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더 이상 정의를 말할 수 있을까. 요즘 교회가 왕따를 당하는 느낌이다. 아니, 왕따를 자처하고 있다. 사회 담론의 장에서 '보수'라고 하기에 민망한 말을 뱉어 낸다. 세습 문제, 세금 문제로 한국교회는 본격적으로 왕따의 길로 들어섰다. 교회가 게토로 변하는 일은 시간문제다.

한국교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의 근본주의 개신교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사회에서 보수 담론을 주장하는 것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트럼프를 적극 지지하면서 몰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트럼프가 몰락할수록 미국 근본주의 개신교 세력도 힘을 잃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 뒤를 따르고 있다.

교회가 사회 담론의 장에 다시 참여할 수 있을까. 11월 중순에 <한겨레>가 진행한 '아시아 미래 포럼'에 참석했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함께 진행하는 노동과 인간의 소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다양한 논의가 있었다. 논의를 흥미롭게 지켜보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속한 개신교 담론의 장이 현대사회의 고민과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참 답답한 현실이다.

약간의 희망도 보았다. 11월 20일, 한국선교적교회네트워크와 도시공동체연구소가 연 '교회와 공동선' 세미나에 참석했다. 우선 '공동선'이라는 용어가 마음에 들었다. 교회는 선천적으로 '선'이라는 단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앞에 '공동'이라는 말이 붙으니 신선했다. 교회가 사회 담론 테이블에 '협력자'로서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사회 담론과 멀어지는 듯한 21세기의 한국교회 현실에서도 사회 담론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미나에서 (사)피피엘(People and Peace Link) 이사장 김동호 목사, 더불어숲동산교회 담임 이도영 목사, 임팩트스퀘어 도현명 대표, 도시공동체연구소 성석환 소장(장신대 기독교와문화 교수)가 생각을 나눴다.

교회가 현대사회의 고민을 논의하는 담론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동선'이라는 키워드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급격한 사회의 변화
공동선 추구는 교회의 책무

교회가 사회 담론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 상황을 온전히 교회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급격하게 변하는 사회를 교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분명 있다. 이는 서구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석환 소장은 이 현상을 '네트워크 사회' 개념으로 설명했다. 네트워크 사회는 지역 중심의 기존 사회질서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삶의 패턴이 지역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재편한다.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전통 교회는 이 같은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수평적 인간관계다. 전통적 사회에서는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중요했다. 관계망이 내가 정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렇다 보니 인간관계도 어느 정도는 주어진 것이었다.

네트워크 사회는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커뮤니티를 선택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수평적 인간관계를 추구한다. 사회가 지역 중심에서 네트워크 중심으로 급격하게 옮겨 가면서, 지역에 뿌리를 둔 전통 교회는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패턴과 괴리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이동이 쉬워져 교회 선택 폭이 넓어졌다고 설명할 수 없다. 교회에서 맺는 관계나 교회에 대한 요구 자체가 변했다는 뜻이다.

네트워크 사회는 새로운 교회를 요청하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요구에 답하고자 '선교형 교회'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쉽게 말해, 교회로 오라는 방식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회가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사회 요구에 반응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특징이 복음의 공공성,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나라 신학과 더해지면서 일반 사회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성석환 소장은 교회가 다시 세상, 도시,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세상과 동떨어진 공간으로 존재할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부름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는 필연적으로 공동선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성 소장은 복음이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근거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말씀했듯이 돌봐야 할 이웃을 우리가 정할 수 없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은 교회에게 주어진 책무이자 존재 이유다.

성석환 소장이 발표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선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 특별히 복음서는 교회가 일반 사회와 함께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이유를 잘 보여 준다.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비유가 대표적이다. 예수께서 포도원 비유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원칙을 알려 준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일구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포도원을 일군다. 임금도 그 사람의 생산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포도원 주인의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 노동시간을 겨우 1시간 남겨 놓은 오후 5시까지도 포도원에서는 일할 사람을 찾는다. 이 원칙은 일반 사회에서도 통용된다.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사업을 벌이는 사회적 기업이 그와 같은 모습이다. 교회가 이런 사회의 노력에 동참하는 것은 성경적 원리에 부합할뿐더러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가 된다.

