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캐서린 켈러의 시각으로 한국 여성신학 돌아보기

Intercarnations and Transfeminism: Reflecting on Korean Feminist Theology

최순양   기사승인 2017.10.29  17:58:01

아래의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ad42

10월 24일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강좌가 열렸다. 이 강좌는 한·미 연합 국제 컨퍼런스의 일환이며, 박지은·최순양·이은경·신익상·박일준 교수와 드류대학교(Drew Univ.)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가 진행한 공동 연구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이 자리에서 캐서린 켈러 교수와 최순양(이화여대)·박일준(감신대) 교수가 강의했고, 이창호 교수(장신대)가 논평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날 강연들 전문을 4차례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아래는 최순양 교수의 발표문이다. 최순양 교수는 'Intercarnations and Transfeminism: Reflecting on Korean Feminist Theology'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 편집자 주


이 글에서는 <On the Mystery>와 <Face of the Deep>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캐서린 켈러의 사상을 간단하게 생각해 보고 새롭게 출간된 <Intercarnations>에서 더 진화되고 발전된 논의가 무엇인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국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캐서린 켈러의 신학을 근거로 더 발전된 논의가 나올 수 있는지 여성신학의 현주소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끝부분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1. 테홈(Tehom)과 '깊음으로부터의 창조'

캐서린 켈러의 '깊음으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the deep)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지구와 존재를 보다 더 세밀하고 자상하게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 한 번에 유일회적으로 끝난 창조가 아니라,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이기 때문이다.1) 일정 시간 동안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시작하며, 하나님 혼자서 하는 창조가 아니라, 여러 존재들의 얽힘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창조이다. 켈러가 주목하는 주요한 개념은 바로 깊음, 혼돈, 그리고 창조이다. 깊음과 혼돈에서는 창조의 행위가 늘 선두에 있고, 진행 중이며, 열려 있다. 그리고 이 깊음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깊음이다. 하느님의 깊음(depth of God)은 하나님 자신도 태어나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탄생시킨다.2) 창조되는 것들은 하나님 바깥에 있지 않고, 하나님도 되어지는 것들의 바깥에 있지 않다. 창조되어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도 모든 존재 안에 있다. 마치 나무와 열매의 관계처럼, 하나님과 창조되는 존재들은 연결되어 있고, 공존하여 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낯선 매혹자(strange attractor)"이다. 끊임없이 묶여진 공간에서 움직이지만, 같은 곳을 지나지는 않는다. 이 매혹자는 다면적이면서, 무한한 공간 속에 존재한다.3) 모든 존재와 닿아 있지만, 고립적이고 지배적인 법칙이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의 활동은 관계 그 자체-느끼고, 느껴지는-에 있다. 다른 존재의 되어 감을 가능하게 하지만, 다른 존재가 되어 가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스스로도 되어 가기 때문이다.4) 하나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완벽히 파악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되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신비이기 때문이다.5)

전통 신학의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은 창조물과 철저하게 분리되고, 창조주는 늘 피조물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켈러는 '깊음으로부터의 창조'를 통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간극을 허물고, 그 둘 사이의 상호성을 강조한다. '깊음으로부터의 창조'에서 강조하는 개념은 형태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 근원이 될 수 있는 "테홈(tehom)"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테홈은 어쩌면 하나님(God) 이전의 하나님(Godhead)의 개념에 가깝다. 테홈으로부터의 창조는 늘 선과 밝음만 있지는 않다. 성공할 가능성과 실패할 가능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 선과 악, 성공과 실패, 시작과 끝이 대조되고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가능성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깊음으로부터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모든 되어 감 속에 함께 계시며, 궁극적인 선을 향해 나아가신다. 그러나 실패하고, 좌절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패와 고난도 다시 사용되어지고, 무언가를 배움으로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선과 악, 실패와 성공, 밝음과 어두움이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기회와 가능성으로 다양하게 얽히고설키게 되는 것이다.

