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한국교회, 죄책 고백의 문을 열다

2017년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해였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시작을 알리며 떠들썩하게 시작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물론 이 떠들썩함이 개신교 내부에서만 일어난 축제라는 점은 깊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한국교회에 2017년이 충분히 의미 있을 법한 기회인 것은 사실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앞다투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개최했다.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에 관한 책자도 발간하고 각종 포럼도 열고, 음악회도 열고, 부흥회 비슷한 집회도 열었다. 또한 2017년엔 개신교계가 아닌 일반 사회와 언론에서도 종교개혁의 가치에 주목하는 흐름을 충분히 보였다. 마르틴 루터에 대한 조명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지상파방송에 방영되고 종교개혁을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분석하는 각종 학술 대회가 개최된 것도 사회적 관심의 반영이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안팎의 흐름을 통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놀랍게도 한국교회는 과신과 성취의 결과로 종교개혁을 이해하기보단 반성과 회심의 표상으로 인식하고 고백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어쩌면 자명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종교개혁의 본질 가치는 한국교회가 이제 피할 곳 없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음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고발의 직능으로 자리매김했다. 교회가 반성과 회심을 촉구한 이유 역시, 그 다양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총론의 열림은 확인되는데, 곧 교회에서 더 이상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2017년을 마무리하는 연말,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총체적인 죄책 고백을 할 때에 이르렀다. 이 죄책 고백은 위험하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더 깊은 자중지란에 빠져들지, 아님 진정으로 새로운 광야로 나아갈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 고백하고 진단하고 그리고 외쳐야 한다. 우리의 삶은 2017년을 끝으로 멈추지 않는다. 주님이 당신의 다시 오심을 2,000년 가까이 늦추셨듯, 오늘의 우리 역시 현실의 비루함을 꾸역꾸역 견뎌 내야만 하는, 바람에 눕는 풀과 같은 민초이기 때문이다.

성범죄의 일상화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고 말하겠지만 교회 안의 성폭력, 성폭행 문제는 2017년에 이르러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진단은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대부분 이들의 중론이기도 하다. 전병욱 홍대새교회 목사의 성범죄 사태 논의를 시작으로, 교계의 많은 이가 터질 게 터졌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입에 담기도 불쾌한 별의별 성적 추문과 스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교회 성폭력의 문제는 성직자와 신자 간 벌어지는 위계에 의한 사건이란 점이 일반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와는 또 다른 특징이다.

일반 사회에서 통념화한 성폭력은 남성 위주의 폭력적 사고방식, 미성숙한 젠더 감수성, 음란 폭력 영상물의 범람으로 인한 가능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요소가 교회 성폭력 안으로 스며든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일진대, 거기에 부가된 교회 성폭력은 종교란 미지의 신성성을 담보로 위계에 의한 범죄 합리화를 도모하는 성폭력 범죄유형의 끝판 왕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악의 진화로밖에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다. 목사와 신자의 관계에서 목사는 윤리와 양심, 영혼의 심판자 내지는 조력자임을 신자들에게 과시하며 그들의 정신을 현혹한다. 그런 식으로 취약해진 신자의 심리를 볼모로 육체의 욕망과 동시에 이건 범죄가 아니라 양을 돌보는 목자의 희생적 행위란 흉측한 종교 이론으로 분탕질하는 데 익숙해진 것, 이게 바로 교회 성폭력만이 가진 성범죄의 막장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2017년, 문대식 목사 사건으로 불거진 청소년 사역자들의 성범죄가 보여 준 범죄행위의 엽기성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반 사회에서 벌어질 법한 성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종교의 보호를 받으려 했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밖으로는 순결을 강조하면서 안으로는 그 순결을 빌미로 자신의 비틀린 성적 욕망을 충족하려는 재앙적 범죄가 교회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러한 성범죄를 용인하게 한 배후엔 교회가 가르쳐 온 남녀 간의 뿌리 깊은 위계질서 강조, 남성이 주체이며 여성은 그 주체의 시혜를 받은 대상이란 왜곡된 성서 이해가 있음을 역시 간과해선 안 된다.

이러한 왜곡된 성서 이해와 적용이 범람하는 근원적 지점은 어디일까. 개신교계가 목사가 중심이 된 구조라면, 그 근원적 지점은 목사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와 목사들이 모여 교단을 이루고 그들만의 세력화가 이뤄진 총회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2017년 한 해에 각종 신학대학과 교단 총회가 보여 준 모습은 교회가 이제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는 자기 증명이었다.

2017년 주요 장로교단 총회에서 결의한 요가·마술 금지, 동성애자 추방 등의 결의는 논란거리였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막장으로 내달리는 주요 교단 총회, 그리고 신학대학

한국교회에서 나름 영적 일가를 이룬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한 신학의 요람인 한국의 메이저 신학대학교들이 2017년 보여 준 일군의 작태는 단순한 서글픔을 넘어선다. 문제의 발발 횟수나 문제를 야기한 사태의 영향력 측면에서 보면 신학의 마지막 보루인 신학대학이 최소한의 순기능도 찾아보기 힘든 집단 마비에 빠져들었음을 외면하기 어렵다.

