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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구조는 박근혜 정부 '쇼'였다"

[인터뷰] 민간 잠수사 김명기 전도사 "불의 앞에서 기도만 하는 건 도움 안 돼"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7.12.15  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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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3년 전 팽목항에서 민간 잠수사로 활동한 김명기 전도사는 진상을 밝혀야 사회적 고통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세월호 참사는 사회적 고통을 낳았다. 배 침몰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본 국민은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정부와 정부 말만 받아쓰는 언론은 한국 사회 적폐를 그대로 드러냈다. 세월호 가족은 물론 많은 사람이 지금도 그날의 충격과 아픔을 안고 살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수색 작업에 뛰어든 김명기 전도사(샬롬감리교회)도 충격을 지울 수 없었다. 김 전도사는 세월호 참사를 당시 박근혜 정부가 연출한 '쇼'라고 믿는다. 민간 잠수사들의 구조 작업을 조직적으로 방해했고, 세월호 가족을 이용해 이간질한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겪은 김 전도사는 "하루라도 빨리 세월호의 진상이 드러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제2·제3의 참사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명기 전도사는 참사 당시 민간 잠수사 자격으로 현장에서 구조 작업을 했다. 이후 해경과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알리기 위해 언론 인터뷰도 자주 했다. 신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대전의 한 교회에서 전도사로 찬양 인도를 맡고 있다. 김명기 전도사를 12월 14일 만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민간 잠수사 모집 광고 보고 자원
정부, 현장 투입 않고 방치

김명기 전도사는 UDT 출신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민간 잠수사에 자원했다. 해경의 비협조로 수색 작업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2014년 4월 16일 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이 장면은 TV로 생중계됐다.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사실을 인지한 뒤, 김명기 전도사는 죽을 듯이 눈물을 쏟았다. 17일, 해수부가 민간 잠수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다. UDT(해군특수전전단) 출신인 그는 주저하지 않고 지원했다. 잠수와 수색은 자신 있었다. 전역 이후에도 꾸준히 잠수를 즐겨 왔기 때문이다.

18일 새벽, 팽목항에 도착했다. 현장은 김 전도사 생각과 딴판이었다. 일사불란하지 않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100명에 이르는 민간 잠수사가 개인 장비를 챙겨 왔는데도,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날 언론은 "잠수부 500명이 투입됐다"고 보도했다. 김 전도사는 '정부가 쇼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던 대통령 말과 달리, 해수부와 해경은 소극적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민간 잠수사들을 활용하지 않았다. 김 전도사는 "배제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시신이 계속 발견되자, 민간 잠수사들은 해경 상황실로 직접 찾아가 현장 투입을 요청했다. 해경은 별 반응이 없었다. 한참 지난 뒤에야 해경은 민간 잠수사 70~80명을 현장에 데리고 나갔다. 조류가 가장 강하던 시기였다. 수색은커녕 물속에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물에 한 번 풍덩 빠져서 들어갔다가 나오면 20~30미터 떠내려간다. 당시 물속 조류는 2노트가 넘었다. 이걸 가지고 언론들이 물어뜯더라. '실력 없는 잠수사', '검증 안 된 잠수사', '수색 0명' 이런 식으로. 오히려 우리가 해경 작업을 방해한다고 하더라. 도우려고 왔는데 역적으로 취급받으니 기분이 참… 그래도 세상에 자식 잃은 부모보다 아픈 사람은 없으니, 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다."

김 전도사가 기억하는 팽목항은 '지옥'이었다. 시신이 올라올 때마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고 7일째 되던 4월 23일은 생생하다. 시신이 올라왔는데, 부패한 흔적 없이 상태가 상당히 온전했다. 숨을 거둔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 전도사는 "해경이 처음에는 가족들에게조차 시신을 보여 주지 않았다. 논란이 될까 봐 그런 것 같다. 배 안에서 힘겹게 버틴 친구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UDT동지회까지 나서 민간 잠수사의 현장 투입을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간 잠수사들은 하나둘 철수했다. 언론의 횡포, 해경의 냉대를 견디지 못했다. 김 전도사도 팽목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팽목항에서 알게 된 이종인 대표(알파잠수기술공사)가 '다이빙벨'을 이용해 선체를 수색하기로 했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 김 전도사는 "더 이상 상처받는 게 두렵다"며 거절했다.

