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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청소년 사역, 무엇이 문제인가

청소년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청소년 사역이다

주원규   기사승인 2017.08.20  09:3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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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로 기억한다. 이동현 목사의 파렴치한 청소년 성범죄 행각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 최근 문대식 목사의 성범죄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비난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성직자의 성추행이라는 구설 자체도 그 한심함에 치를 떨 지경인데, 앞서 말한 두 사람이 자행한 성범죄 대상이 청소년이라는 사실 앞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의 청소년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청소년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식하겠다며 나선 이른바 청소년 사역자들의 성범죄 행태가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그 피해 대상이 아직은 자기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청소년이며, 어쩌다 부모가 알게 되더라도 자식의 장래 때문에 쉬쉬하려는 것이 아직까지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다. 그렇기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부분은 매우 미미할 거라는 지적은 필자의 주관적 예단만은 아닐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계에서는 이번 기회에 청소년 사역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그 대처 방안이라는 게 어처구니가 없다. 청소년은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니 목사들이 그들을 만날 때는 남자, 여자 단둘이 만나는 일을 만들게 하지 말고 반드시 그룹끼리 만나게 하는 규칙을 정하자는 의견이 나오는가 하면, 청소년에게 자신의 성(性)을 더 철저히 지키자는 취지의 순결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비교해서 그렇지만 미국 몇 개 주에서 시행되는 종신형에 가까운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성범죄자 근절 대책을 한국 목사들에게도 도입하는 문제를 논의한다든지, 남성 목사들의 젠더 감수성을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지만 그런 지적은 슬그머니 숨어 버리고 '따지고 보면 청소년, 이 자식들이 불완전해서 그렇다', '우리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성적으로 타락한 탓에 마귀들이 우리 목사님들을 주요 타깃으로 삼고 공격하는 거다'라든지 하는 웃기지도 않은 말로 물타기하려는 것이 교계가 보인 한심한 작태다.

이런 유감스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인식의 침묵에 잠겨서는 안 된다. 이동현 씨 사태가 터진 지가 정말 엊그제 일이다. 그 충격을 겪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이들이 자신의 성범죄 사실을 어떻게든 은폐하려고 발버둥 치다 채 봉합되지 않은 문제들이 와르르 쏟아져 버린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제는 문제와 원인 진단을 한심한 방식으로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한계를 근본적으로 지적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한국교회의 청소년 사역, 무엇이 문제인가.

청소년 사역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 모른다

이 소제목을 들으면 다소 뜨악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역 자체가 문제라니. 그럼 아예 사역을 하지 말라는 얘기냐,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이에 대한 필자의 답은 어떻게 돌려 말해도 단호하다. 맞다. 하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청소년 사역이라는 개념 자체부터 재고해야 한다.

맞춤 사역이라는 취지에서 출발한 청소년 사역을 문제 삼으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이름은 청소년 사역이라고 해 놓고 정작 청소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성세대들의 구미와 정서, 교리에 맞는 인간 양성의 밑그림을 그려 놓은 어른들이 중심이라는 게 문제 중의 문제다.

예수님의 복음을 한창 자라나는 질풍노도 청소년에게 주입하려는 구령 욕구를 누가 말리겠느냐.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예수님의 복음을 청소년에게 가르치려 들 때, 나타나는 소위 '어른 설계자'들의 얄팍한 접근법이다.

쉽게 말해 이런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청소년을 통제, 조율, 개선할 수 있는 도구의 하나로 택하다 보니 그 가르침이 처음부터 입체적이고 통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박하게 말해 사육과 세뇌를 위한 인간 개조 가르침의 텍스트를 성경에서 찾다 보니 어른 설계자들의 눈에 떠오르는 매뉴얼은 너무나 무식, 단순해진다. 잘하면 복을 받고 못하면 저주받는 저급한 채찍과 당근의 텍스트만을 금과옥조의 가르침처럼 취사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수많은 예수님의 복음을 제쳐 두고 말이다.

물론 사역의 실천적 측면을 말하기 전에 하나님 사랑, 예수님 사랑에 대해 목이 터져라 떠들어 댈 것은 맞다. 감정을 최대한 끌어올려 신성한 신의 사랑, 그 위대함을 외치게 한다. 그 종교 감정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문제 삼아야 하는 중요한 핵심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어른 설계자들이 과연 청소년에게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그 감격만 떠들어 대겠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뜨거운 사랑, 예수님의 놀라운 희생, 십자가 은혜를 침 튀기며 떠들어 댄 뒤, 청소년을 향해 쏟아 내는 실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 학교 가서 사고치지 마. 얌전하게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해, 욕하지 말고, 술, 담배 하는 사탄의 자식들과는 어울리지도 마, 무엇보다 명심할 건 성 문제에 휩쓸리지 말고 특히 여학생, 너희들 조심해. 여하튼 순결한 주님의 자녀가 꼭 되어야 한다. 아멘!'

