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인간은 기독교·이슬람교·힌두교·불교 등 다양한 종교 문화가 얽힌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전문 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10년 6개 대륙 232개국을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69억 인구 중 84%가 종교를 갖고 있다. 이 중 기독교인은 31.5%, 이슬람교인은 23.2%, 힌두교인은 15%, 불교인은 7.1%라고 한다. 다종교 상황이 자연스러운 현실에서,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도 100% 기독교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가르치는 정재현 주임교수는 "100% 기독교인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특히 한국은 무(巫)교와 유교 영향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독교 정체성이 분명해도, 한국 기독교인의 종교적 심성을 분석하면 기독교 외 다른 종교들의 성분이 오히려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최근 펴낸 <종교신학 강의>(비아)에서 다종교 상황을 다룬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인간의 다종교성에 주목해 기독교인이 가야 할 길을 논한다.

<종교신학 강의>를 출간한 정재현 교수와 만났다. 그는 연세대 종교와사회연구센터, 연세대 기독교문화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다음 집필 계획을 묻자, 철학적 신학적 해석학과 관련한 책을 쓰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그동안 서구 기독교 진영에서는 다종교 상황을 다루는 방식을 보통 3가지로 분류했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다. 각각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태도와 기독교를 기준으로 다른 종교를 포괄하는 태도,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 하나로 보고 다른 종교와 대화하는 태도로 정리할 수 있다. 정재현 교수는 세 가지 모두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방식들은 서로 달라 보여도 특정 종교인이 종교 정체성을 순수하고 동일하게 지닌다는 전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이 전제가 잘못됐다고 말한다. '종교'라는 단위를 넘어 인간의 성분 자체를 분석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뉴스앤조이>는 11월 14일, 연세대학교 신학관 정재현 교수 연구실에서 정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배타주의 성향이 대부분인 한국 기독교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왜 종교가 아닌 '인간'에 주목해야 하는지, 인간의 다종교성을 받아들였을 때 선교의 가능성은 존재하는지 등을 물었다. 거침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 책 제목이 <종교신학 강의>다. '종교신학'이란 무엇인가.

종교에 관한 신학, 영어로는 'Theology of Religions'다. 'Religions', 복수 표현이다. 종교에 관한 신학적 이론 성찰이라기보다는 '종교들', 말하자면 여러 종교가 펼쳐져 있는 현실과 현상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종교들은 공존도 하고 충돌도 한다. 이 현상 가운데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혼자 정체성을 꾸릴 것인가, 다른 종교들과 관계할 것인가.

어느 하나만 붙잡을 수 없다. 관계성으로만 해소할 수도 없고, 정체성만 열심히 찾을 수도 없다. 정체성만 챙기면 독불장군이 되어 사회에서 공인받지 못하고 퇴락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체성과 관계성 두 가지 과제를 같이 고민해야 하는 셈이다. 즉 자기를 세우고 타자와 관계하는 일을 고민하는 신학 분야를 '종교신학'이라고 한다.

- <종교신학 강의>에서, 다종교 상황을 전제하고 종교가 아닌 인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왜 종교가 아닌 인간인가.

기독교 신학이 다종교 상황을 다루는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다. 서구 기독교의 종교 간 논의에서 일반 패턴이다. 지금 서구에서는 이 방식이 적절한가에 대한 반성도 있지만, 역사는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 순서로 흘러왔다.

현재 가톨릭과 정교회까지 포함한 기독교가 더 빨리 가라앉는 곳이 유럽이고, 미국이 뒤따라가고 있다. 한국은 이제 이 어려운 상황에 돌입하고 있다. 이때까지 왔던 기독교 역사대로 흘러간다. 유럽, 미국, 한국 순서대로 어려운 상황에 들어가는 현실 가운데, 유럽은 이 문제를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고민은 유럽만 못하며, 한국은 전혀 다른 문화권에 있다.

