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신학과 페미니즘의 대화'라는 주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강좌가 열렸다. 이 강좌는 한·미 연합 국제 컨퍼런스의 일환이며, 박지은·최순양·이은경·신익상·박일준 교수와 드류대학교(Drew Univ.)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 교수가 진행한 공동 연구의 후속 프로그램이다. 이 자리에서 캐서린 켈러 교수와 최순양(이화여대)·박일준(감신대) 교수가 강의했고, 이창호 교수(장신대)가 논평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날 강연들 전문을 4차례에 걸쳐 게재하고자 한다. 아래는 캐서린 켈러 교수의 강연문(번역: 안종희)이다. 켈러 교수는 'Entangled Hope : Transfeminist Theological Im/possibility'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 편집자 주

강연 중인 캐서린 켈러 교수. 뉴스앤조이 최유리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열린 이 세미나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이 세미나를 통해 단순히 몇 가지 유용한 생각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 현실, 세계 속에서 우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entangled)1)의식, 느낌을 부각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것이 희망적인 느낌이기를 희망한다.

이 말은 다소 순환적으로 들린다―희망을 희망하다니! 아마도 이 말은 현재 순간과 그것이 지구적으로 순환하며 얽혀 있음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오랫동안 희망을 말하는 습벽의 방식이 있다; 바울 이래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희망으로부터 분리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에 매우 도전적인 순간이다. 그렇지 않은가.

한 공상과학 작가는 <뉴욕타임스>에 '허리케인, 홍수, 화재 이 모든 것에 직면하여 이것이 종말의 때를 위한 총리허설이라고 당신이 생각한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내용을 기고했다. 미국에서는 종말이 우익 근본주의 기독교인과 동일시되기 때문에 그것은 비종교적인 역설이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인도 지금의 극단적인 지구 상황을 간단히 무시할 수 없다. 핵, 생태, 정치 분야의 극단적 상황… 여기에서 우리, 특히 여러분이 핵무기에 의한 대량 살상의 위협에 갑자기 다시 직면하게 된 상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희망이 여기서 시험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지구는 지구 온난화라는 분명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지구 경제가 탄소 연료 시스템을 중단하지 않으면 모든 미래 세대가 불운한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지금 파리 기후 회담이 제공하는 현실적인 희망이 짓밟히고(trumped) 있다[여기에 사용된 동사 짓밟다(trump)는 이제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의 해로운 결합에 대한 적대감을 여러분에게 굳이 상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를 짓밟고 유럽의 일부 지역을 위협하는 반이민 백인 국수주의는 그 스스로 국제적인 네오파시즘이 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종말을 위한 총리허설에서 이민자 반대를 천명한 백인 국수주의는 7개의 머리를 가진 짐승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위험한 결합을 구성한다―진정으로 우리의 희망은 위태로운 세계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다(entangled)!

따라서 아프리카비관론자들(Afropessimists)처럼 급진적인 사상가들조차도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불의를 폭로하는데 헌신한 미구엘 데 라 토레스(Miguel de la Toress)와 같은 신학자도 흔들리고 있다. 그는 <절망 끌어안기(Embracing Hopelessness)>라는 책을 최근 출간했다. 그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그는 희망이 그저 기분 전환, 실망, 초자연주의적 거짓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지점까지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은 더 나은 것을 향해 일시적인 변화를 만들기 위해 폭발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의 구절로 이 책을 시작한다.

나는 이와 같은 결정적인 절망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그렇지 않으면 희망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진실을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희망은 쉽게 단순한 낙관주의로 퇴색한다. 그것은 더 행복한 느낌을 갖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내가 극심하게 파괴된 동아프리카 지역 출신 신학자 에마뉘엘 카통굴레(Emmanuel Katongole)를 만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나는 최근 그의 책을 가르쳤다―<항의로서 슬픔: 아프리카를 위한 희망의 신학(Lament as Protest: a Theology of Hope for Africa)>. 그는 콩고, 우간다, 르완다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지역사회에서 희망이 계속 존속하는 이유를 질문하면서 슬픔의 시편들, 그리고 불의한 고난 앞에서 큰 비판과 분노를 표현한 다른 성서 본문을 연구한다. 희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슬퍼하는 것임을 그는 깨닫는다. 그것이 참으로 희망의 씨앗인 것이다.

