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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독점 해소, 통일로 가는 여정

왜 토지개혁은 시대적 과제가 되었는가

조성찬   기사승인 2017.12.02  13: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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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가 '희년과 특권, 그리고 대안 경제'라는 제목으로 격주 간격으로 5차례 칼럼을 연재합니다. 연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조선 말 관리의 부패 및 토지 독점 문제

남북 분단 원인이 특권층의 부패와 토지 독점에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분단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왔다. 가까이는 1950년 6월 25일 삼팔선을 넘어온 북한을 지목한다. 조금 더 구조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및 해방 후 미군정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더 나아가면 마르크스 이론에 기초한 러시아혁명 및 동유럽과 중국에서 진행된 공산주의 세력 확대에 두기도 한다. 과연 그렇기만 할까. 조선이 망하기 전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조선 후기, 토지개혁을 주창한 실학자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1818년)에 보면 당시 서민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는 시 한 편이 있다. 강진 유배지에서 정약용이 실제 목격한 일을 바탕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당시 군정 문란으로, 죽은 아버지와 갓 태어난 아이까지 군정의 과세 대상이 되자 아이를 낳은 죄를 한탄하여 아비가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랐고, 이를 슬퍼한 아내가 관가에 그 성기를 들고 가 항의했다는 내용이다.

애절양(哀絶陽: 성기를 자른 것을 슬퍼한다)

갈밭마을 젊은 아낙 길게 길게 우는 소리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네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양물 잘랐단 소리 들어 본 적 없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누에 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다 할 만한데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부잣집들 일 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
이네들 한 톨 쌀 한 치 베 내다 바치는 일 없네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 편을 거듭 읇노라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지은 지 75년 후인 1894년(고종 31)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다.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이다. 이 운동은 새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동진강(東津江)에 만든 만석보(수리 시설의 일종)를 이용하는 농민들에게 너무 과중한 수세(水稅)를 받으면서 발단이 되었다. 큰돈을 주고 관직을 산 조병갑은 수익을 창출해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전국의 농민들은 이미 3정 문란(전정: 토지세, 군정: 군역 대신 군포 납부, 환정: 춘궁기 곡식 빌려줌)으로 탐관오리로부터 지나칠 정도로 수탈당하고 있었다. 이 운동이 전라북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전국적으로 확산한 것을 보면 전국 농촌 곳곳에 조병갑이 득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 동학농민운동은 관리들의 부패와 토지 문제를 함께 보여 준다. 먼저, 조병갑은 후에 동학 제2교주 최시형의 사형 판결을 내리는 고등재판소 판사로 재임명되었다. 이는 농촌을 지배하는 관리들의 부패뿐만이 아니라 사법부의 부패를 동시에 보여 준다. 다음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장두(狀頭) 전봉준이 제시한 12개조 폐정개혁안을 보면, 8조에서 "규정 이외의 모든 세금은 폐지한다"고 했고, 마지막 12조에서 "토지는 골고루 나누어 경작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보면 당시 3정 문란 외에 토지 독점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반증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당시 무력했던 조정이 청나라를 불러들이고, 이를 이유로 일본 역시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결과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정부가 농민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면 일본이 들어올 여지가 없었을 것이며, 설령 들어왔다 하더라도 농민들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을 것이다. 이 지점이 필자가 남북 분단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시각에 큰 불편을 느끼는 이유다.