기독교만 해도 개신교와 가톨릭이 따로 있는데, 한국에서는 메이저 종교로 불교가 있다. 3대 종단으로 개신교, 가톨릭, 불교를 언급한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합치면 기독교인 수가 가장 많다. 쪼개면 불교 숫자가 가장 많다. 개신교도 그렇지만 불교도 허수가 상당하다. 힘의 균형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개신교와 불교는 묵시적으로 평화로운 상황이다.

배타주의라고 할 때 배타라는 말은 자기한테 쓰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날리는 말이다. 타자를 배제하며 자신을 기준으로 내세우니 배타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유형과 비교하면 그렇게 분류할 수밖에 없다. '복음주의'라고도 많이 말하는데 복음주의가 다 배타주의는 아니다. 다만 복음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면, 상당 부분이 배타주의 성향이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는 형식적 표현이다. 복음주의라는 말은, 포괄주의나 다원주의 같은 형식적 표현이 아니라 내용적 표현이다. 등위선상에 있는 분류가 아니다. 포괄주의, 다원주의와 층을 맞추려면 배타주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라는 말을 안 써도, 대략적으로 보면 어떤 입장인지 알 수 있다. 복음이라는 말을 내세우지는 않아도, 포괄주의자들이 이해하는 복음, 다원주의자들이 이해하는 복음이 있다. 자신이 이해하는 복음과 다른 방식이면 동의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이것이 타자를 배제하는 방식이다.

서구 기독교 다원주의는 다원을 말하지만 배타주의 못지않은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다. 서구 전통은 어쩔 수 없이 기독교의 일원성에 대한 진한 향수가 있는 듯하다. 종교들의 출발점이 하나라고 주장하거나 도달점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현상에 관해서는 다원주의지만 본질·원리·내면에서는 철저히 일원성이다. 이 하나는 자기가 속해 있는 하나다. 회귀하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을 힘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착상은 좋았지만,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본능적 일원성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이런 구분에도, 문제는 배타주의로 분류될 입장과 정반대에 있는 다원주의로 분류될 입장의 사람들이 나와서 논쟁할 때, 이들은 한 종교인을 100% 그 종교인이라고 전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배타주의자, 다원주의자 둘 다 똑같이 '나는 100%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으로 논의에 임한다. 여기 결정적 맹점이 있다.

정 교수는 <종교신학 강의>와 짝을 이루는 저서로 <'묻지 마 믿음' 그리고 물음>(동연)을 소개했다. <종교신학 강의>가 사회 문화 단위로 신앙 성찰 문제를 다룬다면, <'묻지 마 믿음' 그리고 물음>은 개인 단위로 신앙 성찰 문제를 다룬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다른 나라로 갈 것 없이 한국종교학회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정론으로 정리된 지 30~40년이다. 한국인은 종교가 있든 없든, 내면의 문화적 종교적 성향을 분석하면 대체로 무교 성향이 50%, 유교 성향이 30%라는 것이다. 우리 DNA에 새겨져 있다. 무교가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면, 조선조 500년을 장식한 유교가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나머지 20%가 새로 받아들인 것이다. 착실한 기독교인의 경우 20%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다. 이름은 '기독교인'이지만, 순도 100% 기독교인이 아니고 20%라는 것이다. 점수로 이야기하면 더 확실해진다. 100점짜리가 아닌 20점짜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20점으로 자신에게 '100점짜리 기독교인'이라는 라벨을 붙인다.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종교 간 대화도 이 틀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다른 종교인들이 모였다며 인류 평화를 위한 과제를 논의한다. 그들은 각자를 100% 기독교인, 100% 불교인, 100% 유교인라고 생각한다. 종교적 성분을 분석하지 않고 성찰 없이 이 사실을 전제한다. 특정 종교에 속하면 에누리 없이 그 종교인이라고 보고 서로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놓는 순간, 껍질을 벗기는 순간, 성분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름으로 서로 경계 짓고 그 이름들 사이에서 타자를 배제하거나, 타자를 포용하고, 타자와 만나 대화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마나 껍질뿐인 이야기인가. 이 상황에서 만난다고 하면 이름들끼리 만나는 것이다. 이름에 다른 이름들의 성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진짜 만나야 하는 존재는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어야 한다. 이 같은 전제 분석조차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배제·포용·대화라고 구도를 잡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배제도 무엇을 배제하는지 모르고, 대화해도 다 비슷비슷하니까 '저렇게 다른 종교를 가졌어도 비슷하게 생각하네'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다. 성분은 거기서 거기니까. '역시 내가 믿고 있는 진리는 다른 종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네'라고 하면서 또다시 자기 확인을 한다. 진짜 타자, 진짜 다름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라는 껍질을 최소 단위로 설정해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으니, 현실과 동떨어진 허상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름의 껍질을 벗겨야 한다. 성분을 분석해야 한다. 기독교계에서의 좌파 우파, 진보 보수, 다원 배타 문제 이전에 인간의 성분 자체 문제다.

