, 전두환 정권이 광주 만행을 저지른 후 국민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삼청교육대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전두환이 광주 학살 사건을 벌인 다음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삼청교육대를 이용했다. 우민화 작전 중 하나가 삼청교육대다. 5·18민주화운동과 함께 삼청 학살의 진상도 규명돼야 한다. 38년 전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바라기는 문재인 정권이 과거 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진상을 규명했으면 한다."

이적 목사의 자전소설 <한국판 수용소 군도 삼청교육대>. 주인공 이상적은 청송감호소 출소 이후 자신을 미행하는 경찰을 보며 지난날을 떠올린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 사건 이후 평화통일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민통선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 보수 개신교계에 맞서 애기봉 등탑 반대를 해 왔다. 기독교평화행동목자단 소속으로 매주 미대사관 앞에서 시국 기도회도 개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목사를 향해 주사파, 극좌파라고도 부른다. 이 목사는 "나는 자발적 빨갱이이며, 주사파가 뭔지 모른다"고 웃으며 말했다.

만약 이 목사가 삼청교육대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목사는 국가 폭력으로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억울함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삼청교육대 사건이 역사의식을 함양해 줬다고 믿고 있다.

"삼청교육대 실상을 폭로한 대가로 수배돼 감옥도 다녀왔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 (삼청교육대에) 가지 않았다면, 닫힌 시각으로 살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너무 진하게 통일 운동을 한다'고 말한다. 죽을 만큼의 고통을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무슨 일을 하든 진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웃음)."

이 목사의 바람은 삼청교육대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는 것이다. 책을 출간한 이후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의 연락이 이어지고 있다. 비록 공소시효가 끝났지만, 국회에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할 생각이다. 영화계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제대로 된 삼청교육대 영화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가 폭력 앞에 침묵해 온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게 하는 건 무리일까. 이 목사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맘몬주의의 길을 걸은 지 너무 오래됐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건 어린애한테 책읽기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라도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본다.

정권과 갈등이 있어도,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개독'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현실 문제를 터치하지 않고는 기존의 좋은 이미지를 회복하기 힘들다. 우리만이라도 타협하지 않고 싸워 나갈 때 한국교회가 제자리에 서지 않을까 싶다."

국가 폭력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지만, 이적 목사는 억울해하지 않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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