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을 보는 순간 맥박이 빨라졌다. 기대했던 한 권의 책이 기독연구원느헤미야(느헤미야·김형원 원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마디로 '오직 믿음으로'에 대한 바른 해석이다. 필자는 이 세미나의 결론을 헤르만 바빙크의 "믿음은 행위와 협력하고 행위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된다"[<개혁교의학 4>(부흥과개혁사), 261쪽]는 말에 감히 빗대고 싶다.

느헤미야 원장인 김형원은 칭의를 "신자의 삶에서 행위와 분리될 수 없으며, 정의로운 삶의 실천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6쪽)고 말한다. 칭의는 언제나 개신교의 중요한 신학 주제다. 그동안 우리가 이해하는 칭의는 적지 않은 오해를 불러왔는데, 칭의와 삶이 무관하다는 관점 때문이었다. 대체로 성화 문제를 칭의와 구분하여 성령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는 옳지만 협소한 관점이다.

성화는 칭의의 순간에 이미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은 '칭의와 정의'라는 주제로 여러 학자가 발제한 작은 소논문 모음집이다. 그렇기 때문에 획일적인 논지나 주장을 따라가기는 어렵다. 하지만 책의 전체 흐름과 저자들의 간략한 주장은 잡아 줄 필요가 있다. 필자는 모든 학자의 주장을 살피지는 않을 것이다. 책 주제에 맞는 흐름을 따라 저자들 주장을 인용하고 반박해 나갈 것이다.

책은 4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성경에서의 칭의와 정의'를 다룬다. 2부에서는 '교리사와 조직신학에서의 칭의와 정의'를 살핀다. 3부에서는 '칭의론의 현대적 논의'를 다루고, 마지막 4부에서는 '칭의론의 사회윤리적 논의'를 다룬다. 저자들의 의견을 살펴보자.

<칭의와 정의> / 김동춘 외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 582쪽 / 2만 6,000원

김동춘은 여는 글에서 칭의론의 문제를 언급하며, '오직 믿음'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죄인들에 대해 의롭다 함을 선포하는 법정적 선언이다. 근거는 그리스도의 공로이며, 하나님의 은혜(은총)에 의한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에는 인간의 공로나 행위는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배타적 속성이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를 강조한 나머지 행함이 누락되었다. 김동춘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정황 속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서의 구원을 강조해야 한다"(15쪽)고 말한다.

우리는 김동춘의 주장을 기저에 깔고 본서를 읽어 나가야 한다. 김동춘은 역사 속에서 칭의 개념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나간다. 필자의 눈에 선명하게 드러난 주장은 재세례파다. 재세례파는 칭의를 성화와 구분하지 않는다(36쪽). 칭의가 곧 성화다. 그들에게 거듭남(칭의)은 삶의 변화가 동반된 것이다. 김동춘 또한 결론 부분에서 칭의와 의화(義化)는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43쪽)고 선언한다. 대단히 옳은 주장이다. 다른 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한신대 명예교수인 김창락은 구원을 "죄에서 돌이켜 용서함 받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상태"(54쪽)로 추측한다. 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91쪽)이라는 사실을 통해 사람과의 바른 관계와 직결한다. 그의 결론은 명료하다. '체아카(울부짖음)'가 있는 곳에 '체다카(정의)'는 없다. 우리는 이것을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요한일서 말씀에 유비해도 될 것이다. 김근주의 경우는 율례를 행하는 삶을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123쪽)으로 요약한다.

2부에서 김선영은 루터의 칭의론을 재해석하면서 루터의 신학 주제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의인과 의의 열매"(266쪽)라고 주장한다. 사실 루터의 이신칭의는 로마서 연구를 통한 과업이기는 하지만 중세 가톨릭이 주장한 '의화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의화론은 "주입된 은혜와 본성의 본질적 변화, 그리고 신인협력에 의해 점점 의로워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이 의와 구원을 획득"(235쪽)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에 비해 루터의 칭의론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배제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외래적 의를 얻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보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루터에 대한 오해가 시작된다.

