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예진이의 방을 찾았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3년 8개월이 지나도 예진이의 방은 그대로다. 올해 4월 이사를 했는데 엄마는 딸의 방을 그대로 되살렸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부터 게시판에 붙어 있는 메모지, 심지어 휴지통까지 그대로다. 예진이가 보러 갔던 공연 티켓, 영수증이 버려져 있다.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 한 마디에 가늠할 수 없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예진이가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걸어 놓았던 옷가지도 그대로 두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겨울이 되어 침대 이불을 두터운 것으로 바꿨고, 방문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어수선하지만 가지런한 느낌. 엄마 박유신 씨가 매일매일 들어가 불을 켜 주고, 둘러봐 주고, 닦아 주기 때문이다.

예진이의 머리카락을 주운 것은 행운이었다. 방을 청소하다가 하나씩 발견했다. "옛날에는 머리카락 떨어진다고 그렇게 잔소리했는데, 그렇게 귀할 수가 없더라고요. 여섯 올인가 그럴 거예요." 여섯 올에서 예진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까. 엄마는 머리카락을 유리병에 고이 넣어 두었다.

얼마 전 12월 11일은 예진이 생일이었다. 전날 노란리본 극단에서 연극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엄마는 마트에 들러 미역을 샀다. 집 앞에 차를 대고 한참을 울었다. '예진이는 먹지도 못하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게워 내듯 눈물을 쏟고, 집에 들어가 미역국을 끓였다. 케이크를 예진이 책상에 올려놓고 온 가족이 촛불을 불었다.

박유신 씨와 예진이 방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자식을 잃은 슬픔은 3년 8개월이 지나도 하나도 아물지 않았다. 신기할 만큼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일이 생생하다.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온몸이 떨리는 그날의 공포와 무력감도 동일하다. 언제쯤 이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까라는 질문은 우문(愚問)이었다. 예진 엄마는 아마 평생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인터뷰 전날 제천에서 화재가 났다. 예진 엄마는 TV를 보면서 심장이 덜컥덜컥했다고 했다. 희생자들이 살려고 발버둥쳤지만 유리창이 두꺼워 나오지 못했다는 앵커의 말에 그는 몸서리를 쳤다. 반 이상이 잠긴 세월호에서 창문을 두들기던 아이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남의 일 같지 않죠. 준비 없이 이별하는 게 정말 아픈데. 사랑하는 핏줄을, 내 잘못도 아니고 그렇게 잃는 건 진짜 가슴 아프죠. 29명이면 세상에… 그 가족, 친척, 얼마나 많은 사람이 또 죽을 때까지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하나…."

예진이 방은 그대로다. 예진이 생일 기념 화분만 늘어 간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사람들은 이제 참사가 발생하면 세월호와 빗댄다. 세월호는 생명보다 돈을 우선하던 대한민국을 각성시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래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안전'이라는 가치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 이정배 교수(감신대 은퇴)의 설교처럼 "세월호가 대한민국을 구원했다".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하는 성탄 예배, 이정배 교수의 설교를 들으며 박유신 씨는 많이 울었다.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고귀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큰 힘이다. 감사한 마음과 함께, 그간 사람들에게 당한 수모에 대한 설움으로 울었다.

"감사했어요. '재수 없어 물에 빠져 죽은 애들'이라고 심하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지 않고, '이렇게 썩어 빠진 나라를 구해 낸 아이들'이라고 말씀해 주시니까 감사하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이 썩어 빠진 나라 안 구해도 되는데, 너희와 안 바꿔도 되니까 그냥 너희들이 살아 돌아왔으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도 하고…."

박유신 씨와의 인터뷰는 자주 끊겼다. 우리는 한 마디씩 뱉고 한숨을 쉬었다. 예진이 방 한쪽에 주저앉아 예진이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을 잇는 식이었다. "너무 아깝죠." 목소리가 떨렸다. '슈퍼스타'를 꿈꾸던 정예진. 그 꿈의 크기만큼 엄마의 가슴에는 큰 구멍이 생겼다.

참사 당일 아침 예진이와 주고받았던 문자메시지도 액자에 끼워 놨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2017년은 세월호가 인양되고 육지까지 올라온 역사적인 해였지만, 참사의 원인 규명은 진전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가 왜 그날 아침 출항했으며, 왜 급변침으로 침몰했고, 왜 초기 구조가 이뤄지지 않았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과적'이 중요 원인으로 꼽혔지만, 최근에는 세월호가 평상시에 비해 과적한 게 아니라는 보도도 나왔다.

다행인 점은 12월 12일 '사회적참사의진상규명및안전사회건설등을위한특별법'(사회적참사특별법)이 제정된 것이다. 이 법은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기 위한 법이다. 다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15일에는 '4·16 정신을 계승한 도시 비전 수립 및 실천에 관한 기본 조례안'(416조례안)이 안산시의회에서 통과됐다. 더불어민주당 시의원 10명이 찬성표를 던지고 자유한국당 시의원 9명이 반대표를 던져, 10:9로 가까스로 통과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안산시민이 극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이렇게 해 보고 안 되면 또 투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니까. 맨날 쫓겨나기만 하고 뭐가 통과돼도 이렇게 가까스로 되니까. 그나마 이제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전진하는 것 같아요."

"너무 아깝죠." 엄마는 사진을 보다가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안산시민의 반대는 더 가슴이 쓰리다. 416조례안을 반대하던 이들은 416안전공원을 반대한 그 사람들이었다. 안산에 추모공원 형식으로 계획했던 416안전공원을, 이들은 '납골당'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반대했다. 토론회에 난입해 고성을 지르고 진행을 막았다. 이런 여론에 안산시는 한 발을 뺀 상태다. 416안전공원 건립은 현재 국무조정실에 계류되어 있다.

예진 엄마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한곳에, 가까운 곳에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다. 현재 단원고 희생자들은 평택, 화성 등에 흩어져 있다.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다. 당시에는 안산에 마땅한 곳도 없었고, 어떻게든 안치를 해야 했기 때문에 먼 곳이라도 간 것이다. 4·16안전공원 건립이 결정되어도 공사까지는 또 한참 걸릴 텐데, 장소조차 못 정하고 있는 지금 상황이 답답하다.

"밖에서 모진 소리 하는 것도 아픈데, 안산시민이 그러면 정말 아프죠. 미워도 내 식구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애증이죠. 반대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늘 그래요. '나도 그날 뉴스를 보면서 너무 가슴 아팠다. 우리 아이도 그 아이의 친구가 있다. 항상 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그래도 납골당이지 않느냐' 이래요.

잘 모르면서 그러니까 더 답답해요. 납골당도 아닐 뿐더러, 그게 단지 우리만을 위한 게 아니잖아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건데. 어떤 사람은 '정말 미안하다'고, '당신 자식 그렇게 보냈으면서 우리 새끼 지키려고 해 주는 게 너무 미안하고 고맙다'고 하는데. 그러지는 못하더라도… 어떻게 이래요.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세상이 확 바뀔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3주기 때 문재인 대통령이 안전공원은 확실하게 한다고 약속했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무슨 매를 맞더라도 할 줄 알았어요. 근데 약간 주춤한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니까, 불안하죠. 정말 불안하죠. 그래도 희망은 놓지 않아요. 가족들이 합창도 하고 연극도 하면서 계속 알리러 다니니까요."

세월호 가족들과 시민단체는 현재 4·16재단을 만들기 위해 '기억위원'을 모집하고 있다. 4·16재단은 4·16세월호참사피해구제및지원등을위한특별법을 근거로, 피해자 지원과 희생자 추모,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한 각종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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