이 메시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건 그냥 잔소리에 불과하다.

단언컨대 단 한마디라도 잔소리 아닌 것이 없다. 비전을 가지라고? 주님의 심장을 사자의 심장처럼 간직하고 쿵쿵 달리면서 세상과 싸우라고? 돌려서 세련되게 말하지만 이것도 결국 잔소리다.

이 잔소리는 학교나 사회에서도 많이 한다. 그런데 굳이 교회 사역도 여기에 가세해야 할 이유가 뭘까. 여기에는 종교 감정이 효과적인 진압 도구로 쓰인다는 믿음이 전제되기에 가능하다. 중2병으로 대표되는 청소년들이 두려워하는 두려움의 근본은 의외로 종교, 종교 감정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늘의 청소년에게 소비되는 문화적 소스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현대 청소년의 정서를 지배하는 대표적 키워드는 종교 스토리텔링이다.

선악의 대립, 악의 창궐, 유사 엑소시즘의 감정 소비가 주류를 차지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판타지 무협, 타임 슬립 로맨스, 전생 추적, 니힐리즘 계열의 BL(Boy's Love의 줄임말 - 저자 주). 아오이 계통의 만화, 좀비 때려잡는 게임 캐릭터, 종말론적 긴장을 조장하는 게임, 영화의 무대 배경 등. 청소년 문화의 지류에 흐르는 것은 바로 종교 감정이다.

청소년 사역은 리얼리티로 가득한 염증 사회의 후경에 자리 잡은 종교 판타지 영역에 예수님을 갖다 세운다. 그리고 희생을 통한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승리를 강조한다. 예수님을 이 판타지의 최종 승리자, 슈퍼 히어로로 설정한 다음, 사탄과의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하는 방법론을 적극 차용한다. 이렇게 종교라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청소년 사역은 사회가 청소년에게 어떻게 해도 효과적이지 못했던 잔소리 주입에 큰 재미를 봤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은 그래도 교회 가면 자녀들이 말 잘 듣고 좋은 스펙도 쌓을 수 있는 영적 무기로 성장할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잔소리를 가장 효과적이고 충격적 트라우마로 잡아 묶는 매개가 바로 순결, 순결을 둘러싼 성경 텍스트의 강요와 적용이다. 바로 이 대목, 성의 저주와 강박의 카르텔로 작동되는 순결 이념의 덫에 청소년 사역이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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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 이념을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현대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성의 순수, 우리에게 더 강하게 와닿는 순결 이념은 남성중심주의 그물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인다. 성의 선택권은 남성이며, 성의 주도권도 남성에게 있다. 성경을 대사회적임과 동시에 영적인 맥락으로 짚지 않을 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해석의 선택지는 이렇듯 성에 대한 관점을 남성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남성 중심적 성서 해석을 통해 나타난 순결 이념은 쉽게 말해 남자가 사고 치지 않게 여자들이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는 여성 성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폄하와 훼손으로 귀결된다. 순결을 지키려는 실천의 중심에 여성이 스스로 조심하고 타락한 세상의 음란한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혈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은 타락한 세계의 먹잇감임과 동시에 타락의 원인 제공자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서로 조심하자는데 뭔가 문제냐고 말이다.

아니다. 그게 문제다.

청소년 사역의 실천 메시지, 그 주류를 차지한 순결 이념은 오히려 순결을 강조하면 할수록 성의 남성 중심적 편향, 그로 인한 폭압적 금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 함정을 더 깊게 파는 꼴이 되는 것이다.

성의 가치를 남성중심주의적 전제에 두고 성경을 해석, 적용하는 그 자체부터 존재의 자유와 존엄, 신과 인간 사이를 관통하는 주체적 소통 의지를 가로막는다. 그 상태에서 성은 다분히 위험한 것이고, 여성은 언제든 오염된 성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여성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체가 이미 남성은 성적 선택권을 대하는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결국 남성 스스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꼴이 된다.

남성은 자신의 초인적 의지를 발동해 이 타락한 세상에 오염된 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금욕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이를 참아 내는 과정에서 어쩌다 유혹에 넘어가면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앞세우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설상가상 목사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리한다며 종교 위계의 자리에 자신을 놓아둔다. 이쯤 되면 목사가 성범죄를 일으키는 모든 이유에는 타락하고 오염된 성적 대상들인 음녀 이세벨의 유혹 때문이라는 논리가 합리적으로 들릴 법하다. 이거 아예 막 가자는 거 아닌가.

