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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 읽기

[서평] 최재호 <믿음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힐링북스)

크리스찬북뉴스   기사승인 2017.12.13  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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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역사를 읽는 일이고, 타자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타자의 삶을 공유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직접 사는 것과 글로 읽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은 타자의 것이기에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비근한 예로 친구를 생각해 봅시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친구는 타자입니다. 목소리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삶을 해석하는 것도 다릅니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라 할지라도 다른 점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물며 낯선 타자의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요.

이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책 읽기로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회이자 배움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차이'와 '동일'은 저자와 독자를 묶기도 하고 구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와 동일을 잘 이해하고 책을 읽는다면 훌륭한 독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또 한 권을 읽고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믿음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 최재호 지음 / 힐링북스 펴냄 / 232쪽 / 1만 5,000원

아내가 책장에서 한 권을 꺼내 보여 주면서 읽어 보라고 합니다. 책을 보니 낯선 책이지만 '세계관'이란 단어가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제목은 약간 자극적으로 잡았는데 '믿음은 세계관의 전쟁이다'입니다. 식상해 보이는 단어지만 제목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계관도 있지만 주어는 '믿음(Faith)'입니다. 표지에 적은 영어를 번역해 보면, '믿음은 이다 전쟁 세계관.'

영어는 한글과 어순이 다릅니다. 언어학자들은 한국어는 형용사가 발달했고, 히브리어는 동사가 발달했다고 합니다. 한국어가 중요한 것을 뒤에 배치한다면, 영어는 중요한 것을 앞에 배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나 영어를 번역할 때는 어순을 그대로 직역해 보고는 합니다. 그러면 한 문장으로 번역해 읽는 것과 다르게 묘한 느낌이 납니다.

Faith is the Battle of Worldviews.
'믿음은 이다 전쟁 세계관.'

책에서 제목은 중요합니다. 종종 저자의 뜻과 다르게 편집자가 제목을 바꾸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내용을 잘 이해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이 책은 표지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의 절반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책의 표지에 책을 파악할 수 있는 두 단락의 문장이 있습니다. 읽어 봅시다.

"청지기 영성 훈련은 업적이나 실적을 남기기 위한 훈련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숙한 사람으로 준비시키는 훈련이다."

영어 제목 아래 있는 문장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타락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경적인 가치관을 적용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의 체계를 설명한 영성 훈련서"

자, 어떤가요. 두 단락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저는 여기서 단어 몇 개에 주목합니다. '청지기', '영성 훈련', '준비', '타락', '가치관', '성경적인', '삶의 체계', '영성 훈련서'. 이 책은 한마디로 성경적 가치관을 확립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책입니다.

무엇으로 도울까요. 그것이 바로 책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제목에서 읽을 수 있듯이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은 세상을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다른 말로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바른 세계관, 바른 가치관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영성은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다스리려는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그것은 군림과 자기과시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입니다. 이제 그 이야기로 넘어가 봅시다. 도대체 세계관과 그리스도의 성품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1장은 서론에 해당하고 2~3장은 세계관의 전제와 발전 단계를 다룹니다. 4~5장은 성경 속에서 세계관을 찾아 탐색합니다. 6~7장은 적용과 실천, 또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합니다.

1장에서 저자는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생긴 일을 가져와 세계관을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서 바울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니, 그가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신으로 생각하며 그들을 경배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것을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듣는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세계관의 충돌"(26절)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충돌입니다. 세상을 해석하는 두 관점이 충돌한 것입니다.

동일한 사실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신화 속 신을 찾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신적이며, 초월자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세상을 인식하는 관점인 동시에 신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세계관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자는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이 노력으로 불가능한 일"(28쪽)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럼 어떻게 가능할까요. 인간의 간절함과 "성령이 역사하여야 가능한 것"(29쪽)입니다.

