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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들이여 '하나님 놀이'를 멈춰라"

[인터뷰] 송기득 은퇴 교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독"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7.09.02  22: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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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대에서 신학을 가르치다 은퇴한 송기득 교수를 전남 순천에서 만났다. 올해 86세인 송 교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순천에 거물들이 모여들고 있다." <한국 기독교 흑역사>(짓다) 저자 강성호 씨는 8월 30일 기자와 만나 대뜸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럴싸하다. 2016년 4월 해방신학자 홍인식 목사가 순천중앙교회에 부임했고, 최근 동화작가·번역가이기도 한 이현주 목사도 순천에 정착했다. 일찍이 순천에 머물고 있던 또 다른 거물도 있다. 목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송기득 교수(86)다. 1999년 은퇴한 뒤 순천에 정착했다.

은퇴한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순천대와 호남신학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2001년부터 2016년까지 계간지 <신학비평>을 발간했다. 앞서 송 교수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의 <그리스도교 사상사>·<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대한기독교서회)를 번역하고, <사람다움과 신학하기>·<역사의 예수>·<사람, 아직 멀었다>(대한기독교서회)·<하느님 없이 하느님과 함께>(신학비평사) 등 스무 권의 책을 썼다.

굳이 분류하자면, 송기득 교수의 사상은 '진보'라 할 수 있다. 김하태·류영모·함석헌·안병무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 영향을 받았다. 무식한 목사가 되지 않으려 철학과 신학을 바지런히 공부했다. 젊은 날, 현실의 삶에서 사상을 검토하기 위해 방랑자의 길을 걷기도 했다. 전남 목포에 한산촌(결핵 요양소) 병동을 손수 짓고, 그곳에서 10여 년을 일했다. 목원대 교수로 있을 때는 민중신학·여성신학·한국신학 등을 개설하였다.

8월 31일, 노(老)교수를 직접 만나 곡절 많은 지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송 교수는 일어나는 것조차 버거워할 정도로 기력이 쇠해 있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송 교수는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찢어지게 가난할 때도 있었고, 10여 년간 결핵 환자를 위해 봉사하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지금도 계간지 <신학비평>에 이어 <신학비평너머>를 내면서 일을 놓지 않고 있다. 삶에서 은퇴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지 않나.

나이가 드니까 온몸이 아프다. 역류성 후두염에, 비염, 만성 두통, 치통까지…몸이 안 좋다. 꼭 아프기 위해 사는 것 같다. 중세 수도자들은 "죽음은 삶에서 은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죽음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는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나왔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2016년 5월 아내가 눈을 감았는데, 아내 옆에 묻히려 한다. 합동 묘비명에는 '정순애·송기득, 함께 살다'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인생을 마감하기 전에는 지인들과 '인생 송별 잔치'를 하려고 한다.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눠 줄 것이다.

- 말 그대로 '해로동혈'이다. 지난해 부인을 떠나보낸 후로 계속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 편지들을 엮어 책 <아내에게 보낸 편지>(신학비평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아내가 숨을 거둔 지 401일째(8월 31일 기준)인데, 편지는 죽을 때까지 쓰려고 한다. 아내가 그리워서 말을 나누려고 쓰지만, 실은 나의 삶의 표현이기도 하다. 만약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 갔을 것이다. 아내와 이 땅에서 63년을 지냈다. 나를 만나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나는 아내를 많이 사랑했는데, 아내는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했다. 나는 아내에게서 믿음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것도 나이 팔십이 넘어서. 아내가 나를 지극히 사랑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부인해도 부인할 수 없다. 확신이다. 맑은 가을 하늘 같은 천상의 여인 '성모', '대모' 같은 분과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무식한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가난과 싸워 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결국 목사가 되지는 못했다.

손양원 목사 설교에 뿅 가서, 중2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웃음) 기왕이면 '믿는 학교'(미션스쿨)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해서 순천 매산중으로 전학을 갔다. 매산고를 나와 연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 보이열이라는 분이 입학금을 지원해 줬다. 장학금을 받아 가면서 7학기 만에 졸업했다.