일제강점기 이후 남북 분단 전 토지 독점 문제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관리의 부패 문제 및 토지 독점 문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식민지 지배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고, 근대법에 기초하여 지주-소작제를 제도화하였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식민지 국가에서 지주에 수탈당하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농지 중 86%가 지주 소유였으며 농민의 60% 정도가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삼팔선 북측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을 공표하고 3월 8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북조선 노동당은 신속하게 권력 기반을 다치기 위해서라도 농민의 숙원인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각종 토지 문서를 소각해 버렸다. 반면 삼팔선 이남의 이승만 정부에서는 법 제정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농지개혁을 바라던 소작인들의 분노는 끓어올랐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남측에서 남조선노동당 등 좌파가 강력하게 활동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세력의 확대를 두려워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가혹하게 이들을 탄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중심으로 농지개혁을 준비했다. '좌파 빨갱이'라는 낙인찍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해냄출판사)에 가슴 저리게 소개되어 있다. 그나마 1950년 3월에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농지개혁이 진행되었다. 예수원의 설립자인 고 대천덕 신부는 남한 농지개혁으로 전쟁에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유럽의 산업자본주의 팽창 과정에서 인클로저(enclosure)로 농지를 빼앗기고 도시 노동자로 전락한 이들의 참상을 지켜본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하고 토지 등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야 한다며 계급혁명론을 주창했다. 이는 러시아 레닌에게 영향을 주어 세계 최초로 러시아혁명이 성공한다. 러시아혁명이 진행되기 전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대규모 농지를 소작농에게 나눠 주면서, 러시아가 토지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면 망한다고 주장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한 러시아는 같은 전략으로 중국 및 북한을 지원한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한 이유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강했으면 중국 공산당이 도시 토지와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면서도 농지를 오늘날까지 집체 소유(마을 소유)로 유지하고 있겠는가. 북한도 형식상 농지는 여전히 농촌 협동 단체 소유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조선 말 조정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특권층의 토지 독점에 따른 농민 수탈 때문이었다. 해방 후 나라가 분단된 이유는 구조적으로 미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결과로 볼 수 있지만, 이미 이야기했듯이 유럽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탄생에 토지 독점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한반도에서는 일제가 만든 지주-소작제 때문에 사회 갈등이 최고조였다. 이처럼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토지 독점 문제가 오늘날 남북 분단에 중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토지 독점 문제 해소 방법:
지대 개혁 및 북한 공공 토지 임대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농지개혁을 논할 때마다 항상 근본으로 보는 것이 바로 중국의 정전제(井田制)다. 이 제도는 중국 하조(夏朝) 시대에 시작되었고, 춘추전국시대에 사유화의 욕구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흔히 9개의 분할된 농지가 있는데 가운데 농지는 다 같이 경작하고 그 주변은 각자 경작하는 것으로만 정전제를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제도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성인 남자가 가정을 이루게 되면 농지를 분배받고, 늙거나 병들었을 때 농지를 반환한다. 분배받은 토지에 대해서는 사용권만 있었고 소유권은 없었다.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각자에게 일정 기간, 지대 납부 조건으로 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원리는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에서 토지개혁의 핵심 원리로 제시한 것과 유사하며, 중국이 개혁 개방 이후 추진한 토지개혁 역시, 한계는 있지만, 이와 유사한 원리였다. 북한 역시 경제특구와 개발구에서 비슷한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필자는 이처럼 토지를 공공이 소유하면서 개인에게 토지사용권에 기초하여 장기간 안정적으로 빌려주고, 대신 개인은 지대를 공공에 납부하는 제도를 공공 토지 임대제로 칭한다. 북한은 향후 이런 원리를 경제특구 및 개발구는 물론이고 일반 도시 및 농촌에서 개인과 기업을 대상으로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 공공 토지 임대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 전환국의 토지제도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다.

이런 원리로 토지를 개혁하게 되면, 설령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경제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민주화는 그 다음 단계로 상정하면 된다. 남한 역시 토지개혁이 필요하다. 최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한국 사회에 지대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대다수 시민들 역시 토지 보유세 인상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렇게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토지개혁을 진행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조선이 나라를 빼앗기고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데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토지 독점 문제를 해소해 나가야만 평화로운 통일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북한 토지의 사유화를 전제로 하는 '흡수통일' 방식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토지 문제 해소에 통일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조성찬 / 토지+자유연구소 통일북한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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