희망의 성서적 의미에 관해 생각하면서 나는 오랜 친구이자 유대인 페미니스트 성서학자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지난 주 욥기 구절을 내게 보내주었다. 이 구절은 욥의 깊은 고난과 슬픔,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욥에게는 모든 선한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 구절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유는 이미 이 어두운 시편이 무언가를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는 희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tiqva―끈이나 실과 같은 것을 이용해 무엇을 짜는 것을 의미한다―를 사용하고 있다. 희망한다는 것은 한곳으로 모으는 것 또는 짜는 것이다. 아마도 그가 마침내 계시를 통해 엄청난 우주적 소용돌이 속에서 창조 세계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보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은 욥이 솔직하게 자신의 절망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가능성이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따라서 여호와(YHWH)에게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함께 짜여 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 세계와 함께.

그래서 희망은 얽힘과 거의 동의어다! 나는 2016년에 출간한 <불가능의 구름(Cloud of the Impossible)>에서 얽힘(entanglement)이라는 은유를 사용했는데, 이는 양자역학에서 빌려 온 용어로서, 공간과 시간의 모든 간격을 넘어 전자가 동시적으로 얽혀 있다는 개념을 가리킨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먼 거리에서 일어나는 유령 같은 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불렀다―이는 얽혀 있는 두 입자가 서로를 상호 보완하는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그것이 물리학을 신비하고 비이성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을 강력하게 입증한다. 즉 일단 연결되면, 두 개의 미세 우주 입자는 영원히 연결 상태를 유지하며, 지구, 태양계 그리고 은하 어디에서도 서로 동시적으로 반응한다. 창조 세계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하나로 거대하게 엮인 작품이다. 그러나 이 엮임에 어떤 희망적인 것이 있는가? 우리는 지구를 파멸시키는 백인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핵 무력과 얽혀 있다. 단지 하나님 혹은 지역 공동체와 얽혀 있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일을 잠시 약술함으로써, 우리의 대화를 다시금 새로운 틀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이렇게 젠더(gender)를 성찰하고, 내가 트랜스페미니즘(transfeminism)이라 부르는 것을 숙고해 보고자 한다. 트랜스페미니즘은 포스트페미니즘(postfeminism)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우리가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 더 이상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는 피상적인 낙관론이다. 이것은 희망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세계의 정직한 상호 엮임(interweave)이 될 수 없다.

상호 엮임(interweaving), 꼬임(intertwining), 연결(connection), 상호 의존성(interdependence),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얽힘(entanglement)의 은유들이 항상 나의 사고를 이끌어 왔다. 나는 오늘 이런 관계성에 대한 직관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우주론적으로 발전해 왔는지, 그리고—신학적 과정을 공정하는—그 과정 속에서 어떻게 내가 페미니스트적 사고에 대한 근거를 발견하게 되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생각은 수십 년 전 떠오른 생각이지만, 이 관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오히려 더 깊고, 더 어둡고, 더 애매해졌고, 그리고 역시 보다 더 얽혀졌다.

페미니스트 기독교인들은 젠더들 간의 정의로운 관계에 대한 헌신과 그에 따라서 젠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줌으로써, 내가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만일 하나님이 남자라면, 남자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메리 데일리(Mary Daly)는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교회를 단념했지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교회에 계속 남아 있다. 1970년대 즈음 조만간 신학계에서도 여성 현자들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나의 바람을 지지하는 남성 현자들2)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가장 지혜로운 현자는 존 캅(John Cobb)이었다(그는 94세에도 심지어 더 현명해졌다). 그가 쓴 책 <다원주의 시대의 그리스도(Christ in a Pluralistic Age)>를 읽으면서, 나도 기독교 신학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창조적인 변화로서 이해한다. 이를테면 우주적 말씀(logos)인 그리스도는 캅에게 예를 들면 불교와 더 깊이 교류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적 배타주의가 아니라 관계적 다원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여성인 나에게는 참된 내가 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과정신학과 1920년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 포함된 과정신학의 철학적 배경을 공부하러 갔다. 과정신학은 나의 페미니즘을 발전시키는 틀을 제공했다.