김 전도사는 대전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동안 언론은 다이빙벨을 앞다퉈 보도했다. 설치 작업 실패로 구조 시간을 허비했고, 다이빙벨은 해역 조건과 맞지 않아 비효율적이라는 부정적인 내용 위주 기사가 쏟아졌다.

김명기 전도사는 다이빙벨을 이용한 수색 작업에도 참여했다. JTBC 갈무리

몸은 대전에 있었지만, 김명기 전도사의 관심은 여전히 팽목항을 향해 있었다. 하던 사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침 자주 찾던 식당 주인의 권유로 그는 다시 팽목항을 찾기로 결심했다. 식당 주인은 여비로 쓰라며 25만 원을 쥐어 줬다.

이종인 대표에게 다이빙벨에 합류하겠다고 연락한 다음 택시를 타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다이빙벨 3차 출항 시간에 맞춰 팽목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다이빙벨은 3차 시도 만에 현장에 투입됐다. 김 전도사와 이종인 대표를 포함한 3명은 수심 25미터까지 내려갔다. 다이빙벨 무게가 5톤에 달하다 보니 조류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내부 여건은 좋았는데, 정작 선체에는 진입할 수 없었다. 3층 입구에 해경이 설치해 놓은 밧줄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입하기 위해 1시간 동안 밧줄들을 잘라냈다. 이 대표는 "몸에 무리가 올 수 있으니 그만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다이빙벨은 UDT 출신 김 전도사에게도 생소한 장비였다. 일반 산소 탱크로는 수심 30~40미터에서 15분 정도 수색 가능한데, 다이빙벨은 2시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김 전도사는 다음 타임에는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수면 위로 올라온 다이빙벨은 두 번 다시 투입되지 않았다. 이종인 대표는, 해경 경비정이 다이빙벨 바지선을 들이받고 다이빙벨로 이어지는 공기 라인이 날카롭게 찢어진 게 의심스럽다고 했다. 김 전도사에게 "이러다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명기 전도사는 팽목항에 20일을 머물렀다. 잠수와 수색을 위해 갔지만, 정작 잠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잠수를 못 하는 대신 언론 홍보에 적극 나섰다. 주요 매체의 '정부발 보도'에 맞서 대안 언론 등에 '팩트'를 전달했다. UDT동지회 부스에는 JTBC, 팩트TV 등이 상주했다.

참사 이후 '세상 것'에 취하지 않겠다 다짐
"세월호 문제 앞 한국교회 한목소리 필요,
돈·물질 아닌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김명기 전도사는 구조 활동을 하지 못해 답답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김명기 전도사는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한 이후로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끊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0년 가까이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가 그의 사고를 바꾸어 놓았다.

믿는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세상이 망가진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있거나 기도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김 전도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아픔을 함께해야 세상이 나아진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일부 목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는커녕 망언으로 한국교회 전체를 욕먹였다. 김 전도사는 '어떻게 저런 망언을 할 수 있나'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왜 이런 큰 아픔을 주었느냐고 하나님께 수차례 질문했다.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로 박근혜 정부의 무능함과 치부가 드러났다. 이걸 목격했다면, 믿는 자들은 기도에 그치지 않고 행동에 옮겼어야 했다. 세월호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진상 규명을 위한 운동에 동참했어야 했다. 당시 한국교회가 작심하고 한목소리를 냈다면, 지금보다 한걸음 도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가. '정치적'이라고 배제하고, 가족들에게 '그만 떼쓰라'고 조롱하지 않았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세월호 참사가 터지기 전까지 나도 세상 것에 취해 살았다. 신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사업을 하면서 큰돈도 만져 보고 망해 보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상의 불의 앞에 기도만 하지 않고 행동하기로. 그러면 세월호와 같은 아픔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본다. 2기 세월호특조위가 진상을 제대로 밝힐 수 있도록, 믿는 자들이 지원하고 응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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