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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상을 성찰하는 것

[인터뷰] 양혜원 작가 독서 여정①

강동석 기자   기사승인 2017.09.03  16: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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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초·중학교 대부분을 영국에서 보냈다.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다. 늦공부이긴 했지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3권의 단행본을 냈고, 60여 권을 번역했다. 전문 번역가로 알려진 양혜원 작가의 이력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듯하지만, 단순히 이력만으로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삶의 내력, 삶의 다양성을 파악할 수 있을까.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부모를 따라 영국에 갔다.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중학교 3학년으로 전학했다. 입시 위주의 교육과 체벌이 존재하는 한국의 학교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개월 사이에 5kg가 빠지고, 그때부터 신경성 위염을 앓게 됐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후로도 영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로 진통을 겪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만 들어가면 끝날 줄 알았는데, 내적 갈등은 여전했다.

결혼한 뒤에도 유산과 사산의 아픔을 겪는 등 곡절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이 급작스럽게 목회자가 되자, '목회자 아내'라는 틀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결국 찾은 길이 여성학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으며, 미국 클레어몬트대학원(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여성학(Women's Studies in Religion)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양혜원 작가는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 1932~) 전문 번역가이기도 하다. 피터슨 책을 10권 넘게 번역했다. 번역 경험을 살려 <유진 피터슨 읽기>(IVP)라는 책도 썼다.

8월 8일, IVP 북카페 산책에서 양혜원 작가를 만나 그의 삶과 독서 여정을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자기 인식', '자기 성찰'이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었다. 2시간 넘게 진행한 인터뷰를 둘로 나누어 싣는다. 그가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영향을 받은 책과 번역 이야기를 먼저 다룬다. 후속 기사에서는 그가 대학원에 들어간 이후의 삶 및 여성학과 종교여성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양혜원 작가의 인생과 독서 여정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평소 어떻게 책을 읽나.

'커버 투 커버'(cover to cover)로 읽는 것을 좋아한다. 한번 펼치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 다 읽어야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속속들이 파악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읽어 주는 게 저자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고. 대학원 공부에 필요한 학술 서적은 다르게 읽었다. 워낙 많은 책을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배경에서 나온 책인지 아니까 서문을 읽고 몇 개 챕터를 훑어본 다음, 중요한 챕터를 골라 정독했다.

습관이 있다면, 연필을 하나 들고 책을 읽는다는 점이다. 항상 밑줄을 긋거나, 옛날 읽었던 책을 연결하는 등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한다. 아이디어가 더 촉발하면 노트에 길게 필기하기도 한다. 펜으로 쓰면 왠지 내 생각이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처럼 느껴져서 연필을 선호한다. 생각이 바뀌어서 지우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생각을 고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독서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나. 독서에 대한 첫 기억이 있다면.

첫 기억은 딱히 없다. 어릴 때 책 읽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는데, 특별히 책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책을 읽고 있으면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시시콜콜 물어보지 않나. 나에게 독서는 어른들 질문을 피하는 방법이자 나를 가리는 도구였던 것 같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있으면 칭찬도 받아서 기분이 좋았다.

친구네 집에 갔을 때 모르는 책이 서가에 꽂혀 있으면 꺼내 읽고는 했다. 항상 책이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책을 읽다 잠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은연중 독서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어릴 때 어떤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 영국에서, 기숙학교에 들어온 두 자매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영문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영국의 유명 아동·청소년 작가 에니드 블라이튼(Enid Blyton, 1897~1968) 작품이었다.

- 살아오면서 인상 깊었던 책을 시기별로 소개한다면.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쓴 <지와 사랑>(Narziß und Goldmund). 대학생 때 읽었다. 당시 고민과 맞물려 파장이 컸다. 사람들은 보통 지성은 차가움, 사랑은 뜨거움으로 놓고, 두 가지가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대비한다. 이 책에도 두 가지를 형상화한 '지의 길'을 걷는 인물과 '사랑의 길'을 걷는 인물이 나온다. 나는 지적인 것과 논리적인 작업을 좋아하는데, 내면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지성과 감성이 어울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갈등하고 분열을 느꼈다. 뜨거운 지성은 없는가, 고민했다.