저자는 2장에서 철학적 사유 방식을 통해 세계관을 정의합니다. 철학을 하든 안 하든, 종교가 있든 없든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관은 일상을 해석하는 틀이고, 사유하는 방식이며, 삶의 담론을 규정하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은 사물을 보고, 듣고, 생각하는 틀이다." (35쪽)

2장 중반과 3장에서는 세계관의 형성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필자는 철학적 사유를 통한 세계관 해석이 좋았습니다. 근현대 철학자들의 사상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이면서 기독교변증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저자에게 현대철학은 중요했을 것입니다. 철학과 기독교 세계관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고민하여 읽어 내려갔습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으로 잘 알려진 철학자입니다. 그는 <판단력비판>을 통해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세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일상적인 단어로 사용"(42쪽)합니다. 이 단어는 다시 독일 관념론자인 쉘링에 의해 "지성적 인식을 의미하는 개념"(43쪽)으로 확장됩니다. 세계관 형성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헤겔일 것입니다. 헤겔의 철학은 역사적 변증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해석하고, 세계관을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절대정신의 자기 인식의 결과물"(44쪽) 보았습니다. 이어지는 키에르케고어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교차 사용하면서 삶을 해석하는 틀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실존주의의 문을 열었던 키에르케고어는 발전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세계관을 보도록 유도합니다. 딜타이와 니체까지 이어지는 철학적 탐색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세계관을 가진 존재이며, 그것이 도덕적이든 종교적이든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결론은 "거듭남은 세계관의 변화"(61쪽)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계관의 충돌은 영적 전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3장에서는 철학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의 체계화 과정을 다룹니다. 제임스 오어와 아브라함 카피어, 코넬리우스 반틸의 사유를 추적해 가며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세 학자 중에서 반틸을 주목해야 합니다. 반틸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대립했던 학자입니다. 반틸은 카이퍼의 세계관적 비전 원리를 변증학에 적용한 학자입니다. 반틸의 변증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전제(Presuppisition)'입니다. 전제는 일종의 가정이나 가설이지만,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의식 체계입니다.

"전제는 그 사람의 사상적 추론에 있어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며 거의 타협 불가능한 신념의 체계를 형성하며 쉽게 변화되지 않는 탄탄한 기초로 작용한다." (84쪽)

전제는 한 사람의 생각 틀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발언이나 행위를 할 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만의 고유한 '틀'이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반틸의 '전제'로 보며,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과 비교합니다. 전제와 패러다임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든지 다른 가설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장의 결론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 사상이나 행동은 자기모순이며,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관은 대립을 넘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세계관을 바꾸지 않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의 틀을 제공한 반틸은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해 줍니다.

4~5장은 성경 속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살펴봅니다. 저는 결론에 해당하는 6~7장에서 저자의 결론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176쪽)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원화, 다원주의, 다양성, 다문화, 탈권위, 탈규범 등 다양한 용어로 해석됩니다. 가장 핵심은 '권위의 부재'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신의 자리에 올렸던 근대와 다르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인간의 감성에 기초한 "주관적인 느낌에 기초한 세계관"(176쪽)을 소유합니다.

기실 개신교는 근대적이며, 근대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종교개혁을 종교가 아닌 상업에 기초한 사회변혁과 시민 정신의 발현으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며 모든 권위를 개인의 소유물로 퇴보시킵니다. 더 이상 절대 진리는 없습니다. 제이차대전 이후 급격한 힘을 발휘한 실존주의와 그 뒤를 이은 구조주의와 과정철학 등에서는 인격적 하나님이 사라지고, 오직 변화하는 사건만 남게 됩니다.

"존재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의미도 객관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시간 안에서 생성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190쪽)

실존주의는 존재를 무로 돌리고, 과정철학은 존재는 변하는 것으로 규정해 객관성을 무너뜨립니다. 철학의 변화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넘어 양자학으로 가는 과학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이미 존재하고 자연현상에 대한 인간적 사유와 관찰에 불과합니다. 자연은 이미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세계관은 존재 이전의 영적 문제를 다루는 기독교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반틸의 '전제'는 이러한 철학과 과학의 한계를 통찰하고 성경적 세계관만이 바른 것임을 설파했습니다. 우리 기준은 오직 성경입니다. 철학도 좋고, 과학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 사유는 유한하며 한계가 있으며, 왜곡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관점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소비주의를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까지 소비주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신조차도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는 좁은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하고 넓은 길을 선택합니다. 좁은 길은 진리의 좁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넓은 길을 사망으로 끝이 날 것이고, 좁은 길은 생명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재호 목사의 이 책은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바른 세계관으로 인도하는 좋은 가이드와 같습니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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