내가 아직도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정사상(process thought)은 우주를 깊은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단순히 외부적으로만 연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일부이다. 따라서 공기 분자와 빛의 광자는 우리의 일부가 된다. 모든 파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없는 창조 과정 속에 함께 존재한다. 우리 모두는 인간―남성, 여성, 또는 제3의 성―일뿐만 아니라 분자, 광자, 고양이, 개이며 창조적 변화에 함께 부름 받는다. 우리는 이 함께함을 짓밟고(trump) 이 창조 과정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것을 초월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큰 우주적 스프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다르게 되어 가고(becoming differently) 있다. 그러나 서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양자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을 숙고하면서 그 당시만 해도 아주 새로운 내용을 말했다. "모든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항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 여기서 '어떤 의미에서'라는 말은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in potentiality)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현실적으로는(in actuality)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어떤 곳은 되어 감(becoming)의 순간이고 잠재성이 실현되는 순간이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우주는 멀리 떨어져 있거나 무의미한 상태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안에 있다. 양자 얽힘은 당시에 알려진 개념이 아니었지만, (화이트헤드의 사유 속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공명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과정사상 안에서 실존적, 사회적 힘을 입기 시작한다. 우주의 사건들을 상호 의존적인 것으로 보는 이 관점은 수세기 동안의 서구 근대성이 제시한 표준적인 상식―독립된 개별 주체가 분리된 대상들의 환경을 관장한다는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근대의 상식은 뉴턴 물리학의 분리된 관찰자가 죽어 있는 수동적이고 불투명한 물질의 분리된 원자 조각으로 이루어진 우주를 관찰하는 것이다. 근대의 상식은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의 주체이다. 이것은 바로 서구의 표준적인 자아(ego)상으로서, 신비(mystery)를 지배(mastery)를 통해 극복하려는 서구의 주권 개념을 통해 강화되었다. 이 자아상이 근대 서구의 식민지 투기사업들을 무장시켰고, 스스로를 기독교적 상상으로 포장했으며, 또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라는 문구를 새긴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물론 누구든지 이 모자를 쓸 수 있지만 오로지 하나의 섹스(sex), 하나의 젠더(gender)만이 이 주권적 에고, 분리된 자아를 올바로 대표할 수 있다(고 서구의 상식은 보았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항상 하나의 딜레마와 맞섰다. 즉 남성과 동등하게 되거나 해방되기 위해 이러한 남성적 이상과 더 닮고, 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억압했던 가부장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내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The Second Sex)>과 함께 나의 책에서 씨름했던 내용이었다. 이것은 여성을 제1의 성(the first sex)의 이미지로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것 같았다. 유일한 다른 대안은 여성적이고 의존적인 상태로 머무르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종의 모든 힘든 관계의 일들을 감당하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는 우리의 창조성이 결코 피어나지 못하는 것―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남자와 여자 모두가 상상되었음을 상기하자. 곧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부장의 형상대로 만들지 않으면서 자유와 목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은 치열했고 아직도 그렇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래서 나는 전일적인 상호 의존성의 우주론의 도움을 받아 제3의 길을 선택했다: 여자로서 우리는 독립적(independent)이 됨으로서 의존성(dependence)을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성(interdependence)의 역량을 북돋아 의존성을 탈피한다(와우, 이런 접두어가 한국어로 제대로 전달될지 모르겠네요!) 낡은 자아는 여전히 독립 기념일을 축하한다: 우리는 상호 의존성의 날을 축하하기 원한다.

물론 생태학적 함의들은 끝이 없다. 1980년대 로즈마리 래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와 더불어, 이미 페미니스트 신학은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과 분리 불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 저서 <부수어진 망으로부터(From a Broken Web)―엮음(weaving)>에 관한 모든 심상들은 이미 여기에 다 있다―는 우리의 관계적 상호 의존성이 인격들 간에, 사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생태 우주적으로 섬세하게 엮어진 거미줄의 망(즉 부숴진 망)을 따라갔다. 이 책에서 나는 남성적인 것으로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분리된 자아와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용해 가능한 자아―녹아서 사라지는 자아의 결여―모두를 반박했다; 그리고 연결된 자아(connective self)를 제안했다. 우리 모두는 다르게 펼쳐진다. 우리 자신의 의미는 항상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젠더들 간의 단순한 경계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성(sex)와 젠더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과정(the preocess)은 억압과 투쟁과 변화의 장구한 역사들 속에 얽혀 있다. 이 역사들은 우리 각자의 정체성의 일부이다. 역사는 우리 각자의 관점으로부터 얽혀 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나 자신에게도 다르게 얽혀진다. 우리가 갈등하는 관계들의 혼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새롭게 구성해 내느냐에 따라 말이다. 나는 당신과 다르다; 나는 나의 과거 자아들과도 다르다. 그러나 이것들은 관계 속에 있는 차이들이다.

차이들은 다름 아닌 관계성이다. A와 B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그들 사이에 차이도 없다.