그 다음에 인상 깊었던 책이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가 쓴 <보바리 부인>이다. 이 책으로 대학 졸업논문을 써서 논문상을 받았다. 이 책도 갈등이 주제다.

나는 원래 사회학과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사회학과 가면 데모한다며 어머니가 말렸다. 차선(次善)으로 선택한 학과가 불문학과였다. 영어는 이미 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언어를 배우고 싶었다. 차선이었는데, 가 보니까 기대에 못 미치더라. 고등학교 1~2학년 때 불어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두 차례 원어 연극을 했다. 그 때문에 대학 가서 공부할 불문학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학과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다. 그때도 학생운동이 한창이라 세미나에서 마르크시즘 등을 공부했다. 내가 생각했던 프랑스 문화와 맞는 분위기는 없었다. 실망해서 대학교 1~2학년 때는 방황했다.

신앙적인 고민도 많았다. 모태신앙이라 의무감에 교회를 다녔다. 울산 있을 때는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서울 올라와서는 예배가 재미없더라. 운동권 학생이 많았고, 여권운동도 한창일 때라 성경이 말하는 여성관도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믿지 않아서 지옥 가는 것만 아니면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지옥이 겁이 났다.(웃음) 평생 그렇게 배워 왔으니까.

당시에는 굉장히 큰 고민거리였다. 서울대학교에만 입학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해결이 안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여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지만, 공부가 재미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마치고 나서, 현대에서 근무했던 아버지가 런던 지점의 지점장이 되면서 영국으로 갔다. 주재원 가족이었다. 중학교 2학년 말까지 있었고, 중학교 3학년으로 한국에 전학 왔다. 처음에는 영국 생활이 힘들었다. 언어가 안 됐고 인종차별이 있었으며, 이질적이었고 낯설었다. 6개월이 지나자 말이 트이고, 2년쯤 지나자 공부도 무리 없이 잘할 수 있게 됐고, 친한 친구까지 생기자 재밌어졌다.

학교 공부 중 제일 어려웠던 것이 에세이 쓰기였다. 수업 시간에 교사가 강의하면 받아 적은 다음에, 그것을 기반으로 자기 에세이를 써내야 했다.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중학교 2학년이 되자 에세이 쓰는 것까지 되더라. 자신감이 확 붙었고, 공부가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아버지가 본사에서 부른다며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쉬움이 컸다.

영국에서 공부하다가 돌아왔을 때, 한국 교육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영국에서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찾아가는 식으로 공부한 반면, 한국은 입시 위주였다. 대학에 가면 영국에서처럼 공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대학교도 다르지 않더라. 점점 공부에 흥미를 잃었는데, 방황하다 휴학한 뒤 돌아와 듣게 된 3학년 전공 필수 수업에서 <보바리 부인>과 만나며 공부에 확 빠졌다.

<보바리 부인>에서 엠마 보바리는 끊임없이 상승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상승 욕구에 따라 움직일수록 더 추락하기만 한다. 그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인간은 상승 욕구가 있지만, 추구하면 할수록 부인할 수 없는 자기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많이 와닿았다. 초월하고 싶지만 초월하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틀로 <보바리 부인>을 해석했고, '엠마 보바리의 꿈과 현실'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썼다.

