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의 책 <배제와 포용>(IVP)에서 포옹의 드라마를 제안합니다. 포옹의 드라마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는 방식이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이상적인 방식을, 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설명한 것입니다. 드라마는 '팔 벌리기, 기다리기, 팔 모으기, 다시 벌리기'라는 네 단계로 구성됩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네 단계를 빠짐없이 거쳐야 하며, 단계적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제1막. 팔 벌리기

그가 없이는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너 없이는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팔을 벌립니다. 이리 오라고 손을 내미는 몸짓입니다. 팔을 벌렸다는 건, 네가 들어올 공간이 내게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 안기라는 것입니다. 이리 오라는 것입니다.

제2막. 기다리기

팔을 벌려 뻗은 다음, 기다립니다. 안겨야 할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자신 안에 그를 위할 공간을 만들어놓고 그가 자발적으로 오길 기다립니다.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서성거리는 그에게 나에게 안겨야 한다고 강제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그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할 때까지, 그를 보며 기다립니다. 아주 오래, 엄청 기다립니다.

제3막. 팔 모으기

드디어 그가 왔습니다. 그가 어색하게 팔을 내밉니다. 그러자 그를 안습니다. 그를 느끼며, 그를 안습니다. 그에게도 내가 느껴지도록 그를 안습니다. 팔로 너무 꽉 안아서 그를 무너뜨려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게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보면서 변합니다. 그만 변하는 게 아닙니다. 나도 변합니다. 그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생각을 알고 나니, 내가 변합니다. 또한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 나의 기다림을 알고 나니, 그가 변합니다. 변화란 강요하고 강제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제4막. 다시 팔 벌리기

마지막 단계는 다시 팔을 벌립니다. 그가 그로서 다시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가 '우리' 속으로 사라져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대로 다시 서도록, 나는 나대로 다시 서도록 그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놓아준다고 해서, 그가 포옹하기 이전의 그로 돌아가진 않습니다. 그에겐 나의 흔적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겐 그의 흔적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그로 인해서 이전과는 다른 포옹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들면 별것 아닌 것 같은 비유가 감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몇 해를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고 마실 법한데, 주님은 그때마다 기다림의 자세를 다시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결코 겁박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당장 안 오면, 너한테 불행한 일이 닥칠 거야."

"내가 한 번 호되게 칠 거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멋대로 살아서 주님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를 팔 벌리고 서서 기다리셨습니다.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자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그분 안에 없는 우리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그분께로 돌아가지 않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1-22)

그러다 우리가 그분 품에 안겼을 때, 그분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안으셨습니다. 더럽다 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내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라고 하시며, 우리를 안으셨습니다. 힘주어 안으셨지만, 숨 막히게 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느낄 만큼 안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겼을 때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그분에게 안길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염치없는 자, 주님 앞에서 배신을 일삼던 자가 주님께 안겼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나면, 주님은 다시 팔을 푸십니다. 나를 나 되게 하셔야 하니까. 우리를 우리 되게 하셔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분은 우리를 그분과 떨어질 수 없는 우리 자신으로 변하게 하시더니, 이제 우리더러 우리답게 살라 하시며 팔을 푸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그래서 볼프의 '포옹의 드라마'가 좋았습니다. 이 관계의 원리가, 사람을 대하는 주님의 방식을 보여 줘서 좋았습니다. 우리를 강제하지도, 우리를 위협하지도 않으면서도,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며, 또 우리를 세상에서 그분에게 안긴 자로 살게 하는 그분의 방식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생각할수록 참 순진하고 이상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품으신 이상, 우리도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옹의 드라마가 그리스도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사랑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환대의 방식, 그러니까 바로 십자가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문화선교연구원 웹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문화선교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원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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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롱 / 소망교회 목사, 문화선교연구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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