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논쟁 시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명제는 근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이제 사람들은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한 권의 문학작품으로 대하고 싶어한다. 그 관점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그것으로 한정하려는 저의(底意)다. 성경 논쟁은 칭의 논쟁만큼 뜨겁고, 교회론 논쟁만큼 예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하기도 전에 성경은 고등비평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성경의 무오성과 더불어 제기된 성경의 영감론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들이댄 이성의 메스에 의해 철저하게 해부되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해부된 성경은 다시 부활했고, 이전보다 더 강력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비평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보수주의 학자들이 변호를 잘한 것일까.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고등비평학은 실제가 아닌 가설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락했다. 고등비평은 더 이상 논의할 기반을 잃어버린 것 같다. 실제로 벨하우젠의 문서설을 보자. 아직도 적지 않는 학자들이 벨하우젠의 J.E.P.D. 문서설에 근거해 성경을 다층적으로 보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

구약 위주의 전승 비평(Tradition Criticism)과 신약의 구술 전승(Oral Tradition)은 영감된 계시가 아닌 인간의 작품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하지만 그것조차 불발했다. 가설에 근거한 비평은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퇴보하기 마련이다. 브레바드 S. 차일즈 이후 성경비평학이 종말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니면 전혀 새로운 시작의 전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평학이 절대 악인가. 아니다. 이러한 도전들은 결국 성경은 무엇이며, 성경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교회로 하여금 자문하게 된 것이다.

벨하우젠의 문서설은 성경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는 점은 무시하지 못한다. 어쨌든 현재 성경비평학은 소강 상태다. 하지만 전혀 다른 측면에서 성경 논쟁에 불이 붙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현대 기독교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불어닥친 개인 성경 묵상은 거품이 빠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건실하고, '개인 성경 공부'라는 방향으로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이제 신학자들은 개인이 성경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제시해 주어야 하고, 성경이 현대 독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성경,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 성경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확증함> / 데이비드 가너 편집 / 신호섭 옮김 / 세움북스 펴냄 / 280쪽 / 1만 4,000원

이 책은 가볍지 않고, 중요한 책이다. '성경은 무엇인가'를 다루기 때문이다. 제목을 <성경,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세움북스)로 정했지만, 영어 원제가 더 실감이 난다. 원제는 <Did God Really Say?>다. 다만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사용했다면 더 실감이 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이 책은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이 책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성경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을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편의상 A-B-C-D 그룹으로 분류하자.

A그룹 : 인간의 작품일 뿐이니 교양으로 읽으면 된다.
B그룹 : 하나님이 말씀이 포함되어 있지만 오류가 가득하다.
C그룹 : 하나님은 완전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어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D그룹 :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류는 없으며 완전하다.

성경을 네 그룹으로 구분했는데, 극단적으로 간소화한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으니, 간소화한 그룹을 염두에 두고 성경 논쟁을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D그룹에 해당한다. D그룹을 대체로 근본주의자로 분류하지만, 다층적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들은 어떤 근거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야 할까.

이 책은 미국장로교회(PCA) 교단 39회 총회를 위해 몇몇 학자가 모여 발제한 소논문들이다. 발제한 학자는 스콧 올리핀트, 마이클 윌리엄스, 마이클 크루커, 로버터 W. 야브로우, 반 포이트레스, 존 M. 프레임, 데이비드 가너다. 모두 한 장씩 맡아 각기 다른 주제로 발제했다. 그렇기에 단일한 주제도 아니고, 논리적 순서에 따른 것도 아니다. 한 가지 공통 주제는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가'이다.

서언에서 데이비드 가너는 현시대가 역사적 정통성을 변호하는 것에 대해 "맹목, 완고함, 부조리함, 고지식함, 심지어 지적인 부정직함으로 인지"(17쪽)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심지어 복음주의 신학이 자유주의로 불렸던 것에 대해 "친절을 베풀기로 작정한 듯이 보인다"(18쪽)고 안타까워한다. 그럼에도 "그저 신학적으로 방어하고 변호하기에 급급한 것은 영적 장애만 양산할 것이며 때때로 적실성 없는 구식의 고정관념과 혼란, 그리고 바닷가를 관망하는 일을 더욱 강하게 만들"(21쪽) 것이라고 경고한다. 즉 방어는 최선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선조들이 쌓은 토대 위에 있는 각각의 세대는 반드시 성경의 진리를 건설적으로, 효과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재진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1쪽)