나는 항상 나의 다름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이라서 자기 성찰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특수는 보편 앞에서 항상 자신의 다름을 설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에 처음 갔을 때 체육 시간에 체육복으로 갈아입는데, 영국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내복을 안 입고 체육복도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는다. 교복으로 치마를 입어서 바지는 문제없이 갈아입었지만, 나는 위에 내복을 입고 있었다. 셔츠 안에 또 하나의 이상한 티셔츠를 입은 형국이었다. 영국 아이들에게는 너무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리병에 보리차를 싸 간 적이 있는데, 내가 오줌을 마신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졌다. 일을 겪으면서 가능한 그들과 동화하려 애썼다. 하지만 적응의 과정이 한국에 와서는 또 한 번 뒤집어져야 했다. 비적응과 적응의 경계에서 나의 다름을 늘 의식하면서 사는 세월이 아이 낳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 공부했던 라신(Jean Racine, 1639~1699)의 비극 <앙드로마크>(Andromaque), <페드르>(Phèdre)도 기억이 남는데, 프랑스 시에서는 이상하게 매력을 못 느꼈다. 라신의 비극도 운율이 있으니까 시에 가깝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시보다 산문을 재치 있게 구사하는 작가를 좋아했던 것 같다.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와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 등에게서는 매력을 크게 못 느꼈다. 내가 너무 이성적이라서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정작 공부에 재미를 붙였을 때는, 이 공부가 실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 탁상공론같이 느껴졌다. 책상물림처럼 공부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좀 더 현실과 맞닿아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 바로 대학원에 가지 않았다. 졸업 때 논문상을 받아서 학과에서 선물도 받고 학과장 교수님과도 만났는데, 왜 대학원에 안 가느냐고 하시더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여성 롤모델이 많지 않았다. 여전히 시집 잘 가는 게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내가 서울대학교에 가는 것을 안 좋아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어머니는 '이화여대'가 여자 인생에 제일 좋다고 했다. 살아 보니까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하는데, 서울대학교 가면 남편 잘 만나기 힘들다고 했다.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 아니다.(웃음) 불문학과 동기 여자 중 절반 정도는 취직하고 절반 정도는 대학원 등 다른 길로 갔는데, 다들 나름대로 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았다. 우리 세대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졸업 후에는 책을 많이 못 읽었다. 이랜드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라브리공동체에 들어갔다. 거기서 간사들이 쓴 책과 기독교 세계관 책을 많이 읽었다. 라브리에서는 본인이 주제를 정해 공부하게 하고, 공부한 것에 기반해 페이퍼를 쓴 뒤, 금요 토론 때 발표하는 식으로 운영한다. 영국 라브리, 미국 라브리 등에서 들어온 강연 테이프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기초적인 세계관을 정리했다.

라브리에 들어가게 된 스토리가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서울대기독인연합에 잠시 있었는데, 그때 황병구 선배가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한 탐방 기획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기획의 일환으로 라브리를 방문했다. 기독 여성의 진로 모델로서 성인경 간사님의 아내 박경옥 간사님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이야기해 보니 그 가족이 우리 가족이 영국을 떠난 다음 해에 영국에 가서, 우리 가족이 다닌 교회를 다녔더라. 우리 가족이 알던 목사님과 굉장히 가까웠다. 이렇게 공통적인 고리가 있었고, 라브리를 보면서도 '아, 기독교에 이런 데가 있었구나' 하며 감명을 받았다.

그 후 라브리와 느슨하게 이어져 있었는데, 1년 뒤 이랜드에서 일하고 있을 때, 성인경 목사님이 책 한 권을 번역해 달라고 의뢰했다. 존 화이트헤드가 쓴 세계관 책 <인간의 종말>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번역했다. 회사 생활이 워낙 재미가 없었고, 공부에 대한 미련도 있어 번역하면 뭐라도 남겠다 싶었다. 주제도 재밌어 보였다. 이후 계속 연이 닿았고, 이랜드를 그만두고 라브리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라브리 시절, 기억에 남는 책은 <Common Sense Christian Living>과 <True Spirituality>, 2권이다. <Common Sense Christian Living>은 에디스 쉐퍼 여사(Edith Seville Schaeffer, 1914~2013)가 썼다. 번역은 안 됐다.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내 언어로 소화해 라브리에서 발표했다. 그때 발표한 글이 소책자 <그리스도인의 상식>(예영커뮤니케이션)이다. 1996년에 나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상 가운데 누리는 은혜라고 정리했다. 그때부터 일상에 관심이 생겼다.

