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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들려주기 전에 먼저 보여 주어야 한다

[서평] 오지훈 <희생되는 진리>(홍성사)

이원석   기사승인 2017.12.20  11: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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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 출판 시장에서 기독교 변증은 인기 있는 상품이 아니다. 더욱이 국내 저자가 집필한 기독교 변증서는 그나마 얼마 되지 않고 거의가 허술하다(실은 외서의 경우도 대체로 부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르네 지라르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교차하는 <희생되는 진리>(홍성사)는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심지어 저자의 첫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저자 오지훈은 기독인이고, 복음주의자이며, 또한 소위 '평신도'이다. 그가 서른일곱에 퇴사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힌 결실이 바로 <희생되는 진리>이다. 첫 저작답지 않게, 혹은 외려 첫 저작이기에 저자의 야심은 거대하다. 그의 야심을 성실한 독서가 지탱하고 있다. 그의 지적이고 신앙적인 열정이 책의 갈피갈피에 새겨져 있다. 쪽마다 그의 땀방울이 느껴진다.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 진리 재발견하기

그러한 노력을 떠받치는 저자의 야심을 <희생되는 진리>의 부제가 잘 보여 준다: '르네 지라르와 무라카미 하루키, 기독교를 옹호하다'. 기독교인이고 의식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는 작업에 기여하는 프랑스 사상가 르네 지라르를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독특하다. 이는 그의 소통 전략과 궤를 같이한다.

"책을 쓰면서 일관되게 유지한 것은 성경의 권위와 신앙 또는 신학에 기대지 않는 것이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과 대화하려면 소통 가능한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 진리 재발견하기'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11쪽)

이렇게 교회 바깥의 교양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에 주목하기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호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희생되는 진리>의 초점은 지라르에 있다(121~122, 423~424쪽에 담겨 있는 그의 지라르 간증을 보라). 여러 군데에서 하루키를 언급하나, 정작 그에게 천착하는 부분은 '지라르의 관점으로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그리고 기독교'(206~251쪽)에 한정된다.

하지만 <희생되는 진리>를 읽다 보면, 하루키와 그의 저작들, 특히 <1Q84>(문학동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잘 드러난다. 특별히 <1Q84>의 기독교적 함의를 풀어내고자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그만큼 흥미롭고 생각할 여지를 주는 글이다). 그렇기에 부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을 내면서'와 '맺음말'에서 (지라르와 더불어) 하루키를 부러 자세하게 거론하는 것이리라.

<희생되는 진리 - 르네 지라르와 무라카미 하루키, 기독교를 옹호하다> / 오지훈 지음 / 홍성사 펴냄 / 444쪽 / 1만 5,000원

진리를 희생시키는 엇나간 근심

한데 이런 (지라르나 하루키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많은 것을 담아내려 하는) 저자의 열정이 <희생되는 진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다.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의 목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부는 "자연과학 중심의 단순화된 논리 구조와 그로부터 희생된 진리의 문제를 다룬다."(10쪽) 2부와 3부는 "엇나간 '희생양 근심'에 희생되는 진리의 문제를"(11쪽) 다룬다.

지라르와 하루키에 기초하는 2~3부와 달리 1부는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에 집중한다(부제를 비껴간다). 2부에서는 지라르의 이론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작가 하루키의 소설 <1Q84>와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2016)을 분석한다. 3부에서는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한국교회의 문제점"(10쪽)에 적용한다. 3부를 통해 말하고자는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보수 개신교'를 향한 강력한 반대 프레임이 형성될 때의 희생양은 '보수 개신교' 그 자체가 아니다. (중략) 그렇다면 이 반기독교 내러티브가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복음의 진리다." (283쪽)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니체의 <반그리스도>가 보여 주듯이 반대의 측면 또한 있기 때문이다(야스퍼스가 이에 대해 지적하듯이 "기독교에 대한 그[니체]의 문제의식이 결코 단순하지 않(중략)다", 184쪽), 하지만 이는 2부에서 인용한 지라르의 발언에 비추어 봐도 우리가 곱씹어 볼 만한 측면이 있다.