2. Intercarnations and Transfeminism

페미니스트 신학의 신학적 시도 중에 가부장적 남성 하나님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여성' 하나님 혹은 여성적 하나님을 그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에 대해 캐서린 켈러는 명백하게 그러한 여성신학의 시도는 여전히 인간 중심적 가부장적 신학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제도적으로 수용할 만하고, 남성 신학보다 더 융통성이 있다고 해도, 확장된 다양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러한 페미니스트 신학의 시도는 여전히 명백하게 남성적 신의 범주에 머문다. '그'로 알려져 있는 남성적 신의 자리에 보다 더 양육적이고, 사랑이 충만하고, 풍족한 수용성을 가진 '그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기존의 담론이 고수하고 있는 '성'과 '인종' 등의 카테고리를 넘어서지 않는 한 그녀는 여전히 남성-인간 중심적 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 신학이 추구하는 이원론적 '차이'(남과 여, 인간과 동물, 이성과 감성 등등)는 헤겔 철학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이러한 범주 안에서 추구되는 '여성화'의 시도는 가부장적 미러링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성의 영역이라고 이해되는 이원론의 한 끝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의 영역이라고 이해되는 저쪽 끝으로 당도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신학에 있어서 가부장제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만큼이나 위험하다. 우리의 언어대로 알고 있는 그런 '여성적인' 신의 귀환을 꿈꾼다는 것은 성적으로, 신학적으로, 문법적으로 해방적일까?6) '젠더' 담론에 대한 보다 더 개방적이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면 즉, 기존의 이원론적 젠더 담론을 문제시하면서, 더 복잡하게 만들고, 교차적으로 관계적인 시도를 한다면, 생명의 범위를 인간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전 생명체를 포함하는 만큼 개방적이 될 수 있다면, 페미니스트 신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더 값진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그녀/그것'이라고 불리었던 이름들을(정해진 정체성에 국한되어 이해되어 온) 극복하려는 창조적 노력들을 수십 년 동안 한 결과로 맞이하는 '오실 하나님'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을 새롭게 하시고 축복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셔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아직도 잘 계획된 모더니즘적 한계 속에 머무르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계속 신학적으로 이야기할 뿐이고, 그러한 하나님은 그야말로 우리에게 반전처럼 기쁜 소식처럼 주어지는 그런 '선물'로서의 하나님은 되지 못할 것이다.

페미니스트 신학이야말로 언어의 한계에 대한 수많은 도전과 비판을 해 온 신학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에게 붙여지는 '이름들'을 바꾸어 오고자 시도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대신에 '그녀'로 대치하는 것은 아직도 인간 중심적 신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페미니스트 신학이 추구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도래는 여성의 리더십을 위해 전지전능한 남성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여성 하나님으로 대체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메리 델리) '광야의 자매들'(흑인 여성 신학 돌로레스 윌리암스) 그리고 소피아 성령과 소피아 예수(엘리자베스 존슨) 등의 메타포들은 신학적 긍정의 언어와 부정의 언어를 넘나들면서 우리의 하나님 이름을 다양하게 만드는 이미지들이었다.7)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동시에 더 근본적으로 '포용력 있고' 다양성을 담는 '불가능으로서의'(impossible) 하나님을 상상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

캐서린 켈러는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신학적 무신론의 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그녀/그것'이라고 하는 명칭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눈을 더 높게 떠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이 표상하는 그 이름들이 보다 더 다양하고 풍성한 생명체를 상징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켈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부정성'으로 해체하면서 동시에 다양화하기를 시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지향하는 여성학의 방향이 이미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신학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페미니즘과 구별되는 '트렌스페미니즘'이 캐서린 켈러가 지향하는 바인 바, 이는 '페미니즘 이후'를 의미하기도 하고, 페미니즘을 넘어섬을 뜻한다. 즉, 페미니즘이 '본질적' 정체성을 정해 두고 반-남성적이며 고정적인 여성을 상정했다면, 트렌스페미니즘은 여성을 그저 다양한 '인간' 중의 하나로 보려고 한다(여성이라고 하는 범주만으로 여성을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트렌스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그 역사 속에서 정통 가부장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조차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정통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는 것을 지적한다.8)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여성(신)학은 소수에 의해 정해진 진리와 담론에 문제 제기하면서 고정화되고 화석화된 담론들을 깨트리는 작업들을 해 왔다. 그러나 그 시도 속에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닫혀진' 진리를 만들려고 무엇인가를 향해 '지향'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주디스 버틀러 이후 '젠더'라는 개념은 인종, 경제적 계급, 성적 지향성 등등에 의해 다양하게 분화된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고,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공통적으로 묶어 낼 수 있는 '여성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켈러는 트렌스페미니즘은 2세대 페미니즘의 정체성 정책을 넘어서 쉽게 이름 지을 수 없는 궁극적인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여성이라고 하는 존재들의 정체성만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신학의 '말할 수 없음'의 개념을 덧입혀 존재의 심연-존재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다-으로 정체성을 확장시킨다고 할 수 있다. 세 가지의 특징이 켈러가 소개하는 트렌스페미니즘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게 해 주는데, 그것은 얽힘(entaglement), 무지(unknowing) 그리고 다차원성(multiplicity)이다.9)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가 그녀의 시 '진리는 '다양체'이다'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미 알려져 있고, 잘 교육된 총괄적인 '사랑'이란 것은 사실 '닫혀진'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계속해서 열려야 하고, 마감과 맞춤표를 하지 않는 것이다. 에밀리는 맞춤표 대신 대시를 사용하면서 행과 구절을 대시로 끝내는 데, 이것은 '닫혀짐'에 대한 저항이다.10)