<True Spirituality>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August Schaeffer, 1912~1984)가 썼다. <진정한 영적 생활>(생명의말씀사)로 번역됐다. 프란시스 쉐퍼가 쓴 굵직한 책은 거의 다 읽었는데, <진정한 영적 생활>이 가장 좋았다. 이 책도 영성과 삶의 문제를 가져온다. 쉐퍼가 라브리를 시작했다가 다시 돌이켜 보는 시점에서 썼다. 삶 자체를 영성이라고 말한다.

대학 1~2학년 때 신앙적 방황을 했다고 했는데, 그러다 결국 갔던 교회가 온누리교회였다. 경배와찬양 운동을 막 시작하던 때였다. 외국 찬양을 번역해서 부르고 뭔가 세련됨을 더하기는 했지만, 돌이켜 보면 오순절파에 가까웠다. 방언 기도도 하고 대적 기도도 하고 다 했다. 그런 카리스마 운동은 장악하는 힘이 세다. 빨려 들어간다.

정신적으로 약할 때라 그 분위기에 쉽게 빨려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쓰는 특유의 언어를 익혔다. "하나님이 나한테 이런 말씀을 주셨다"라든가, "하나님이 이러셨다, 저러셨다" 등 특유의 어법이 있다. 상식적으로 풀어 갈 수 있는 문제도 상식적으로 풀지 않는다. 안 풀리면 무조건 모여서 기도한다. 일이 풀리면 "하나님이 이루셨다" 혹은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한다. 한 2년 정도는 나름 체험도 있어서 그러한 어법이나 문화를 잘 받아들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맞지가 않았다.

땅에서 발을 한 30cm 띄우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쓰는데, 사실 인생에서는 초월을 경험하는 시간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더 길지 않은가. 지난한 인생을 해석해야 하는데, 라브리에서 이에 대한 이해를 통합할 수 있었다. 속된 말로 사람들이 "뽕 맞는다"고 말하지 않나. 수련회 가서 얻은 수련회 '영빨'로 산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버티기에는 일상이 너무 긴 것이다. 수명도 늘어났고.(웃음)

6년 정도 라브리와 관계했다. 학생으로도, 헬퍼로도 있었다. 이때는 번역보다 통역을 했다. 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통역 일을 맡기도 했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남편이 목회자가 되고자 신학교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인 번역을 시작했다. 남편이 수입 없이 4년을 보내서, 번역 일을 하는 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가 쓴 <오독: 문학 비평의 실험>(An Experiment in Criticism, 홍성사)도 인상적으로 읽었다. 1997년인가 1998년에 읽었던 것 같다. 원문으로 읽었다. 어느 책을 읽든지 대략 한 가지가 남는다.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 책을 쓴다는 말도 있는데, 이 책에서 얻은 한 가지는 해석에 대한 통찰이다. 내가 어떤 것을 해석할 때는 반드시 '내'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해석에 투사된다는 지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완전히 객관적 해석은 없다. 어떤 것이든 내가 관여한 해석이다. 비평에 대한 책이지만 영적으로 깊이 와닿았다.

그는 기독교계에 알려진 번역가다. 유진 피터슨을 비롯해 존 스토트, 톰 라이트, 알리스터 맥그라스 등 굵직한 저자의 책들을 번역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번역 이야기를 들어 봤으면 좋겠다. 인터넷에 잡히는 번역서만 60여 권이다. 중요 기독교 저자의 저서를 번역해 왔다. 번역에 대한 첫 기억은 언제인가.

초등학교 6학년, 영국에 있을 때 어린이책을 한 챕터 번역한 적이 있다. 한인 교회 교지에 실렸다. 아마 교지를 만들던 어른들 아이디어였을 것 같다. 나에게 번역을 해 보라고 시키더라.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였다. 새로운 경험이라 재미있게 했다. 지금 보면 약간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나름 괜찮게 번역했더라. (웃음)

한국에 돌아왔을 때, 영국과 달리 청소년을 위한 책이 별로 없다는 생각을 고등학생 때 하면서 나중에 내가 재밌게 읽었던 책을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더 진전은 없었다. 진지하게 번역가가 되어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문 번역가가 될 줄은 몰랐다.