잘 풀리나 싶었는데, 이후 결핵에 걸려 3년을 고생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이때 '다른 사람은 나를 살아 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산다'고 깨달았다. 말 그대로 결핵의 은총이었다. 살아났을 때 연세대 김하태 박사가 대학원도 안 나온 나를 전임조교로 채용해 줬다. 김 박사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폴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을 소개한 분이기도 하다. 김 박사님이 적극 밀어줬는데, 3년 반 만에 대학에서 쫓겨났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군 미필자는 직장에 다닐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결핵 때문에 군대에 못 갔는데, 어이가 없었다. 고민 끝에 한신대 연구생에 지원했다.

김재준 박사가 "왜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신학을 할 수 있나 없나 검증하려고 들어온 것"이라고 답했다. 하루는 이름 있는 교수가 성령론을 강의하는데, 도저히 듣기 어려웠다. 그분은, 세상이 온통 성령의 역사로 돌아간다는 취지로 강의했다. 나는 "성령이 다 하면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가. 사람은 꼭두각시냐"고 묻고 신학을 포기했다. 아무래도 철학을 해야겠다 싶었다.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후에도 목사가 될 기회가 주어졌지만, 목사 대신 교수가 됐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한다.

- 대학원까지 나와 놓고, 부러 '거지의 삶'을 살기도 했다. 계기가 뭔가.

내게는 역마살이 있었다.(웃음) 서른 살 때였는데, '나'(자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계속 걷고, 돈을 쓰지 않고, 숙식은 구걸하기로 했다. 아마 2,000리 정도 걸었던 것 같다. 괴롭지는 않았다. 다양한 사람을 만난 건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강릉에서 모든 교회가 떠돌이를 외면할 때, 술집 여종업원이 일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묵을 곳을 알아봐 주고, 식사를 대접해 준 건 잊을 수 없다. 그녀는 내게 '성모'와 같은 '님'이었다. 내 인생의 스승이다. 교회에서 쫓겨나고, 술집에서 구원을 얻은 셈이다.(웃음)

자택에는 송기득 교수와 정순애 여사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송 교수는 "아내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다. 아내를 만나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인생의 방랑은 계속됐다. 전남 목포에 결핵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 '한산촌'을 짓고, 촌장으로 지냈는데.

광주제중병원에서 내 결핵을 치유해 준 한 주치의가 목포 인근에 땅을 마련해 놓고 요양소를 차리자고 제안했다. 결핵 요양소 '한산촌'을 세우기 위해 손수 흙벽돌과 자연석으로 병동을 지었다. 아내도 여기서 일했는데, 고생을 많이 했다. 나중에 아내는 "어떤 보람이나 의미가 있어서 한 게 아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니까 함께했다"고 말하더라.

10년 정도 됐을 때 한산촌을 경기도 양평으로 옮기기로 했다. 3년간 현대식 요양소를 지었는데, 안기부가 허가를 내 주지 않아 결국 헐값에 팔아야 했다. 허탈했다. 그러고 보니, 3년의 노동은 내게는 큰 낭비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낭비'였다.

- 민중신학자 안병무 박사와도 깊은 교제를 나눈 것으로 아는데.

안 박사는 여름이면 한산촌에 와서 글을 썼다. 나는 낮에 중노동하고, 밤에는 안 박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안 박사가 쓴 <갈릴래아의 예수> 초고를 봐 주기도 했다. 이후 안 박사의 초청으로 한신대에서 2년 반 동안 강의도 맡았다. 폴 틸리히의 책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를 교재로 쓰기도 했다. 외국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내용에 반해서 번역도 했다. 안 박사가 주간으로 있는 월간지 <현존>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1980년 전두환이 <씨알의 소리>, <창작과 비평>, <중앙 논단> 등과 함께 폐간을 시켰다.