인간의 공로가 배제된다면 결국 성화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이 루터의 '딜레마'(238쪽)였다. 답은 결국 다시 '오직 그리스도'로 돌아간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원천이자 목적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원천이자 목적"(266쪽)이 될 때, 행위는 다시 공로가 아닌 열매로서 부활하게 된다. 우리는 종교개혁 시기에 '자유의지'를 부정했던 루터와 이를 인정했던 아나뱁티스트의 주장 사이에서 근대에 일어날 논쟁의 씨앗이 본다. 칭의 논쟁에는 두 진영의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흐르고 있다. 그 내용은 어떤 면에서 간단한데, 한쪽에서는 일방적 칭의는 사람들의 삶을 해태(懈怠)하게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상대 진영이 구원에 사람의 공로가 협력한다는 이단적 사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본다.

"후브마이어를 비롯한 아나뱁티스트가 구원받은 자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이유는 주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법정적 칭의와 하나님의 주권의 강조가 구원 이후의 신자의 삶을 운명론이나 도덕적 해이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구원의 과정에서 자유의지의 강조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316쪽)

이 긴장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필자의 속 좁은 견해로는 두 진영이 서로에 대해 진지하게 열린 대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자유의지를 강조한 후브마이어는 "칭의와 행위를 구분하여 생각할 수 없다"(319쪽)고 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아나뱁티스트의 칭의론은 관념적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칭의를 "구원의 현재성의 강조와 인격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관점"(320쪽)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구원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상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나뱁티스트는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일상에서 구원이 재현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칭의의 현재성에 대한 문제는 12장인 김동춘의 '칭의와 정의-사회적 차원의 칭의론'을 살펴봄으로 보완된다. 필자는 이 부분은 조금 세밀하게 따라갈 것이다.

칭의론은 왜 값싼 용서의 교리가 되었는가. 김동춘은 칭의론이 무엇인지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며 시작한다.

"종교개혁 칭의론은 값싼 용서의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칭의론이 되어야 한다. 정의론 없는 칭의론은 값싼 용서로 둔갑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정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440쪽)

"칭의론의 핵심은 용서다."(440쪽)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용서는 왜 값싼 용서가 되었는가. "그것은 죄 용서의 복음의 총화였던 칭의론이 죄인을 용서하는 은혜의 복음으로 설교되면서, 불의와 악을 용인하고 조장하는 교리가 되었다는 데 있다"(440쪽)고 말한다. 더 나아가 칭의 교리의 비극은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정의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441쪽)이다. 소위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거듭난 신자가 되었음에도 "실질적인 의로움을 살아 내지 못하"(441쪽)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저자의 논리를 더 따라가 보자. 김동춘은 정의가 사라진 칭의의 이유를 이분법적 사고에서 찾는다. 하나는 종교개혁적 개념으로서의 칭의와 사회적 차원의 정의를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오류에 있다. 다른 하나는 "창조와 구원, 구원사와 세속사,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두 차원이 서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전제와도 연관이 있다"(442쪽)고 말한다. 즉 칭의와 사회적 정의는 거의 상관이 없기에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전통적 칭의론의 옳지 못한 이해는 극복해야 한다.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김동춘은 '다카이오네쉬'를 정의가 아닌 '의'로 축소해 번역한 것에서 이 문제를 찾는다. 이러한 번역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옳음과 사회적 정의를 구분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바른 번역 즉, '다카이오네쉬'는 "구약의 정의(체데카, 미쉬파트) 개념과 직결"(445쪽)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몰트만이 종교개혁 칭의론을 비판한 대로 칭의는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정의를 연결"(446쪽)하는 것으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정의와 구원은 다른 단어가 아니라 '동의어'(446쪽)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정의는 신약에서 '의'가 아닌 '정의'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김동춘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정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회적 칭의론에서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불의, 억압, 착취, 부당함으로 인해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자들, 실패한 자들, 희생자들, 약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칭의론의 본질이다." (448쪽)