본격적으로 번역 일을 잡았을 때 처음 번역했던 책은 <개척자의 길>(홍성사)이다. 대천덕 신부님 자서전이었다. 번역은 나에게 공부 대신이기도 했다. 늘 기회가 왔던 것은 아니지만, 공부하고 싶은 책 위주로 골라서 번역했다. 출판사도 믿을 만한 곳과 꾸준히 일하는 편이었다. 출판사 두세 곳과 돌아가며 일했다.

- 번역할 때 특별히 신경 쓰는 게 있나.

어렵지 않게 번역하는 것이다. 대학생 때 <기독교와 문학>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너무 어렵더라. 그때만 해도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책이 어렵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프란시스 쉐퍼 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어 번역본은 너무 어려웠다. 나중에 원서와 비교해서 읽어 보니까 원서는 아주 쉽게 읽혔다. 그때부터 왜 번역본이 원문보다 더 어려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직접 번역해 보니까 어려운 원인이 한자(漢字)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명사형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명사형을 만들려면 한자어를 빌려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자어를 가능한 안 쓰고 술어형으로 풀어 쓰는 방식으로 스타일을 잡았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더라. 내 번역이 잘 읽힌다고 한다면,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내 번역을 본 사람들은 내 특유의 번역 스타일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번역할 때 원저자 문체가 나에게 영향을 주기도 할 테지만, 내 문체도 기본적으로 있는 듯하다.

여성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내가 하던 일이 번역이니까 그 일과 관련한 페이퍼를 한두 번 쓰면서 번역 관련 서적을 여러 권 읽었고, 이 독서가 계기가 되어 번역에 대한 이론을 공부하기도 했다. 번역 노동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려고 준비했는데, 결국 쓰지는 못했다. 그래서 여성학은 석사 수료로 끝났다.

보통 번역가는 저자의 시녀로 인식된다. 번역가를 여성에 비유하기도 하는 이유다. 항상 원저자에 종속된 존재로 다룬다. 번역은 지적인 작업이지만, 종속된 지적인 작업이라는 묘한 점이 있다. 노동 형태도 프리랜서다. 사람들에게 번역한다고 말하면 "여자가 하기 좋은 일이네"라고 반응한다.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집안일과 병행하는 파트타임이라고 인식한다. 반면, 남자는 전문 번역가로 좀 더 쉽게 인정받는다. 이러한 번역 노동의 젠더화된 경험을 논문으로 쓰고 싶었다.

본격적인 번역 작업을 하면 1년에 3~4권 번역하게 된다. 그래야 1권에 2~3개월 들이고 잠깐 쉬었다가 하는 식으로 리듬을 만들 수 있다. 전업으로 하려면 1년에 못해도 4권, 빨리 하면 5권은 해야 수익도 거의 맞아떨어진다. 물론 더 많이 하시는 분도 있지만, 나는 육아와 살림을 병행했기 때문에 더 많이 하기는 힘들었다. 본격적으로 번역할 때 내 사이클은 일반 직장인과 똑같았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가 잘 때 번역했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부터는 아이가 집에 없는 시간이 내 번역 노동 시간이었다.

번역과 일반 독서는 많이 다르다. 완전히 소화하지 않으면 번역을 못한다. 깊이 읽기는 하는데, 독서한다는 느낌보다는 일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번역을 하면 못해도 1권을 3번 읽는다. 번역하기 전에 읽고, 번역하면서 읽고, 번역을 교정하면서 또 읽는다. 어떤 때는 편집자로부터 최종 교정본이 오기도 해서 그러면 4번을 읽게 된다. 읽는다는 느낌보다 일한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번역을 끝내고 나면 그 책이 내 안에 깊이 박히는 느낌이다. 오래 남는다.

번역할 때는 솔직히 다른 책을 못 읽는다. 하루치의 번역이 끝나면 더 이상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권 번역을 끝내면 잠시 쉬는 시간을 두었는데, 그때도 무거운 글이 아닌 소설을 주로 읽었다. 자연스러운 한국말을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자꾸 영어만 보면 어투가 변한다. 어투가 고정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풀어 주는 것이다. 박완서, 공지영 작가 책을 많이 읽었다. 밤새면서 읽기도 했다. 신경숙, 김형경 작가 책도 여러 권 읽었다. 황석영 작가의 <오래된 정원>(창비),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사)도 기억에 남는 책이다.