냉정히 묻고 싶다. 이동현, 문대식 씨, 이 두 사람이 정말, 진심으로 자신이 벌인 성범죄에 대해 회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라고 본다. 이들의 말을 보면 그 마음 밑바닥에는 억울하다는 생각만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여성을 성적 주체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인지하는 관점에서 시작된 근본적 한계다. 그 한계의 그물망에서는 제아무리 감정적으로 후회, 자학, 탄식, 회개의 기도를 해도 돌아오는 밑바닥은 '나만 재수 없게 걸렸다'는 생각뿐이다.

이 지독한 모순을 들여다보라. 순결을 강조하는 남성중심주의, 맥락 없는 종교 감정들의 뒤편에 선 종교 권력의 상부 계급을 자임한 목사의 책임이나 범죄자로서의 근본적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말이야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지만 잘못을 제공한 원인은 성적 대상인 여자에게 있다는 논리, 여기에 목사가 영적 싸움을 벌이다 잠시 방심해 사탄의 공격을 받아 흔들리는 것뿐이라고 합리화하기까지 한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솔로몬도 실수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무 팍팍하게 그러지 말고 좀 봐주자는 식으로 나오는 논리까지 덧입히면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이제 다시 묻는다. 과연 이런 바탕에서 청소년 사역이란 걸 계속해야 하는가. 이게 정말 청소년을 위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쯤 되면 모든 고리를 끊어 내고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청소년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청소년 사역이다

담배 피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 이성 교제는 꿈도 꾸지 마라. 야동 보지 마라. 여학생들, 특별히 자신의 몸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해라. 이런 걸 이야기하는 거. 그건 청소년 사역이 아니다. 특히 설교를 통해 그런 식의 윤리적 강령이나 읊어 대는 것, 그건 박정희 시대에 국민교육헌장 외우는 거나 다름없는 헛짓거리라는 걸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게 아니라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하라. 예수님이 우리의 불완전한 충동을 대신해 피를 흘리셨으니 그 피의 대가를 갖기 위해서라도 정신 차려 깨어 있어라.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해 줘야 청소년 사역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또한 아니다. 그건 굳이 청소년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간의 종교 감정에서 터져 나오는 자연 발생적 성찰일 뿐이다.

청소년 사역이란 청소년과 그저 함께 있는 것이다. 사역이니 뭐니 하는 말들 속에 어쩔 수 없이 스며든 힘을 빼고 청소년이란 이름을 가진 시대의 희생양을 위해 마음으로 기도하고 현실로 함께 버텨 주는 것,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들어 주는 것, 그게 바로 청소년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잠자코 들어 주는 게 무슨 소용이냐. 해답을 제시하고 청소년을 사역의 중심에 세워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가진 이라면 그 질문을 재고해 보기를 감히 권유한다.

오늘의 시대는 기성세대가 청년 세대를 짓밟고, 청년 세대가 기성세대를 조롱하는 시대다. 청소년 세대는 이 두 세대의 갈등 속에 나타난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감당하고 만 세대로 자리매김해 버렸다. 그리스도인 역시 이 세대 갈등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동시에 이 갈등의 매듭을 가장 먼저 풀 수 있는 시작 역시 복음의 빚진 자인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말한다. 청소년 사역에 있어서만큼은 청소년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것처럼 뭔가를 요구하지 말자.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제시해 주고 그 안에서 마음껏 세상, 하나님, 그리고 성경에 대해 질문하게 하자. 익숙하게 길들여진 도그마, 인위적으로 이끌어 낸 종교 열정의 대물림을 답습하지 말고 자연적으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고 그분을 말하게 하자.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이며,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꼰대처럼 답을 제시하고 혼내거나 달래거나 여하튼 그 길을 가라고 채찍질하는 게 결코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청소년 사역. 이 지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아니, 이미 충분히 늦었다.

*위 글은 편향된 시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일부 물의를 일으킨 청소년 사역 단체의 목사, 단체의 경우에 나타난 현상을 종교사회학적 시각으로 짚어 본 글입니다. 따라서 건강하고 바람직한 청소년 사역을 진행하는 다수의 청소년 사역 단체를 표면적으로 비난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주원규 / 동서말씀교회 목사. <열외인종 잔혹사>, <망루>, <사임당, 그리움을 그리다> 등 20권 넘는 책을 집필한 소설가. 청소년 쉼터 등에서 작가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제도권 밖 청소년들과의 인터뷰를 엮은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를 출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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