고대 철학자들은 '원자'를 물질을 이루는 최소 단위로 들었다. 긴긴 세월, 근대에 와서까지, 원자를 쪼갤 수 없다고 봤다. 현대에 오니까 원자를 쪼개 버렸다. 물질의 최소 단위라고 했는데, 쪼개서 속을 봤더니 양자와 전자가 중성자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 얼마나 빨리 도는지 돌면서 그 상태를 유지한다.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발악하고 있는 것이다. 쪼갰더니 그 속에 우주가 돌고 있다. 기독교인을 쪼갰더니 그 안에 기독교 아닌 것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 전환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

- 이 같은 분석을 기초로, <종교신학 강의>의 존재 의의를 찾는다면.

종교 간 대화를 할 때는, 종교계 간 대표자들끼리 만난다는 생각이나 참석자 본인이 종교 대표자라는 허위의식을 깨야 한다. 특정 종교와 조금 더 많이 관련 있을 뿐인 보통의 인간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보면 배타주의는 적절하지 않다. 배제해야 할 타자, 다름은 이미 내 속에 이글거리고 있다. 배제할 타자가 내 속에 더 많을 수도 있다. 다름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하는 물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원주의자도 자기 정체성을 '동일성'으로 전제하고 타자와 만나는데, 이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한다.

타자 속에서 나와의 같음을, 또 다른 다름을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더 세밀한 투시가 필요하다. 자칫 타자 속에서 자기와 같은 것을 확인하고, "우리가 남이가?"라고 반응할 가능성이 많다. 모여서 좋은 게 좋다는 얘기로만 이어진다면, 겉보기에는 평화지만 자기의 같음에 대한 반복 확인인 셈이다. 이미 다른 성분들로 이루어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계속 확인하고 그 기억을 재생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억을 재생한다. 계속 반복 재생한다. 그때마다 확인하고 안정감을 얻는다. 이 안정감을 '은혜'라고 부르도록 길들여졌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신앙을 반복 재생하며 확인하고 안정감 얻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자기 믿음을 믿는 것이다. 자기 믿음을 믿는 것은 자기를 믿는 것, 즉 자아도취인 셈이다. 자아도취를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종교신학'도 신앙 성찰 문제를 짚는 것이다. 다만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할 뿐이다. 종교가 아닌 인간 문제로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성찰이 없으면 자아도취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신앙 때문이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자아도취에 빠진 것을 모른다. 충만한 은혜, 독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자정 기능이 없다. 그래서 한 발짝 물러나서 봐야 한다. 인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말은, 개인·사회 단위에서 살피지 않으면 자기도취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신앙과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메커니즘을 성찰하자는 것이다.

종교라는 이름에 머물지 말고, 종교보다 더 파고들어 껍질을 벗겨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종교의 본뜻도 살릴 수 있다. 인간으로 갔을 때, 인간은 개인이다. 그런데 개인은 한 개인이 아니다. 인디비주얼(individual)은 인디비저블(indivisible)이 아니라 디비저블(divisible)이다. 원자 속에 양자, 전자, 중성자가 다 있듯이 개인은 다름들의 뭉침이다.