캐서린 켈러는 트렌스페미니즘의 '열려 있음'을 부정신학적 얽혀짐(entanglement)이라고 표현하는 데, 이는 우리와 가까운 존재에 대해 최선을 다해 알려고 할 때조차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늘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진리는 늘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새롭게 하며 신선한 말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도, 그리고 페미니즘도 계속되는 얽혀짐에 열려 있어야 한다. 다양체인 전체 속에 존재하면서 우리는 오로지 계속해서 우리를 개방해야만 할 뿐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많은 것들이 여전히 각각으로 진리이기 때문이다.11) 그런 면에서 캐서린 켈러는 젠더의 부정성(aphophasis)를 제안한다. 신비주의의 가르침처럼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타자성에 대해 열려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은 새로운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 놓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더 배우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속되는 과정은 다양성(multiplicity)이라고 하는 원리에 의해서 운용될 수 있다. 어떤 이름에도 안착할 수 없는 것을 많은 이름으로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 사실은 계속되는 부정(aphophasis)인 것이다.12)

이런 의미에서 캐서린 켈러는 성육신(incarnation)의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다양화시킨다. 그 자신의 용어로 육체적 부정성(carnal aphophasis)이라고 명칭하는데, 하나님의 몸은 신비이기 때문에 다양한 생명체의 몸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은 일회적으로 단 한 존재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다양성으로 일어난다. 세계의 모든 육체로 구체화된 신성은 기독교가 아닌 곳에서도, 비종교적 활동 속에서도 생겨날 수 있고, 모든 생명체의 슬픔과 기쁨을 공유한다.13)

3. Reflecting on Korean feminist theology
(한국 여성신학의 상황에서 캐서린 켈러의 신학을 생각해 봄)

먼저 출판된 저서들, <On the mystery>, <Face of the deep> 등에서 캐서린 켈러는 부정성을 통해 신의 이름을 해체시킴으로 특정한 이미지나 명칭에 하나님을 국한시키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 '깊음과 신비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Intercarnations>에서는 부정성에 다양성(multiplicity)과 얽혀짐(entanglement)을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은 다양하기 때문에, 끝이 없고, 여러 생명체들과 공존하기 때문에(동일화될 수 있기 때문에) 신비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제안해 주고 있다. 또한 페미니즘의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다양화시키면서 그 정체성을 부정성으로 만나게 함으로써 여성을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신비'로 승화시키는 부정성(aphophasis)의 미학을 우리에게 선사해 준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캐서린 켈러의 가르침을 통해 '신비이신' 하나님에 매료되면서 신학적 눈을 성장시켰고, 그에 더하여 인간-성적으로, 인종으로, 계급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해도 '신비스러운 존재'로 존중하여야 함을 역설하는 논문을 썼다.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성신학은 캐서린 켈러의 신학적 제안과 함께 생각해 볼 때, 두 가지 면에서 그 한계와 고민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이전까지 교회와 신학을 둘러싼 인간론이 아직까지는 남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남성으로 정형화된 인간을 그 반대급부로 돌려 여성 또한 동등한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해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유일한' 혹은 '최상의' 목적인 것처럼 고정화될 우려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컨대 엘리자베스 존슨의 하나님의 백한 번째 이름(she who is)에서 시도되었던 것처럼 여성적 특징으로 여성의 경험을 소재로 하나님을 상상하고 이름 짓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직은 이에 더하여서 '여성은 특정한 정체성으로 국한될 수 없다'라고 하는 확장된 인식으로 가기에는 미흡한 상황이다. 교회적으로는 남성 우월주의가 너무도 공고하며, 사회에서는 여성 혐오 범죄가 오히려 증가 추세에 있다. 즉, 버틀러나 스피박 식으로 '(그러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여성 정체성에 대한 해체적 시도를 하기에는 아직도 여성에게로 향한 당파성에 더 목말라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여성의 정체성을 확장시켜 다른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한 존재자-가령 장애인 여성, 이주민 여성 성소수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켈러 교수의 트렌스페미니즘에 따르면 다양한 여성들과의 '얽혀짐'(entanglement)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여성 또한 다양한 인간 중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여성이 속한 교단의 방침에 따라(방침을 충실히 따라야 하는 한계 때문에) 여성 또한 '소수자'였고 여전히 소수자인 면이 있음을 잊고 그저 정상적 '여성'만을 교회 안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고, 그것이 여성신학의 목표인 것처럼 제시하는 목소리들이 아직 많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 여성들은 '초심'으로 돌아가 여성신학이 지향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예수님은 약자를 사랑하신다는 신앙에서 출발했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느 특정한 존재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학적 전제를 화두로 내세웠다면, 여성만이 그 약자의 완성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여성신학은 한 때, 다양한 존재자들이 각자의 소리를 잃지 않으면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을 꿈꾸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각주

1)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48
2) Catherine Keller, Face of the Deep, 180
3) Catherine Keller, Face of the Deep, 196
4) Catherine Keller, Face of the Deep, 198
5) Catherine Keller, On the Mystery, 25
6)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17
7)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18
8)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36
9) 같은 곳
10)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37
11)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38~39
12)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41
13) Catherine Keller, Intercarnations, 26

ad47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동영상 기사

default_news_bottom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