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 시골서 온 한 남자가 문지기에게 다가와서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카프카, <법 앞에서> 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장 13절)

열린 문, 그러나 지날 수 없는 문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만 그 앞에 버티고 선 힘이 있을 뿐이다.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문지기나, 예수께서 지적하신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2017년 총회에서 동일한 모습을 본다.

흡사 계엄령을 마주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이를 빌미로 헌법이 개정됐다. 무언가 '결정'짓는 행위에는 쾌감이 있다. 단순히 감정에 변화를 줄 뿐만 아니라 국면을 전환하는 요체가 생성되는 쾌감이 있다. 감정을 전환하고, 상황을 타개하도록 만드는 '결정' 행위 이면에는 힘의 역동이 자리한다.

일찍이 나치에 사상으로 부역한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비상사태에는 초법적 결정이 응당 뒤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법의 효력을 정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를 정당화했다. 법은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일시 정지되어 효력을 잠시 잃는 것뿐이다. 굳이 덧붙이자면, 법을 정상화한다는 명목하에 일시 정지시키는 것이다.

개신교 외부를 둘러싼 적들 덕분에 하나님의 온 인류를 향한 환대의 법이 비상사태를 맞아 일시 정지됐다. 문은 열렸으나, 지날 수 없는 문들이 파생됐다. 교회마다 신학교마다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문지기들이 배치됐다. 법을 정상화하기 위한 명목하에 벌어진 일 때문에 누군가는 추방당하게 생겼으며, 누군가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될 판국이 됐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개신교 외부를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외부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건 아닐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만약 후자의 말대로 외부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 개신교라면, 그것은 파시즘과 다르지 않다.

"파시즘은 '부정'의 사고 행동 체계이다. 다른 것들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입증하려 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中)

개신교 외부에 적대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받는 개신교,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받는 천국, 사탄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받는 하나님이라면 신학적으로도 상당히 문제가 있지 않은가. 대중을 공포에 몰아넣어 명맥을 유지하는 파시즘의 논리가 개신교 신학의 줄기는 아니다.

외부의 적들로부터 개신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도리어 교회 내부의 신자들을 향해 겨누는 창끝이 서슬 퍼렇다 못해 서글프다. 결국 외부의 적을 말하기는 했지만, 내부 사람들 중 솎아 낼 이들을 골라내고, 질서를 강력하게 세우는 과정에서 권위를 창출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고대사회에서) 애국심은 경건한 신앙심이었고, 추방은 파문이었다. 개인적인 자유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재산 모두 국가에 예속되었고,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은 의무였으며 권리, 의무, 정의, 애정 등과 같은 개념은 도시의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쿨랑주, <고대 도시> 中)

위와 같이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대사회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추방이 정당했다. 하지만 고대사회의 이러한 도그마를 밀어낸 것은 바로 기독교였다. 이방인에 대한 혐오나 차별 없이 처음부터 기독교는 온 인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혐오와 차별이 의무이던 시대에 경계를 지우는 작업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포교의 정신이 배척의 법을 대체했다. 그게 기독교 정신이다.

개신교 외부의 적들을 언급하며 종교인 과세 이슈조차 인본주의 평등사상이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왜곡된 신본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심급의 결정권자로 하나님을 늘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자기들 스스로가 결정권자가 되어 신의 이름을 도용하는 방식은 정상적인 신본주의가 아니다. 법을 다루는 제헌적 권력이 손에 쥐어지면 그렇게도 착각하기 쉬운 모양이다. 그러나 법과 폭력은 한 끗 차이다. 그 미묘한 경계가 너무도 어렵다. 심급의 결정권자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재 의미를 상실한 개인이나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외부에 있는 타자를 겨누는 힘이 아니다. 외부와 상관없이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근원적인 의미들에 주목해야 한다. 신앙의 바탕이 무언가 자꾸 결정짓고 시선을 외부로 던지게끔 만드는 허공에 떠 있다면, 끄집어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붕 뜨는 감정에 취해 스스로를 심급의 결정권자로 착각하게 된다.

인본주의는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의 온 인류를 향한 환대의 법을 함부로 일시 정지시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입술들 안에 있다. 열린 문 앞에서 문지기를 자처하기보다 각자 문 앞에 서는 일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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