변호와 재진술을 위한 모임이 바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었다. 1장에서 스콜 올리핀트는 신앙고백적 유산을 살피면서 하나님에 대한 교리와 성경에 대한 교리를 탐색한다. 특이하게 올리핀트는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 또는 존재의 토대"(35쪽)로 설정한다. 모든 지식의 원형은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이 인지하고 소유하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만 가능하다."(37쪽) 이처럼 모든 지식과 신학의 토대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오직 성경만이 "근원적인 권위이며 (중략) 무오하며 영감된 것"(39쪽)이다. 교리가 성경에서 가져온 것이기에 오류는 있을 수 있으나 교리가 곧 성경까지 오류가 있다는 식의 "모자란 걸음"(40쪽)을 디뎌서는 안 된다. 즉 교리는 신앙고백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성경에 근거한 것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마이클 윌리엄스는 2장에서 '교회 진리의 기둥: 워필드의 성경의 영감 교리'를 다룬다. 이곳에서 필자에게 생소한 단어를 발견한다. 그 단어는 '무류성(無謬性)'이라는 단어다. 영어 'inerrancy'를 직역한 것이다. 저자는 B.B. 워필드의 염감 교리를 살피면서 성경의 무오성과 무류성을 변호한다. 성경의 무류성은 '완전 축자영감설'을 지탱하는 기초다. 사실 D그룹에 속한 다양성은 '축자 영감'에 대한 각자 다른 해석상의 스펙트럼 때문에 생긴다. 축자 영감을 문학적 양식을 배제한 극단적 부류들과 유기적으로 해석하는 이들 사이에 긴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보수적 성경 영감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문자적 해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하다.

윌리엄스는 특이하게도 워필드의 성경 영감론에서 "언약적"(89쪽) 의미를 이끌어 낸다. 즉 성경은 단순히 문자적 해석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적 관계에서 읽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결국 삶으로 반응해야 하는 책임을 안게 된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확장된 의견은 앞으로 성경 논쟁이 가아 할 방향을 보여 준다. 이제 성경 논쟁은 불필요하게 반복되는 '편집'과 '축자 영감'의 대립으로만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반 포이트레스는 '하나님과 언어'(5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에게 말씀하시는가를 다룬다. 그의 주장은 약간 독특하다. 먼저 하나님은 "언어의 창시자"(154쪽)이며, "언어의 주인"(155쪽)이시다. 하나님의 언어는 제한이 없으며,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언어는 "삼위일체적 말씀"(153쪽)이시다.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인간들이 사용하는 들리는 언어가 아니다. "성령을 통해"(155쪽) 말씀하신다. 또한 성육신한 예수를 통해 말씀하신다. 성경은 이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신다"는,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로 의역될 수 있는 것이다. 포이트레스는 약간 비약된 논리로 성경 저자 이야기로 넘어간다.

"인간 저자들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미, 즉 하나님이 이미 소유하신 의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건들은 언제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61쪽)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해석"(161쪽)이다. 해석으로서의 언어는 다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수의 생애를 해석하는 복음서의 언어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알려지게 된 의미들이며 이제 시간 역사 안에서 영감의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표현된 것"(162쪽)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사건들이 황당하거나 무의미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성취된 사건임을 알려 준다. 우리는 반 포이트레스의 주장을 통해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다.

결론을 내려 보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계속 던졌던 질문은 '성경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이다. 저자들은 성경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보라고 조언한다. 1장에서는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전승사적 읽기'를 발견했다. 3장 '신약의 해체'에서는 '정경학적 읽기'를 발견한다. 5장 하나님의 언어에서는 '삼위일체론적 읽기'를 발견했다. 이러한 다양한 독법은 다양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성경에 대한 의미를 풍성하게 제공해 준다고 믿는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몇 가지 중요한 결론에 다다랐다. 성경비평학은 성경을 절대 무너뜨리지 못한다. 또한 성경비평학을 통해 성경이 무엇인지 좀 더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 성경 논쟁이 좀 더 넓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승 비평과 구술 전승에 대한 비평은 성경을 유기적으로 보도록 유도했고, 교리적 관점에 함몰된 보수주의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 책 역시 매우 보수적 관점에서 성경을 옹호하지만, 이전 책들에 비해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폭이 넓어졌다. 반 포이트레스의 '하나님과 언어'(5장)의 경우는 이전 성경 논쟁 책에서 살펴보지 못한 관점들이다. 적절한 깊이와 성경에 대한 다양한 보수적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두 가지는 아쉽다. 하나는 글의 행간 때문인지 글씨체 때문인지 명확하게 분간할 수 없으나 가독성이 떨어진다. 신발 속에 모래가 들어간 것처럼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다. 또 하나는 순전히 필자의 바람이지만, 미주를 각주로 처리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책이 아니다. 신학적 소양을 가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애써서 책 뒤편을 펼치며 미주를 보아야 할 수고는 안 하게 했으면 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성경 논쟁에 문외한인 독자들을 위해 간단한 성경 논쟁 역사를 부록으로 실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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