종교의 경우에도 1세기 기독교와 21세기 기독교가 같지 않다. 1세기에 시작했지만 한 인간이 여러 종교의 영향을 받아 습합적으로 뒤섞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 자체의 버전이 달라져 있다. 이것을 종교적 격의성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 안에 여러 종교가 빙글빙글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종교적 중층성이라고도 말하는데, 이중적이다. 종교 자체가 이미 뒤섞여 있고 한 인간 안에도 여러 종교가 뒤섞여 있다.

이 진상을 본 한국 기독교인이 할 일은 무엇인가. 나에게도 기독교적이지 않은 성질들이 깔려 있다는 점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내가 20점짜리 기독교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내가 할 일은 30점, 40점, 50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낙제점은 넘겨야 할 것 아닌가. 60점은 가야 한다는 말이다. 100점이 되는 것이 목표겠지만, 인간이 어떻게 100점이 되겠는가.

20점이라고 진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시작부터 성찰이 안 되는 것이고, 80점 차이를 결코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가 터질 수밖에 없다. 지금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무수하게 다른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종교적 구성 성분, 현주소를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25점, 30점 등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 깨달음만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겠다.

정재현 교수는 기독교가 '성찰'을 잃어버렸다는 점을 반복해서 지적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한국 개신교 다수는 배타주의 성향이다. 이것이 종종 사회문제로 돌출한다. '종교 간 대화'조차도 요원해 보인다. 이 상황 자체를 어떻게 분석하나.

이같이 된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수는 아직도 그냥 문을 닫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분석은 이미 많은 사람이 했다. 여전히 '성찰되지 않은 자기' 문제다. 본능적·욕망적으로 성찰되지 않는 자기를 보존·확장하고자 하는 생리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을 유지해 주는 좋은 틀, 명분이 '이름'이다.

우리 사회는 이름주의가 굉장히 강하다. 똑같은 얘기를 해도 저명한 사람이 하면 무게가 확 실리고, 내가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웃음) 자기 자신이 100% 기독교인이라는 자의식은 정확히 말하면 허위의식이다. 허위의식으로 이름을 붙잡는다. '기독교' 이름을 쓰는데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 벌써 이단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쳐내야 한다. 타자 배제를 지탱하는 것은 이름이다.

내가 잘 써먹는 이야기가 있다. 통계조사 이야기다. 실제 30~40명씩 놓고 진행하는 종교 연구 조사다. 기독교인 두 사람과 불교인 한 사람을 놓고, 당신들이 이해하고 믿는 절대자에 대해 서술해 보라고 했다. 다만 고유한 종교용어나 경전 언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고 요청했다. 기독교나 불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독특한 용어가 아닌 일상 언어로 글을 써 보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기독교인이 '절대자'라고 썼더니, 불교인이 "우리는 '자'를 설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반대한다. '절대성'이라고 썼더니, 기독교인이 "우리가 믿는 존재는 성질 정도가 아니다. 차원도 아니고 인격적 존재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도 안 되고 '성' 안 된다고 해서 그냥 '절대'로 표기했다. 그리고는 당신들이 믿는 절대에 대한 이해를 일상 언어로 써 보라고 했다. '절대'가 주는 궁극적 경지에 대해서도 써 보라고 했다. 기독교의 '구원', 불교의 '해탈'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야 해서 중립 언어로 '해방'을 썼다. 그런데 종교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니까 안 써진다. 무슨 말인가. 종교와 일상이 분리돼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 언어가 교회 바깥에서 안 먹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종교학회 등에서 이런 작업을 해 왔다. 글을 쓰라고 해서 3,000개 단어를 만들었다. 단어집을 봤더니 절대에 대한 이해에 있어 기독교인 한 사람과 불교인 한 사람의 차이보다 기독교인 두 사람 간의 차이가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이름의 껍질을 벗기는 순간, 내용으로는 같은 종교인들 사이의 차이가 다른 종교인들과의 차이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 그런데 이름만 붙잡고 있다. 자신들은 이름만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 수 없다. 허위의식 때문이다.