- 이후 목원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채용된 것으로 안다. 목사가 아닌데 어떻게 신학과 교수가 될 수 있었나.

연세대에서 만난 김하태 박사가 목원대 총장이 되자, 나를 정교수로 초빙했다. 내가 신학과 과장이 되면서 민중신학·여성신학·한국신학 등 새 과목을 개설했다. 학생들의 머리, 즉 신학적 사고를 열어 주기 위해서였다. 진보적인 데다가 목사도 아닌 사람이 신학생들을 가르치니 이사회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 민중신학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나.

민중신학은 예수, 하나님이 아닌 '민중'을 신학의 주제로 삼는다. 민중의 수난에서 예수의 수난을 읽어 내는 거다. 민중 속에서 예수를 보는 거다. 민중 메시아론이자, 민중 구원론이다. 민중은 사람의 구원을 담보한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

나는 이제 와서 민중 개념을 달리 읽는다.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계(송 교수는 이를 하나님나라라고 불렀다 – 기자 주)를 지향하는 데 있다고 본다. 나는, 나의 '인간화 신학'에서 민중을 단순히 '소외 계층, 피억압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제한적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람들'을 민중(다중)으로 보게 됐다.

-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누가 민중인가.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 시위를 벌인 사람들이 '민중'이다. 지금은 '다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다.

송 교수는 폴 틸리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폴 틸리히가 쓴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원본으로 한신대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일평생 신학을 연구해 오셨다. 누구보다 기독교에 대한 애착이 강할 것 같은데, 오히려 "교수 정년 은퇴와 함께 기독교를 떠났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기독교의 교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 대속론은 '역사의 예수'(맨사람)와는 무관하다. 그리고 교회가 싫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 걸핏하면 지옥에 간다고 겁박한다. 사랑하는 자녀를 지옥에 보내는 부모는 세상에 없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짓거리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생각해 보자. 믿는 자들에게나 하나님이 있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또 믿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도 제각각이다. '하나님'이란 관념은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유일한 하나님, 절대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길은 딱 하나라고 본다. 하나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을 그만둬야 한다. 그게 하나님이 살길이다.

사실 나에게 확신의 대상, 절대적 믿음의 대상은 없었다. 어렸을 때는 하나님이 절대라고 믿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God over gods'이더라.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들' 너머의 하나님이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더라.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 말했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라"고.

-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와 신앙인도 있지 않나.

글쎄…오히려 교회는 빛을 어두움으로, 소금을 무염으로 바꾸고 있지 않는가. 초대교회는 나름 존재할 의미와 이유가 있었다. '원시 공산 사회'였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더니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유무상통'이다. 힘닿은 대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예수의 뜻을 받든 거다. 그런데 교회라는 게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됐나. 점점 권력화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십자군 전쟁 200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는가. 지금까지 하나님 이름으로 죽은 사람이 2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폭력과 살인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라리 기독교가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가만 둬도 잘 살 사람을 세뇌해서 이상하게 만들기나 하니…

- 한국교회가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목사들이 교만하면 안 된다. '하나님 놀이' 하면서 자꾸 위(하나님 자리)로 올라가려 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는 hybris(자만)이다.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갓 플레이'를 멈춰라.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다.

- 곡절이 많은 삶을 사셨다. 지난 삶에 대해 '자기 평가'를 한다면.

주위에서 나는 치열하게 살았다고 평가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 정교수로 은퇴했으니, 치열하게 살아온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 번도 '괴롭다', '그만두자'고 생각한 적 없다. 철저히 '참나'를 살아 내려고 나를 내던지며 살았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사는 것 자체가 삶이다. 그래서 나는 잘 죽는 길은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1901~1976)는 "죽음이란 없다. 내가 죽을 뿐이다"고 말했다.

기독교를 떠났다고 선언한 송 교수는 한국교회를 향해 거침없이 비판했다. 교만과 자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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