김동호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피피엘 재단은 이 관점을 기초로 사회 취약 계층의 자립과 자활을 돕는다. 그 뿌리는 명백히 교회에 있지만 사업 자체는 교회와 다르다. 피피엘 재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들이 사업을 벌여 생존하는 것까지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동안 해 왔던 단순 지원만으로는 선교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선교 목적이라면, 그 결과로 하나님나라 원리가 드러나야 하며, 그 결과는 구체적 사회현상이어야 한다. 피피엘이 실질적 결과를 중요시하는 이유다.

이것을 목회라고 할 수 있을까. 김동호 목사는 그렇다고 단언한다. 이 목회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사역을 비판한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전통 방식의 전도도 필요하다. 이것을 선교의 전부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전도 목적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봉사한다면, 오히려 '갑질'로 오해받을 수 있다. 만나는 사람들을 예수 정신으로 섬기는 것이 곧 선교이고 전도다.

피피엘 사역은 전도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재단과 오래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교회에 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이도 많은 경우에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교회가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전통적 의미에서도 좋은 선교 모델이 될 수 있다.

김동호 목사는 교회의 공동선 추구 원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손이 수고한 대로 정직한 대가를 얻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먹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수고했는데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교회) 책임이다."

김동호 목사는 단순 지원만으로 선교 목적을 온전히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강도현

새로운 교회
새로운 그리스도인

그렇다면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페어 처치>(새물결플러스) 저자 이도영 목사와 소셜 벤처 분야에서 활동하는 임팩트스퀘어 도현명 대표는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모델과 사업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했다.

선교는 양적 성장이 아닌, 성경이 외치는 '공평과 정의'를 목표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선교를 보면,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이 많다.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약자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발견하고 치유하는 일까지도 교회 사역이 된다.

교회 존재 목적이 1차적으로 선교라는 말은 이제 신학적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선교란 무엇인가'라는 실질적 내용에 대해서는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선교가 무엇인가에 답하려면, 먼저 신앙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동안은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 문턱을 넘는 것을 전도이자 선교라고 여겼다. 더 엄밀하게 따져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시작일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전부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쏟아지고 있다.

이도영 목사가 말하는 '페어 처치'도 교회 존재 목적에 본질적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생각해 왔던 선교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선교의 시작은 예수를 소개하는 것이며, 선교의 지향점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다. 즉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니 비신자가 교회에 왔다고 해서 끝낼 수 없다. 선교는 연속적 활동이고 사회적 활동이다.

이도영 목사 아내로 함께 동역하는 임영신 대표(이매진피스)는 교회를 매개로 한 지역 활동을 소개했다. 들으면서 교회가 엄청 크겠다고 생각했다. 사역 임팩트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선교에 대한 개념과 목표가 바뀌니 교회 크기와 상관없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임영신 대표는 교회가 사회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회가 속한 지역 사람들 필요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교회 입장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동네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주민들과 소통하라는 말이다. 교회 사역을 결정할 때 교회 밖 사람들과 먼저 소통하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선교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최근 한국교회봉사단이 전문 리서치 기관을 통해 종교 기관의 봉사 활동 관련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결과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개신교가 가장 많이 사회봉사를 하면서도 그만큼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언론사는 "사회봉사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삼지 말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공공성을 실현해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을 곁들이며 사회봉사를 전도 도구로 활용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사회봉사, 더 나아가 사회정의 실현 자체가 선교이자 교회 존재 목적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교회의 공동선 추구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선교의 본래 목적에 부합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수많은 행사가 개최됐지만 '명성교회 세습'이라는 대형 이벤트 앞에 그 많은 행사 취지가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우리는 더 가열하게 교회 개혁 운동을 펼치면서, 한국교회가 새로운 하나님나라 역사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새 시대를 위해 새 방식으로 일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좇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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