2017년 6월 22일, 전국의 신학생들이 모인 신학생시국연석회의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거리 행진을 벌였다. 그때, 신학생들이 본 문제 인식을 열거해 보면 그 참담함에 얼굴 들기 부끄러울 지경이다. 학교 적폐의 원흉인 이사장의 화려한 복귀, 학생들이나 교수들의 합리적 의견 개진에도 무조건 눈 막고 입을 다문 총장 선출 강행, 교회 세습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오히려 너희들 눈의 들보나 빼라고 윽박지르는 교단의 홍위병이 된 신학대학의 문제 앞에서 학생들은 분노하고 외쳤다. 자신들이 한국에서 신학을 한다는 걸 더 이상 부끄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는 일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 한 해를 돌이켜 보면 신학대학들이 보여 준 뿌리 깊은 적폐는 어느 것 하나 해소된 것이 없다. 봉합은커녕 더 아프고 회복 불가능한 상흔을 학생들과 한국 교인들에게 입히면서도 무조건 가고 보자는 막가파식 구태를 선보였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막가파식 구태를 각 교단의 총회에서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교회 안에서 요가나 마술을 금지한다는 식의 촌극을 닮은 금령을 남발하고 동성애와 이슬람을 지금 당장 때려잡지 못하면 교회가 망할 것처럼 선동하는 모습은 종교 근본주의에 사로잡힌 주술의 정치판을 보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걸까. 2,000년 전 예수님이 어떤 인간 이해를 갖고 사회, 공동체, 그리고 개인을 바라봤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님, 죄다 인본주의로 몰아붙이고 눈을 감아 버린 걸까.

아마도 이들은 자발적인 눈먼 자의 길을 선택하고 이대로 막가다 보면 다 죽든지, 아님 하나님이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대단한 믿음의 반열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폭주의 결과물로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죄악의 삼위일체, 그 완성을 이루고 말았다. 명성교회의 세습 선포가 그것이다.

종교개혁과 세습

2017년 12월 1일 자 <뉴스앤조이> 최승현 기자가 정리한 '명성교회 세습 일지 인터랙티브'에 의하면, 김삼환 목사 부자의 세습 한다 안 한다는 식의 유아적인 롤러코스터 발언들이 물타기용으로 남발되더니 결국 2017년 9월 26일, 김삼환 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의 청빙안을 노회에 제출되었다. 이후, 날치기 통과란 외부의 지적 따윈 아랑곳 않고 10월 24일, 노회에서는 청빙안을 통과시켰고, 11월 12일 주일예배에서 공식적인 세습 절차를 완료했다.

우연의 일치일지, 아님 고도의 정치적 전략인지는 몰라도 명성교회의 세습 강행 촌극이 이뤄진 일련의 극적 시기인 9월과 11월, 특히 청빙안이 통과된 10월 24일은 종교개혁 주간이며, 그 주간의 마지막 주일이 종교개혁 주일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와 열망에 마침표를 찍는 한국교회의 대표 퍼포먼스가 세습이라니. 이는 아이러니를 넘어서서 한국교회 죄책 고백의 역설, 그 자체라 아니할 수 없다.

명성교회는 11월 12일 부자(父子) 세습을 완료했다. 김삼환 목사가 아들 김하나 목사에게 안수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차라리 명성교회 세습을 한 개교회의 해프닝으로 취급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십몇 년 전부터 본격화된 대형교회의 세습 관행에 대한 자성, 이러면 정말 안 된다는 식의 수많은 교계 관계자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돌이킴도 없이 강철을 두른 것처럼 몰아붙이는 광기 어린 질주가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싶을 지경이다. 이는 결국 한국교회 전체가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 온 성장과 축복, 문자 무오주의로부터 비롯된 근본주의, 미국적 자본주의와 청교도 정신의 기괴한 결탁, 믿음과 행위의 이분법적 분리, 유교적 가부장제과 천민자본주의로부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 성서 해석, 여전히 독재의 망령을 직간접적으로 찬양하는 이념의 희생양들이 지배하는 바벨탑이었음을 부정해선 안 된다.

죄책 고백의 정점에서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의 바벨탑이 붕괴되고 있음을, 아니, 이미 그 바닥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음이 여실히 목격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고백이 아니다. 신음이다. 길을 잃어버린, 한 줌의 희망도 잃어버린 난민이 되어 버린 한국교회, 모든 그리스도인의 울먹임이다.

이 울먹임의 실체에 눈을 뜰 때, 우리 앞에 보이는 한국교회는 다 타 버리고 전소된 후 남은 폐허뿐이다. 이 잿더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쌓아 올린 재앙의 바벨, 그 붕괴의 비극을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죄책 고백이 신음과 탄식으로 화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신의 부르심을 기다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인가. 조심스럽게 답은 후자에 있다고 말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스스로 답을 찾는 광야로 나아가자

신의 부르심을 향한 우리의 반응은 결국 신을 향한 우리의 외침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육화한 하나님의 공의와 생명을 향한 외침은 우리가 쌓아 올린 바벨탑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자세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 2017년 한국교회는 서글픈 비극으로 점철되었음을 철저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극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재앙의 망령처럼 괴롭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재앙의 지속은 우리에게 새로운 교회를 꿈꿀 수 있는 자생적 의지를 심어 주는 마지막 실마리를 제공한다. 2,000년 전의 예수님 역시 모든 것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 다시 세우는 교회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사도 바울 역시 모든 기득권이 허물어지고 새로 시작하는 광야의 교회를 외치지 않았던가.

2018년 한국교회는 비극과 재앙에 기댄 힘센 하나님, 전능한 하나님의 주술에 취한 교회가 아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교회가 되길 기도한다. 수없이 엉킨 실타래를 한 가닥 한 가닥씩 풀어 나가는 깨어 있는 교회로의 일대 전환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답이 보이지 않아도, 아니, 답이 없더라도 답을 만들어 나가려는 태도, 그 정신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하는 2017년의 마지막 하루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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