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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석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

[서평] 앤터니 티슬턴 <두 지평>(IVP)

이원석   기사승인 2017.09.18  13: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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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평 쓰는 법>(유유)에서 말한 것처럼, 중립적인 서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도록 권유하거나 혹은 읽지 않도록 설득하는 데에 서평의 직접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득과 권유의 대상이 언제나 포괄적이지는 않다. 가령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두 지평>(IVP)은 결코 모든 신자를 위한 책이 아니다. 방대한 분량(758쪽) 이전에 다루는 내용(해석학적 논의)부터가 그렇다. 하나 그럼에도 나는 <두 지평>을 신학생과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서를 바로 알고자 하는 모든 교양 기독교인에게 추천하고 싶다.

교양으로서의 해석학

기독교와 유대교 공동체를 가리켜 말씀의 백성(People of the Word)이라고 한다. 심지어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말한다.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증시(證示)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서를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서를 바르게 읽어야 할 것이다. 성서를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올바른 마음 또한 필요하지만) 적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서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해석학은 성서를 읽기 위해 배워야 할 주요 분야 가운데 하나로서, 해석의 기술(가령 슐라이어마허), 철학(가령 하이데거), 비판(특히 하버마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두 지평>이 주목하는 것은 20세기 독어권의 철학적 해석학과 그 신학적 함의(영어권과 독어권 신약학에 미친 영향)다. 가령 하이데거의 철학적 해석학을 소개하고, 이어서 불트만의 신약학적 전유를 고찰하는 식이다. 가다머와 비트겐슈타인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한다.

<두 지평>의 가장 큰 기여는 비트겐슈타인을 신약 연구의 맥락에 도입한 데에 있다. "내가 아는 한, 신약학자 가운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받아들여 이 통찰을 신약해석학 문제에 적용하려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61쪽) 그러나 성서학과 달리 후기 자유주의자 조지 린드백의 <The Nature of Doctrine>이나 후기 보수주의자 케빈 밴후저의 <교리의 드라마>(부흥과개혁사) 등 이론신학의 경우에서는 그 영향이 광범하게 발견된다.

여하간 상기의 언급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듯이 <두 지평>은 교양서적이 아니라 (박사 학위논문을 펴낸) 전문 서적이다. 실은 권성수 역본(총신대학교출판부)이  이미 1990년에 출간된 바 있으나 널리 읽힌 것 같지는 않다(원서는 1980년에 발간되었다).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제기되지만, 당시에는 이런 노작(勞作)을 번역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외려 당시 신학생들이 얼마나 이 책을 소화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역간된 <두 지평>에는 청출어람이라는 수식이 어울린다. 실로 예전에 비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번역이다. 하지만 이는 예전 번역의 토대 위에서 세운 결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더욱이 그 사이에 엄청난 분량의 해석학 관련 자료가 소개되었다(특히 1994년에 창립된 한국해석학회의 공이 크다). 나아가 이제는 한국교회 독서층 내에 해석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저변 확산으로 인해 <두 지평>을 본격적으로 읽을 준비가 되었다고 본다.

<두 지평 - 성경 해석과 철학적 해석학> / 앤터니 티슬턴 지음 / 박규태 옮김 / IVP 펴냄 / 758쪽 / 3만 5,000원. 사진 제공 IVP

두 지평의 융합

무엇보다 먼저 제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지평(two horizons)'이라는 표현은 <진리와 방법>(문학동네)으로 대표되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가다머의 표현을 사용하면) 두 지평의 상호 교통, 곧 고대 텍스트의 지평과 현대 독자 혹은 청자의 지평 사이에 교통이 일어나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마주한다."(47쪽)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은 융합의 대상이며, 지평의 융합은 해석으로 귀결된다(인용문에 등장하는 이해라는 개념은 인문학적 차원에서의 해석을 지시한다).

