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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포비아에 걸린 한국교회를 위한 치료제

[서평] 김동문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선율)

이원석   기사승인 2017.09.22  17: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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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를 통해 보는 미국의 주적 변화

1994년에 나온 영화 '트루 라이즈(True Lies)'를 좋아한다. 스파이의 임무와 사생활이 절묘하게 교차되는 데에 기존 스파이 액션물과 차별점이 있다(원래 1991년에 나온 프랑스 영화 'La Totale!'을 리메이크한 것이며, 이후 설경구, 문소리, 다니엘 헤니가 등장하는 2013년 영화 '스파이'가 그 설정을 거의 답습하였다).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하고,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열연한 이 액션 코믹물을 최소 10번 이상 봤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지만, 오락적으로 매우 탁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상의 주적(主敵)은 이슬람 테러 조직 크림슨 지하드이다(원작 '라 또딸!'에서는 프랑스 갱단이 악당으로 등장한다). 내가 아는 한, '트루 라이즈'는 이슬람 진영을 주적으로 설정한 첫 번째 블록버스터다(1994년 영화인데도 제작비가 1억 1,500만 불이다). 아랍 지역에서는 상영 불가가 되었고, 미국 내 이슬람 이민자의 거센 반발이 일었다. 시위 군중 탓에 카메론은 경찰에 보호를 요청했다. 영화 한 편에 이런 격한 반응이 일어난 것은 분노와 같은 정념의 확대재생산에 대중문화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1982년 스릴러 영화 '파이어폭스(Firefox)'를 생각해 보라. 영화에 등장하는 비행기 미그-31은 마하6의 속도를 내고,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기에다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첨단 무기이다. 최소 10년을 노력해야 따라잡을 수 있는 이 기술력 앞에서 미국이 채택한 해법은 미그-31을 탈취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미첼 겐트를 투입한다(러시아어로 생각해야 작동시킬 수 있다). 영화는 내내 긴장과 두려움을 고조시켜(감시요원이 주인공을 따라다니고, 정보를 얻고자 조력자를 고문하는 등) 소련에 대한 관객의 부정적 인상을 강화한다. 소련은 강하고, 잔혹한 악의 세력이다.

악의 축 이슬람

미국의 대중문화가 이슬람 혐오 혹은 이슬람 공포를 상품으로 삼았다는 것은 학계와 정계가 구소련의 몰락 이후 새로운 주적을 모색한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게다. 가령 논란이 됐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 and the Remaking of World Order)>은 원래 1993년 당시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기고한 동명의 원고에서 출발한 것이다[원래 이 글은 1992년에 출간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서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한마음사)을 겨냥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보여 주듯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적이 필요하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오세아니아는 영구 전쟁 상태지만, 적성국이 바뀌기도 한다(유라시아든 동아시아든). 냉전 시대에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주적과 전선이 명확했다. 학계‧언론계‧연예계 등 상부구조 전체가 이러한 궤적 위에서 움직였다. 그런데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동서독이 통일되었다. 구소련이 몰락하고, 레닌 동상이 철거되었다.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제 새로운 주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2002년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Axis of evil)' 발언은 이런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란‧이라크‧북한 등을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으로 지목한 것이다(이후 국무차관 존 볼튼이 리비아‧시리아‧쿠바를 악의 축 명단에 추가했다). 그리고 미국의 지배 권력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지배 종교 집단, 즉 미국 교회가 이를 공유하게 되었다. 공산당에서 이슬람으로 신앙의 주적을 변경한 것이다. 주적에 대한 분노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작동하는 정치 제국의 일그러진 내면세계가 보수 체제에 속한 교회 안에 재현된 것이다.

미국 교회가 공적으로 발화하는 방식을 빌리 그레이엄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를 통해 살펴보자. 2015년에 이슬람 테러가 발생했을 때에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중략) 나는 이슬람의 지배 아래 살고 싶지 않다. (중략) 미국은 IS와 싸울 의지가 있는 대통령과 지도자들을 뽑아야 한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리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를 비롯해 가장 오랜 동맹국인 프랑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도 연합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이슬람 공포

한국 정권과 한국교회의 주적은 여전히 북한이다. 해서 국정원 등에서 생산해 낸 북한과 좌파 관련 음모론을 교회에서 SNS와 온라인 등을 통해 부지런히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반면 이슬람은 한국교회만의 주적이다. 여기에서 간극이 발생한다. 이슬람은 한국 지배 세력의 적성 세력이 아닌데, 교회가 난리 법석이다. 왜 그러한가. 답은 간단하다. 미국(의 국가와 교회)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인 것처럼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슬람이 한국 종교 시장의 지분을 가지고 교회와 경쟁할 날이 오려면, 아마 다음 세대까지 기다려야 할 게다.