- 유진 피터슨 책을 10권 넘게 번역했다. <유진 피터슨 읽기>를 출간하기도 했다. 본인이 생각할 때, 유진 피터슨 저서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인가.

유진 피터슨 책은 번역하면서 다 좋았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영성신학 시리즈 세 번째 책인 <그 길을 걸으라>(IVP)이다. 하지만 가장 많이 활용하고 인용한 책은 <이 책을 먹으라>(IVP)이다. <이 책을 먹으라>는 사실상 피터슨의 번역론이다.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실은 중요한 성경 번역 이론이 담겼다. 피터슨 책의 한국어 번역에 대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는데, 공부를 해 보니 피터슨의 진가가 더 보였다.

피터슨 책은 1998년 말부터인가 시작해서 2011년까지, 1~2년에 1권꼴로 번역한 것 같다. 그리고 2012년에 그를 직접 만났다. 몬태나에 있는 집에서 1박 2일 머물면서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코리아>에 두 번에 걸쳐 실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이번에 그의 마지막 책이 되리라 예상하는 설교집도 번역을 맡게 되어 피터슨이 무척 기뻐했다. 지금 번역 중인데, 내년 1월에 나올 예정이다. 오랜만에 그의 책을 다시 번역하는데,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이미 여러 권을 번역했고, 그에 대한 연구도 했기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로 알고 번역하는 느낌이다.

<그 길을 걸으라>가 기억에 남는 것은 그에 얽힌 사연 때문인 것 같다. 번역을 하면서 번역의 노동 방식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와 지위, 번역을 통한 한국 기독교 지식 형성의 맥락 등을 계속 고민했다. 그때 피터슨 책을 편집하던 편집자와 번역을 놓고 사소한 갈등이 있었는데, 나는 번역가를 하청업자로 대하지 말고, 이 지식 생산의 과정에 좀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편집자나 기획자와 더 긴밀하게 의사소통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번역에 들어가기 앞서 담당 편집자와 같이 원서를 읽으면서 책에 대한 이해를 서로 공유하자고 제안했다. 마침 담당 편집자가 시간이 되어서 <그 길을 걸으라>는 그 과정을 거쳐서 번역했다. 이 작업은 시간이 많이 들고, 그렇다고 번역료를 더 받는 것도 아니고, 편집자도 시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계속 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그 후로 딱 한 권 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번역한 책이 있는데, 루이스의 <기독교적 숙고>(홍성사)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일단 그의 글이 어려워서 내가 편집자에게 거의 독해를 해 주는 상황이었고, 번역 원고를 넘기고도 한참을 묵혔다가 나왔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좀 했다. 그 시기가 또 내가 힘든 일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고….

피터슨 책은 사실 그의 번역론을 따르면 번역할 수 없는 책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는 성경을 살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러기 위해 자기 맥락에서 성경을 사는 방식들에 대해서 논의한다. 그 맥락은 20세기 후반 21세기 초의 미국 중산층이다. 그가 그 독자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사는 방식에 대해서 논한 책을 우리는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다. 피터슨 주장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번역서가 아니라 한국의 맥락에서 성경을 살아 내는 데 대한 책이 나와야 한다.

내가 <유진 피터슨 읽기>라는 책을 쓴 것도 그러한 생각과 맞닿아 있다. 그의 책을 10권 넘게 번역한 사람으로서 내가 그동안 헛짓한 것은 아니다. 일단 그의 책은 내용이 좋다. 그리고 글이 좋다. 읽으면서 배우는 게 많다. 그 배우는 것들이라는 게 바로 성경을 살아야 하는 우리 맥락에 대한 고민이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번역하고 나면 그 책이 내 안에 깊이 박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피터슨 책을 여러 권 번역하면서 내 안에 그러한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지금 내가 하는 연구도 그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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