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두 지평>(박영사). 제목이 참 좋다. 철학에 낯선 독자라도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을 안다면 상당한 호감이 생길 것이다. 2차 자료에 의거해 두 사람을 희미하게 더듬는 필자와 같은 독자에게도 이 책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몰트만의 경우는 몇 권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파악이 되지만, 에른스트 블로흐는 굉장히 낯선 존재다. 수년 전에 블로흐의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열린책들)을 읽다가 중간쯤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굳이 읽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데다 익숙하지 않은 블로흐를 따라가기에는 사유의 폭이 넓지 않았다.

이 책은 가장 먼저 블로흐와 몰트만의 전체적인 사상의 개요(槪要)를 서술한다. 블로흐가 가진 사유의 방식과 몰트만의 신학 특징들을 짚어 준다. 필자는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간략하게 전체 흐름을 요약하고, 책을 논평하려고 한다.

<희망의 두 지평 - 에른스트 블로흐와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 사상> / 이종인 지음 / 박영사 펴냄 / 332쪽 / 1만 8,000원

먼저 이 책은 박사 학위논문이다. 2016년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 신학 박사 학위 청구 논문이다. 필자는 논문을 읽지 않은 탓에 이 책과 비교할 수 없으나 전체 흐름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수정한 곳은 없어 보인다. 현재 그는 울산 지역 독서 모임인 '망원경'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울산대학교에서 김진 교수 지도 아래 철학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신학을 넘어 철학까지 정복하려는 저자의 열정이 느껴진다.

이 책 주제는 '희망'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과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을 비교, 분석하며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비평한 것이다. 서론을 빼면 모두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2장에서는 블로흐의 희망 철학을 살핀다. 3장에서는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 신학을 다룬다. 4~5장은 블로흐와 몰트만을 비교하면서 주고받은 영향과 한계를 지적한다. 7~8장은 결론에 해당되며 두 학자를 비교하며 제언한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낯설어 블로흐에 관련된 대목들은 유의하여 읽었다. 2장에서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이 무엇인지 말한다. 세 가지 주제를 끌어온다. 하나는 페르시아 이원론이다. 이곳에서는 '전복적 성경 해석'이라 할만하다. 기존의 성경의 해석이 아닌 반의적으로 성경을 본다. 두 번째는 물질 철학이다. 물질 철학이란 말이 어색하다. 유물론(唯物論)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적 유토피아를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페르시아 이원론은 마니교적 사상이다. 마니교는 "선신과 악신의 투쟁을 핵심으로 하는 신앙"(35쪽)이다. 어거스틴이 젊었을 때 방황의 여정 속에서 찾은 곳이 마니교다. 엄밀하게 마니교는 '이 세상에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들은 쉽게 말한다. 태초에 선과 악이 있었다. '그 둘은 지금도 싸운다'이다. 삶은 투쟁인 것이다. 블로흐가 이러한 마니교적 이원론에서 어떻게 희망을 추출해 내는지 사뭇 궁금하다. 놀랍게도 블로흐는 창조의 하나님을 '악한 하나님'으로 상정하고, 그의 통치 아래에서 탈출하여 자유자가 되는 것으로 희망을 삼았다. 그곳은 곧 '무신론'이다.

"즉,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가 신이 되는 가장 대표적인 전형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파악했다." (35쪽)

블로흐는 이러한 전제를 성경 해석에 도입하고,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해 들어간다. 심지어 낙원의 뱀조차 "구약의 하나님에 대항하는 예수의 모습"(37쪽)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성경 해석관은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며, 마르시온 같은 이단들이 견지한 해석관이다.

그런데 블로흐가 추구한 세상은 영지주의와 같은 관념이 아닌 '물질'이다. 그는 플라톤의 관념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를 실체로 본다. 알다시피 이러한 사상은 헤겔의 철학을 이어받은 포이에르바하라는 헤겔 좌파 학자들에게 넘어가고, 다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양식이 된다. 그러니 마지막 주제인 '마르크스적 유토피아'의 출현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블로흐는 희망이 "배고픔과 갈망에서 비롯된다"(52쪽)고 본다. 그 굶주림은 지적이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실체적이며 실존적인 진짜 배고픔이다. 블로흐의 결론은 무신론이다.

"불르흐는 악하고 부도덕한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출을 통해서 도덕 실천의 세상이 열린다고 본다. 그러므로 무신론이야말로 참된 종교라는 결론에 이른다." (55쪽)

이제 3장, 몰트만의 희망 신학으로 가 보자. 몰트만 역시 세 가지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삼위일체론'이며, 다른 하나는 '종말론', 마지막은 '기독교적 하나님의 나라'이다. 삼위일체론은 몰트만에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그동안 신론에 치우친 삼위일체를 수평적 의미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 대표적인 저술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대한기독교서회)이다.