필자는 김동춘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여기에 개념이 축소되어 있다고 믿는데, 구약의 정의는 율법적 정의이지 사회적 정의로만 남지 않기 때문이다. 즉 법 앞에 평등한 것이지 가난한 자라고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경은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레 19:15)하라고 말한다. 김동춘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법 앞의 평등'을 정의 개념으로 확장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동춘은 조금 더 나아가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에서 사회적 칭의론의 서막을 간파한다. 제임스 던과 샌더스의 이론은 아직 논쟁 중이다. 이러한 논쟁의 이유가 '오해'(458쪽)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하기를 개혁주의 학자들이 "새 관점이 언약적 율법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구약의 율법주의와 공로 구원에 빠져 있다는 것"(458쪽)이라고 오해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던은 "하나님의 정의야말로 성서의 중심 개념이라는 것을 제시"(461쪽)했다고 보며, 이러한 정의 개념이 루터의 칭의론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에서 "믿음으로의 칭의로 이동했다"(461쪽)고 말한다. 필자는 김동춘의 주장에서 필연적으로 해방신학으로 귀결할 것은 예감했는데, 역시 "약자들과 피해자들에게 결합하는 칭의론을 해방신학에서 발견하게 될 것"(466쪽)이라고 언급한다.

그렇다면 개혁주의에서 칭의는 어떻게 다루어지는가. 한마디로 관념적 칭의론 정의에 몰입한다. 리처드 개핀이나 존 파이퍼의 칭의에 관한 글을 읽어 보면, 사회정의나 행위에 대한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고작 언급되는 부분은 율법과 행위를 구분하고, 용서와 칭의를 구분함으로 칭의론을 명료하게 하는 것에 한정된다. 그러한 주장이 아닌 곳에서는 사회적 정의의 개념은 찾기 힘들다. 있어도 극히 미미하다. 보수적 관점에서 칭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와 공로는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말 행위가 없을까. 있다. 문제는 극히 협소한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마지막 날에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공개적인 증거와 확증으로서 믿음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향한 변화된 순종의 삶의 필요성을 믿습니다." [<칭의 논쟁>(부흥과 개혁사), 170쪽]

비슷한 관점에서 저술된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IVP)에서 박영돈은 "성령께 신신하게 반응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203쪽) 살펴볼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보수적 관점에서 정의 개념은 희소하며,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있다.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단지 도덕적 삶인지, 불의에 대한 집단적 항거까지 포함하는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김동춘이 칭의를 사회정의에 과도하게 일치하려 한다면, 존 파이퍼의 경우는 칭의와 사회정의 개념을 다른 어떤 것으로 구분한다. 보수적 관점에서 칭의는 칭의론으로만 존재하며, 칭의 이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순종하는 삶으로서의 성화를 다룬다. 성화 문제로 정의를 축소하는 것이 안타깝다.

나가면서

개인적으로 평점을 준다면 10점 만점에 9.5점을 주고 싶은 책이다.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오래전 박영선 목사는 <구원 그 이후>(새순출판사, 1992)를 출간한 적이 있다. 총신대학교를 나왔지만 예장합신에서 목회했던 박영선 목사의 신학은 지극한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실천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질책한다.

이런 우려와 걱정으로 이 책은 보수적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사회정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 삶은 협소한 개인의 거룩한(?) 삶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가 동반해야 하며, 단순한 약자 개념이 아닌 법정적 공의와 개인적 정의가 동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하며 필요한 책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약점을 굳이 지적한다면, 논문 발제자들이 느헤미야 연구원들의 주된 주장에 몰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교개혁 시대와 청교도 시대에서 사회 개혁을 이루었던 시민 정신과 칼빈의 소명론에서 발견되는 근대적 사회 개혁 문제에 대한 논의는 희박하다. 다행히 정승훈이 '종교개혁 칭의론적·사회경제적 해석'에서 언급해 주었다. 종종 보수적 칭의론자들을 관념적으로 한정하려는 의도는 옳지 않아 보인다.

필자의 눈을 사로잡았던 김옥순의 '칭의론과 디아코니아'는 종교개혁 시대에 있었던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다룬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김옥순은 그러한 구제가 "칭의 신앙에 기초한 것"(563쪽)이라고 언급한다. 일회적 구제가 아닌 사회적 운동으로 교회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이는 현대 한국교회가 교훈 삼아야 할 본이 아닐까 싶다. 사회 속에서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시대적 요청에 부흥하는 교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보화와 같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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