여기서 잠깐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교수 시절 초창기에 어떤 한국 학생의 이의 제기를 여러 차례 받았다. 그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이었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들이 이미 지나치게 많은 관계, 지나치게 많은 공동체와 헌신과 연결 속에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구 사회로의 여행은 이런 모든 압박과 의무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안도감, 그리고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그래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숨 쉴 공간—진정으로 다르게 살아갈 공간—을 약속했다. 아마 관계적 의무에 대한 유교적인 압박감이 기독교의 공동체적 헌신의 개념과 암묵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나는 그런 우려를 존중한다―그럼에도 내가 보기에 그것은 이를테면 너무 지나친 미국식 개인주의의 카우보이적 자본주의 문제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단절과 분리가 아니라 서로의 큰 차이를 존중하는 폭넓은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상당히 많은 한국 유학생들과 연구해 왔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자신의 다양한 관점으로 이러한 에코페미니스 과정 신학의 내용을 통합했다.

나의 제자인 한국계 미국인 앤 조(Anne Joh)는 이 문제를 자신의 책 <십자가의 마음(The Heart of the Cross)>의 주제로 삼아 정(情)과 관련된 문제를 탐구했다. 그녀는 이것을 리타 나카시마 브룩(Lita Nakashima Brock)이 에르스적 힘을 페미니스트적 의미로 전개한 것과 비유했다―즉 관계들 위에 부여되는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 그리고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성스러운 사랑의 힘—진정으로 성육신적인 힘 말이다. 조는 일반적으로 개인주의 문화에서 관계성의 정이 일종의 끈질긴 달라붙음으로 여겨지고, 그래서 자아의 분리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녀는 한국적 정(情) 개념을 통해, 한국인들의 생명력을 관통해 왔던 보편적인 개념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수많은 한(恨)을 겪어 왔던 한국인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다. 그녀가 제안하는 정(情)의 기독론은 해방신학, 여성신학, 탈식민지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조의 정(情) 기독론은 "생명의 연결된 관계상으로부터 그리고 그 관계성 사이에서 일어난다. 정(情)의 기독론에서 십자가는 한의 두려움과, 자유와 온전함을 깊이 지향하는 정(情)의 힘 모두를 의미한다."[128] 이런 기독론은 창조적 변화로서의 그리스도라는 캅의 기독론과 의미 있는 접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조는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모든 것의 중심에서 끈질기지만 생명력 있는 사랑의 관계를 더 강조한다.

보다 최근 지아 소피아 오(Jea Sopia Oh)가 자신의 <탈식민지 생명 신학(Postcolonial Theology of Life)>에서 살아 있음 혹은 살림(salim) 개념을 탁월하게 발전시켰다. 이것은 주로 김지하의 시와 철학에 대한 묵상으로, 널리 알려졌다시피 김지하의 사상은 교도소 창에 피어난 들꽃을 보고 터져 나온 것이다. 살림은 더 이상 어떤 감옥에도 갇히지 않고 어떤 죽음에도 위협당하지 않는다. 오(Oh)는 김지하가 1989년 환경운동을 창립한 놀라운 살림 운동을 논의한다. 그녀는 여성의 해방, 평등, 은사에 대해 김지하가 보여준 강력한 헌신을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우연히 연결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연결성이 여성운동을 젠더의 정체성 문제를 훨씬 더 뛰어넘는 운동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섬세한 관계들로 구성된 관계의 전체 우주 속에서 사람으로서 서로 얽혀 있으며, 그 관계들의 불균형과 잠재성에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적 우주관에는 우리에게 책임을 부여하고, 창조적이고 변혁적인 살림으로 응답하라고 요청하는 신적인 지혜가 있다. 그때 여성으로서 우리가 당면한 이슈들은 상황에 따라 그 비중과 의미가 다르지만 서로 연결된 다른 모든 긴급한 문제들―경제, 생태, 민족, 계급, 종교적 차이, 인종, 전쟁 대 평화―과 연결시킨다.

이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주의 사상가들이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이유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이 사회운동의 균열된 틈 속에 빠져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젠더가 인종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를 거부했다. 인종이 젠더보다 더 중요하다거나 계급보다 더 중요하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억압의 복잡함―따라서 문제와 해결책을 서로 교차할 필요성―에 대해 주장했다. 아시아 여성들도 교차성을 분명히 표현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3)

만일 내가 트랜스페미니즘에 대해 말한다면, 실현할 가치가 있는 모든 페미니즘은 항상 여성성(feminity)을 초월하고, 여성운동(women's movement)을 초월하고, 어떤 하나의 이슈나 관점, 상황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은 경계를 넘나들지만―트랜스(trans)―페미니스트 역사와 단절되지 않는다(이 페미니즘의 역사는 때로 한 가지 이슈에 매우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이동하는 페미니즘(feminism in transit), 자신의 한계를 위반하여 넘어서는 페미니즘, 즉 초월하는 페미니즘이지만 이는 위로 내려오는 힘에 의해 초월하거나 혹은 단절을 의미하는 초월이 아니다; 내가 초월을 말한다면, 그것은 관통해서 넘어간다는 뜻을 담지한 라틴어 본래의 의미에서의 초월이다―그러나 이것은 앞선 단계의 페미니즘들을 넘어간다는 의미이지, 결코 페미니즘의 과제들이 완료되었다고 생각하는 포스트페미니즘(posfeminism)이 아니다. 따라서 트랜스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교차성의 작업이다.