"희생양 근심의 승리로 오늘날 이득을 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전체주의’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이다. (중략) 가장 강력한 기독교 반대 운동은 희생양 근심을 자신의 것으로 떠안고 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감'으로써 이를 타 종교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운동이다." (195쪽)

기독교의 진리가 세속 담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제멋대로 전유되고 있는 실정을 지라르는 꼬집고 있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세속 사상은 기독교 사상의 진리적 측면을 존중하는 것이다. 가령 알랭 바디우가 복음의 보편성을 자신의 이론에 차용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기독교 진리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한다. 단지 현실 기독교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문제는 교회 자신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1Q84>의 주인공 아오마메가 말한 대로 "신과 자신 사이에 끼여 있는 사람들과 시스템"(<희생되는 진리>의 240쪽에서 재인용)인 셈이다. 결국 <희생되는 진리>의 내용(특히 3부)은 외부 소통보다 내부 자성에 일차적으로 더 필요하다. 저자도 그런 의도로 3부(복음주의와 진보의 접점을 찾아서)를 썼으리라 본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예배가 바뀌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더욱 공부해야 하고 종교적인 언어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그룹 나눔은 탈정치적 개인 영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말씀 묵상의 적용은 구체적이고 전 방위적이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복음화 이후의 복음주의는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나라의 추구를 통해 시민사회가 지향할 방향과 상상력을 기독교가 앞서가며 제시해야 한다." (420쪽)

이렇게 본다면, <희생되는 진리>의 주된 독자 대상은 기독교인일 수밖에 없다. 물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때 어떤 접점을 찾아 공감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11쪽)기를 바란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런 접근을 잘 보여 준다. "무신론자들이여. 러셀의 논리적 기반은 이미 비트겐슈타인과 괴델에 의해 무너졌다."(46쪽)

하지만 비기독교인이 직면하는 주요 난점은 논리가 아니라 교회다. 진리를 희생하는 주체는 바로 한국교회 자신이 아닌가. 신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끼여 있는 시스템으로서의 교회가 장애물로 작용하는 현실은 일본보다 한국이 더하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고 협박하는 곳에서 진리를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오죽하면 개독교라는 애칭으로 불리겠는가.

먼저 필요한 것은 삶을 통한 변증이다

그러므로 <희생되는 진리>는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읽을 변증서라기보다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한국 사회 속에서 비기독교인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와 논리를 습득하기 위한 흥미진진한 참고서로 사용되어야 맞을 게다. 하지만 이 또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은 먼저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삶으로 보여 줄 때에만, 우리가 전하는 진리에 귀를 열게 된다.

베드로가 아내들의 순종을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다.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1-2) 이 원리는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된다. 그렇게 행실을 바로 세울 때에야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벧전 3:15)이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삶으로서의 전도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교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역시 교회의 개혁이 요청된다. 저자 또한 개인적 차원과 교회적 차원을 아우르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과 가라타니 고진으로부터 영감을 얻어(기독교 바깥의 언어와 논리로 도출해 냈다는 뜻이다)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기독교인이 도덕적·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 것을 강조하는 것만큼, 집단으로서 총체적인 공동체로서의 기독교와 교회가 사회적 장에서 도덕적·윤리적으로 우선 존경받아야 한다. (중략) 그렇게 함으로써 존경받는 기독교, 존경받는 교회가 된다면 복음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81쪽)

이렇게 저자도 잘 파악한 것처럼, 진리가 존중되기 위해서는 (성도 개개인들의 결단과 더불어) 교회가 바로 회복되어야 한다. 진리 희생의 우선적 책임이 세속 사조가 아니라 교회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고려하여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제한적으로 <희생되는 진리>를 활용할 것을 권한다. 삶으로 설득될 때에야 이 책이 제공하는 논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움을 지적하는 것으로 본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 책에 많은 것을 담아내고자 하는 저자의 열정을 이해하지만, (독자적인 매력을 갖춘 1부는 확충하여 별개의 책으로 출간하고) 지라르를 중심으로 이론편(2부)과 적용편(3부)으로 재구성하였더라면 더 튼실한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희생되는 진리>는 이에 대한 아쉬움 이상으로 재밌고 유익한 책이며, 또한 저자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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