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 참상은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취재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힌츠페터는 폴 슈나이스 목사(사진 오른쪽)의 요청으로 취재에 임했다. 사진 출처 광주트라우마센터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1980년 5월 광주를 그린 영화 '택시운전사'. 운전사 김사복 씨와 광주 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epter)의 실화를 다룬 영화는 관객 1,217만 명을 동원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어떤 계기로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했을까. 그 배경에는 폴 슈나이스(Paul Schneiss) 목사가 있다. 독일인 슈나이스 목사는 1975~1984년 일본 파송 선교사로 파견됐다. 일본 파송 선교사였지만, 한국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200차례 오가며, 한국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문제 등을 외부로 알렸다. 박정희 정권은 1978년 12월 슈나이스 목사를 홍콩으로 강제 출국하고, 입국 금지 조치하기도 했다.

슈나이스 목사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1980년 5월, 서울에 머물던 아내를 통해 계엄군의 정보를 입수했다. 슈나이스 목사는 당시 독일국영방송(ARD-NDR) 도쿄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광주를 취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9월 뉴스레터에 실린 슈나이스 목사의 특별 기고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

슈나이스 목사 아내는 1980년 5월 16일 혹은 17일 서울에 방문했다. 당시 군용차와 군인 탱크가 서울의 남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내는 한국인 친구를 통해 군이 광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소식을 남편 슈나이스 목사에게 전했고, 슈나이스 목사는 독일국영방송 도쿄특파원에게 취재를 요청했다.

"아내와 아내의 친구를 통해 얻은 이 소식을 나는 도쿄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독일 TV ARD-NDR 기자에게 알려 주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그들을 서울로 보내어 이들이 광주에 가기를 원했고, 기자들의 눈으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도록 재촉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감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 파견에 대해 신속하게 논의하였고, 취재를 가기로 빠르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위르겐 힌츠페터 씨는 취재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가 취재한 영상에는 전두환(주한미군의 지휘 하에)이 보낸 계엄군과 그로 인해 광주시민들에게 닥친 엄청난 재앙이 담겨 있었다."

폴 슈나이스 목사는 2011년 (사)오월어머니집이 시상하는 '오월어머니상'을 수상했다. 슈나이스 목사는 강정해군기지 반대 투쟁, 용산 재개발 참사, 쌍용자동차 노조 탄압 사건 등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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