- 이 책이 말하는 논의를 받아들였을 때, 기독교 '선교'의 가능성이 있는가.

이 책에서 분석하는 방식을 선교에 적용한다면 '선교'라는 문자를 풀어 버려야 한다. 선교(宣敎)란 종교를 선전하는 것 아닌가. 선교라는 단어를 쓰면 이미 단어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교'의 이름이 중요해진다. 이름주의에 빠져 버리고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 복음 전파하고 십자가 세우는 것이 선교라고 하지 않았는가. 말하자면 기독교화(Christianization)인데, 갖다 붙인 것은 복음이라는 이름과 십자가라는 모양이다.

선교 목적이 종교 선전에 있다면 찬성할 수 없다. 개종이 아니라 개명이라는 결과에 머무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선교라는 표현도 어떻게 바꿀지 고민해야 한다. 의식이 언어를 지배하기도 하지만 언어가 의식을 지배하기도 한다. 선교학자들이 고민해서 새로운 말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종교가 아니라 삶을 나눠야 한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1916~2000)가 쓴 <종교의 의미와 목적>(분도출판사)이 있다. 이 책은 종교가 '종교'로 명사화하기 전에 '종교적'이라는 형용사로 먼저 있었다고 지적한다. '종교하다'는 표현이 어법상 어색해 보이지만, 인간의 삶 자체가 이미 종교하는 삶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라는 말은 동사적이다. 형용 정도가 아니라 행위다. 종교적 삶이 먼저였다는 말이다.

이 책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본래 종교적 삶을 먼저 살아왔는데, 후에 정태화·제도화·개념화·물상화하는 과정을 거쳐 종교 자체가 구별 짓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종교라는 말이 가리키는 원초적 차원을 일상화할 가능성을 일구어 내고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보다 삶이 우선이고, 선교도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신학 강의>를 잘 읽기 위한 방법을 묻자, 정 교수는 책 앞부분에 깔려 있는 전제들을 꼼꼼히 파악하고 전체를 읽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한국 개신교가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고 보는가.

한국종교학회 연구가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안 듣는다. 아까 한국인의 문화적 종교적 심성에서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지적했다. 무속 50%, 유교 30%, 기독교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20%다.

난리를 쳐도 다른 종교의 자리가 20%라는 현실에, 불교계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소수림왕 때 대승불교가 중국을 거쳐서 들어왔는데, 그렇다면 한국에서 불교 역사는 적어도 1,700년이다. 문헌에 따라 더 거슬러 올라가 2,000년까지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조선조 500년 동안 유교가 한국인의 의식에 자리 잡았다. 이때 왕실에서는 불교를 신봉했지만, 정치적 이념으로는 유교를 써먹었다. 아무튼 1,700년 동안 불교는 한국인의 심성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희한하다.

불교가 무교 형태로 자리 잡게 되어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불교는 무교와 결합했다. 사찰에 가면 온갖 게 다 있다. 이름은 불교다. 그런데 껍질을 벗기면 하는 것이 무속신앙이다. 불교의 자리가 없다. 1,700년 역사인데 한국인에게 불교 자리가 없다. 이름만의 불교고 내용은 무교다. 한국인 심성에 무교가 깊게 자리 잡는 데 오히려 이름만의 불교가 기여한 것이다. 기독교가 불교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불교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유교 덕에 성장한 것도 있다. 의식이 그렇게 작동하니까. 가족주의, 집단주의, 위계질서 등이 의식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고상한 차원이 우리 삶의 일상적 현실에 자리 잡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불교가 무속화하고 기독교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말이다. 기복적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기독교 바깥으로 나와 종교학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한국 기독교도 이름만 남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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