이 교차성 속에서 모든 것이 상호적으로 엮여져 있다(interwoven). 그 엮임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말이다. 억압은 우리 영혼 깊이 파 들어오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아상으로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규범적 이미지들이나 식민지적 우월성 혹은 신식민지적 우월성의 규범들을 내면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이 거짓된 규범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푸코가 분명히 밝혔듯이, 권력은 근원적으로 외부에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내재화된 훈육하는 권력에 의해 행사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요점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엮는 것이다—마음으로 온전히 말이다(mindfully). 즉 의식적으로 말이다. 관계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중립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인식은 '해방하는 선'(a liberating good)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약함을 강함으로 만들 수 있다―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언급한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부른 사람은 상호 관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러 많은 가지들은 하나의 거대한 포도나무에서 힘의 근원을 찾는다. 우리 실존의 타래들은 상호적 엮임(interweaving)의 우주적 과정 속에 현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어디로 가는지 안다! 교차성은 희망이라는 엮음의 과정을 이름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희망은 우리의 철저한 상호 의존성을 확증한다; 그래서 희망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가능성들을 열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국의 촛불 운동이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를 주창한 운동'(Black Lives Matter movement)이 절망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고립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고난을 나눈다; 그러면 새로운 희망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결말이 행복할 것이라는 어떤 보증도 없다; 그러나 창조적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혐오, 총기, 폭탄, 장벽들에 대한 지역적 대안을 주장하는 지구적 운동의 가능성, 지구적 평화의 가능성, 지구적 생태 회복의 가능성 말이다. 이것은 나의 오랜 친구 위르겐 몰트만이 "희망의 연대"라고 부른 것이다.

기독교인과 우리의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tikva."(71:5)라고 쓴다. 이것은 어떤 완벽한 미래나 초자연적 보상에 대한 추상이 아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태초에서 종말로 나아가는 직선적인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지금 우리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희망이다―하나님은 씨줄이요, 날줄이며, 직조하는 베틀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모두 함께 서로 엮여 가는 서로를 발견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모인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주께 있다." 하나님은 위대한 베 짜는 사람(weaver)이다. 희망의 연대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발견한다—그리고 모든 피조 세계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이것은 과정신학이 말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의 의미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뜻의 범신론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 모두 말이다. 우리 지구인들은 아마 하나님에게 큰 사랑과 기쁨과 고난의 원천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전적인 견해처럼 이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인 위에 계신 주님이 아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는 역동적인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하나님의 트랜스페미니즘(divine transfeminism)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하는 신비 속에서 우리 역시 초월하도록 부름받은 존재, 즉 현 상태(status quo)를 돌파하여 넘어서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이것은 내재하는 초월(a transcending within)이다―초월하는 만큼 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서구의 남성적 자아(ego)의 이미지―즉 분리되고 멀리 동떨어져 있고, 위에 있고, 지배적인 어떤 존재로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독재자처럼 창조 세계를 통제하지 않는다—그러나 각 피조물에게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유혹하고, 부르신다―우리는 그것을 얻지 못할 수도 혹은 실현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도하는 만큼, 불가능성은 깨어지기 시작한다—불/가능성으로 말이다. 그래서 가능성 속에(in possibility) 이르게 된다. 우리는 가능성 안에 있게 된다. 15세기 쿠자의 니콜라스(Cusa)는 하나님을 가능성 자체(posse ipsum)라고 불렀다―이 가능성은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 가능성들을 우리를 위해 실현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약속들을 받는다—보장이 아니다. 겸손함과 용기를 가지고, 희망의 살림 속에서—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함께, 얽혀, 엮어 간다, 바로 지금 말이다.

각주

1) 역자 - entanglement는 얽혀있다는 단순한 개념이기 보다는 물리학의 "양자 중첩" 혹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로부터 유래하는 말로서, 분명한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성의 작용이 존재하는 차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켈러는 이 말을 지속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사용함을 유념해야 한다.
2) 역자 – 지혜로운 현자의 이미지는 언제나 노인의 이미지를 담고 있어서, 원문은 현자를 가리킬 때 "older"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말의 의도를 고려해 '현자'로 번역한다.
3) Patricia Hill Collins and Sirma Bilge, Intersectio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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