하지만 현실은 한국교회가 이슬람을 미워하고,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지만, 또한 이슬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는 공포의 자양분이다. 공포는 무지의 공백을 음모론으로 채우고자 한다. 음모론은 무지의 토양 위에 공포를 양분 삼아서 피어나는 잡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의 공백을 파고드는 왜곡된 음모론을 교정하고,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이슬람권 선교사이자 중동 전문가로 활약하는 김동문의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선율)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김동문에 따르면, 이슬람포비아(이슬람에 대한 공포감)를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배제의 사례 중 강도는 가장 높지만 관심은 극히 적은"(14쪽) 사례로 보고 있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 이슬람 혐오에 가장 적극적인 집단은 (중략) 한국 보수 기독교"(14쪽)이다. 그런데 그가 더욱 크게 우려하는 것은 이 혐오의 전 사회적 확산이다. "일부 기독교 안에서만 공유되던 이런 이슬람포비아가 점점 확산되어 한국 사회 전반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면서 우리 사회의 혐오와 배제 문화와 어우러져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15쪽)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 김동문 지음 / 선율 펴냄 / 264쪽 / 1만 5,000원

이슬람을 바로 알자

김동문은 이슬람(종교)과 무슬림(신도)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슬림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격체이며, 이슬람 문명과 역사 속에서 이슬람을 악한 종교라고 매도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15쪽) 한국교회의 내면에 무지와 공포가 너무 커서 이를 수용할 여백이 없다. 그렇기에 그는 우선 1장('보이지 않는 존재의 두려움')에서 진짜 이슬람과 무슬림을 보여 주는 데에 주력하며, 2장('두려움이 커져 혐오로')에서 이슬람의 테러와 이슬람포비아의 실태를 조망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해당하는 3장('이슬람 괴담 팩트 체크')에서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괴담을 해부한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책값을 한다.

저자는 "'노브랜드'의 IS 테러 자금 지원설, 할랄 식품, 이슬람 대학 설립, 무슬림 불법체류자 생활 수칙 등과 관련 주장" 등 여러 이슬람 괴담에 대해 꼼꼼하게 다룬다. 가령 이마트 노브랜드 감자칩 등의 "할랄 식품의 판매 수익이 이슬람의 확장과 테러 자금으로 사용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는 한국이슬람교중앙회(KMF)와 같은 이슬람권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기관에서 인증을 진행하기 때문이다(IS는 정상적인 이슬람 세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조직이다). 또한 문제의 익산 할랄 단지 조성 괴담의 경우, 실제로는 "조성 계획도 없었고, 구체적인 전척 사항도 없었지만, 부풀려진 괴담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119쪽)

4장('혐오와 배제를 넘는 첫걸음')은 이슬람의 현주소를 규명하고, 5장('더불어 살아갈 우리 이웃')은 이슬람과의 조우를 회고하고 그들의 경험을 들려주는 가운데 그들에게 다가가고 이해하기 위한 길을 모색한다. 이슬람을 이웃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페이지마다 역력하다. 그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폭넓게 다양한 접근을 시도한다. 이의 동기는 그만큼 이슬람이 바로 우리와 같은 외부인들로부터 몰이해와 폭력적인 반응을 접한 데에 따른 부채감일 것이다.

"이슬람 세계 밖에서 만난 무슬림들에게서 공통된 아픔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 의식이었다. 단지 무슬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변 누군가로부터 말과 행동으로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크고 작은 트라우마였다." (254쪽)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는 이슬람 종교를 옹호하고 무슬림들의 어떤 행태를 변호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무슬림이 아닌 이들에게 우리의 시선 너머 무슬림 또는 이슬람이 지나온 길을 볼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준다는 소박한 기대를 담았을 뿐이다."(255쪽) 물론 그 구멍창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그곳에도 우리와 다르지 않는 사람과 평범한 일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혐오와 배제를 넘어 포용을 향해 가는 걸음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소망에 공감한다.

한국교회가 (사실상 가상의) 원수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현실을 직면하자. 이슬람에 대한 태도의 반성은 교회 안팎의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태도를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누군가는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의 점검을 통해서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슬람의 경우는 (좌파와 더불어) 교회의 주적으로 상정된다는 점으로 인해 특별히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인식 지평을 활짝 열어 줄 이 소중한 저작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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