삼위일체론 핵심 주제는 '사귐'이다. 서방 신학이 성부 하나님께 치중되었다면 동방 신학은 동등한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논한다. 몰트만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을 통해 "내재적 연대와 세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사건"(69쪽)으로 풀어 간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아들을 내어 준 "아버지의 고통"(74쪽)으로 보면서 몰트만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일본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새물결플러스)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약간 아쉬웠다. 그 부분은 니콜라스 월터스토퍼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좋은씨앗)만을 언급하기에는 너무 중요한 대목이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매우 중요하다. 블로흐가 말했던 무신론적 종말론과 몰트만의 종말론은 배타적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현실을 부수는 종말론적 사건"(82쪽)이라고 바르게 지적한다.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진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항상 십자가에 달렸던 바로 그 그리스도다."(83쪽) 부활이 가져온 종말론적 희망은 현재의 시공 안에서 십자가를 지게 한다. 십자가는 저항이며 투쟁이다. 부활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와 존재의 철저한 두 가지의 모순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87쪽)되는 것을 본다.

마지막 주제였던 '기독교적 하나님나라'는 모호하게 읽힌다. 현재 삶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즉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듯하다. 극단적 예시를 보면 두 가지다.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년왕국은 이 땅에 도래하는가. 아니면 죽어서 가는 천국에 있는가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땅에 온다고 믿는다.

마르크스 역시 이 땅에 천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칼뱅은 이 땅은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 여행의 노정"(99쪽)으로 본다. 대립하는 주장의 종결은 아무래도 오스카 쿨만에서 찾아야 한다. 쿨만은 철저한 종말론과 실존적 종말론을 중재하여 "이미와 아직"(102쪽)으로 설명한다. 즉 종말은 시작되었고, 현재 속에 종말은 현존하고 있다.

나머지는 건너뛰고 저자의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7장 '평가와 제언'은 저자의 평가에 해당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비교한 다음, 차이점을 분석한다. 필자가 보기에 두 사람의 극명한 차이는 두 번째로 제시한 "무신론적 접근과 유신론적 접근"(257쪽)으로 본다. 블로흐가 말한 희망은 '아직-아님의 존재론' 속에서 미래가 개방되어 있고, 그래서 희망한다고 본다. 그의 희망은 과제다. 그러나 그것은 불투명하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 몰트만의 희망은 이미 선취된 사건이다. 이것은 다시 세 번째 차이로 나아간다. 블로흐는 아직 인간에게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본다. 이것은 마르크스 사상과 맞닿아 있다. 남아 있다는 표현보다는 남아 있어야 하고, 인간만이 희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몰트만은 인간의 가능성은 십자가에서 끝났다고 본다. 인간의 끝, 바로 그 지점에서 '오시는 하나님'이 시작된다.

"블로흐와 몰트만의 근본적인 차이는 십자가에 있다. 블로흐도 굶주림을 말하고 처절한 악의 상태를 직시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절벽이다. 가능성이 전무한 곳이며, 처절한 절망이다. 기독교의 희망은 가능성이 아니다." (259쪽)

그럼 무엇이 희망일까. 바로 부활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변곡점이다. 십자가는 "희망이 죽은 곳"(260쪽)이다. 부활은 "절망을 부수"는 것이다. 부활로 확증된 언약은 그리스도인들을 종말에 참여시키고, 희망으로 살아간다. 저자는 종말론적 삶을 부연하면서 교회가 "종말론적 희망 윤리"(270쪽)를 회복해야 한다고 단언(斷言)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교회가 게토화되지 말아야 하며, 이웃과 연대하여 "화목과 평화를 위해 섬기는 공동체"(282쪽)로 서야 한다는 주장에 크게 공감하며 동의한다.

정리해 보자. 이 책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완벽한 논문이다. 문제 제기와 본론, 그리고 결론과 적용까지 완벽한 흐름을 유지한다. 무신론적 블로흐의 희망을 비판하고 유신론적 몰트만의 희망을 교회가 지녀야 할 희망으로 제시한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할 교리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십자가와 부활에서 일구어 낸 희망의 신학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미래의 희망이 아닌 "현실을 바꾸고, 선취하여 누리게 하는 위로"(19쪽)로서 희망을 말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곧바로 "복음이 곧 희망이다"(19쪽)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희망의 담론으로서의 논의는 충분한 것 같은데, 희망으로서의 복음은 결론은 너무 급하게 마무리된 듯하다. 논리 흐름상 굳이 필요해 보이지 않지만 서문에서 언급한 이상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앞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블로흐와 몰트만의 개요이자 종합이다. 마지막에 블로흐와 몰트만은 어거스틴의 <신국론>(동서문화사)에서 보았던 대치하는 '두 왕국'을 보는 듯하다. 난해한 두 학자를 쉽게 잘 풀어낸 수작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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