이를 위해서 텍스트에 대해서만큼 해석자 "자신의 고유한 지평의 독특함을 알려고 노력"(47쪽)하는 것이 요구된다. "해석자도 텍스트 못지않게 주어진 역사 맥락과 전통 속에 서 있"(40쪽)기 때문이다(이를 가리키는 핵심 개념이 바로 '전前 이해'다). 의미는 결국 맥락에 따른 것이다. 독어권 철학적 해석학의 논의에 근거한 이런 통찰을 단지 "간교한 독일 지성의 산물"(42쪽)쯤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가다머의 지평 융합의 개념은 현대 신학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가령 티슬턴이 언급한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뿐만 아니라 한스 큉 또한 지평 융합 개념(과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개념)에 근거하여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 등 유일신 종교 연구를 개진한다[<현대 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한국신학연구소)에서 그 밑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종교적 상황'이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3부작이 바로 그 결실이다(세 권 모두 국역되었다).

물론 두 지평의 분리는 어디까지나 개념적인 구별이다. 즉 양자의 분리는 작업가설적인 성격을 지닐 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지평은 과거가 없이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 현재와 무관하게 추구해야 할 역사적 지평이 존재할 수 없듯이 현재의 지평 역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해라는 것은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이한 지평들의 상호 융합 과정이다."[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진리와 방법 2>(문학동네), 192쪽]

해석의 역동성

이러한 논의는 헤겔적 맥락에 연원한다. 그렇기에 이 맥락에서 티슬턴은 판넨베르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실 지평 융합이라는 이해 이론은 헤겔의 변증법이라는 터 위에 세운 집이다."(118~119쪽) 변증법은 어원에서 암시되듯이 대화술에 다름 아니다. 상호 간에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진행되는 과정과 그 결과를 지시한다. 그렇기에 가다머에 따르면, 지평 융합은 "문제를 풀어 가는 대화의 수행 형식"(<진리와 방법 2>, 308쪽)이기도 하다.

티슬턴 또한 두 지평의 개념적 구별이 작업가설에 해당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두 지평이 (중략) 여전히 별개로 존재한다"(23쪽)는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다소 혼동을 초래할지도 모르겠다. 헤겔적 관점으로 접근하자면, 과거의 역사는 현재와 매개되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가다머의 지평 융합과 전 이해 개념에 헤겔이 미친 영향을 간과할 수가 없다. 티슬턴도 역시 헤겔과 가다머의 관계를 알고 있다(118쪽).

이러한 논의가 지시하는 바는 해석의 역동성이다. 해석은 지층에서 화석을 발견하는 것처럼 정태적 작업이 아니라 해석자(의 전 이해)가 텍스트와 부단한 대화를 가지는 역동적 작업이다. 성서 해석 또한 마찬가지다. 해석자(가 존재하는 삶의 자리)의 맥락이 텍스트의 지평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바로 그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해석자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티슬턴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에 기초하여 성경 권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곧 성경의 메시지를 삶과 상관없이 깔끔한 포장 용기 안에 꼭꼭 싸 놓은 추상물로 여기지 않고, 삶과 사고의 흐름 속에서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성경의 권위를 경험하는 일은 구체적이고 역동적이다. 그 권위는 주어진 언어 게임 밖에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669~670쪽)

우리가 해석학을 공부해야 할 이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읽는 것은 특정한 시공간 안에서 수행되는 성육신적 작업이다. 그 나름의 맥락 속에서 말씀을 읽을 때에 고유한 해석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니까 성서의 해석이란 곧 말씀의 육화이다. 이를 해석의 다원주의라는 급진적 입장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립하는 성서 자체가 해석자에게 해석의 기준과 경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어떤 의미에서 성서는 성서로 해석된다).

우리는 성서 앞에서 좀 더 겸손해야 한다. 이 기이하고 놀라운 세계 안에 담겨 있는 풍성한 의미망은 일개인에게 단번에 모두 열릴 수가 없다. 그렇기에 성서 해석은 평생에 걸친 끝없는 여정이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성서 해석의 여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삶으로 성서를 읽어 나가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로서 진행되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의 제한된 맥락으로 성서를 완전하게 읽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런 논의가 낯선 것은 해석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두 지평>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굳이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성서학도를 포함한 신학생과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서를 바로 알고자 하는 모든 교양 기독교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 지평>을 읽기 위해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기를 강력하게 권유한다. 성실하게 책의 논의를 따라온다면, 성서를 보는 안목와 태도가 더없이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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