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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 아픔에 더 공감 못한 게 후회된다"

[종교개혁 500주년, 원로에게 듣다] 여수 은현교회 김정명 원로목사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7.08.04  00: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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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耳順)은 60세를 달리 이르는 말입니다. <논어>에서 공자는 예순이 되자 귀가 순해졌다 말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뜻입니다.

교단 헌법으로는 최대 75세까지 목회할 수 있는데 '이순'에 은퇴한 목사가 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목회 열정이 식었다'고 깨끗이 인정하고 2009년 9월부로 은퇴했습니다. 여수 은현교회 김정명 원로목사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원로에게 듣다' 세 번째 주자 김정명 목사를 만났습니다. 단순히 남들보다 일찍 은퇴했다는 이유만으로 섭외한 것은 아닙니다. 김 목사는 말보다 몸으로 사역해 온 목사입니다. 돈 낭비라는 이유로 교회가 제공하는 차량을 거절하고, 흰색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평소 교인에게 많이 가지지 말고, 나누며 살라고 강조했습니다.

혼자 잘살기보다 모두가 잘사는 게 낫다는 게 김 목사의 지론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실행에 옮길 줄 아는 원로의 이야기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혁을 외치는 한국교회에 울림을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 기자 주

김정명 목사는 2009년 27년간 시무해 온 교회에서 은퇴했다. 60세가 되던 해였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내가 담임목사 일을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는 목회를 시작할 때의 열정이 식었기 때문이다. 교인 숫자가 늘고, 목회 경력이 길어질수록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이 더 이상 내 아픔처럼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처음 사랑, 처음 마음을 회복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교인들을 속이고 나 자신을 속이면서 목회를 계속할 수 없었다. 내 뜻을 마치 주의 뜻인 것처럼 일을 했고,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돌이켜 보니 내가 주의종이 아니라 내 뜻의 종이었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고해성사와 같은 말씀을 들은 교인들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목사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교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듯 말했다. 그리고 목사는 27년간 시무해 온 교회에서 은퇴했다. 2009년 9월, 그의 나이 60세였다.

'60세에 은퇴하는 목사가 있다고? 하자가 있겠지', '일찍 물러나는 대신 후임으로 친·인척을 세웠겠지.' 은현교회(최규식 목사)와 김정명 목사 이야기를 접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썽을 일으켜도 악착같이 교회에 붙어 있으려 하고, 어떻게든 가족에게 교회를 물려주려는 목사만 봐 와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김 목사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사고(?)를 친 적은 없다. 동생·사위·처남이 목사지만, 자기 자리를 물려줄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 없다. 오히려 후임 목사는 교인들 손으로 뽑게 했다. "목회 열정이 식어 은퇴한다"는 이야기가 빈말이 아니었다.

전화를 걸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원로로서 고언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정명 목사는 흔쾌히 응했다. 8월 3일, 여수행 KTX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여수역에서 차로 10여 분을 달려 김 목사가 살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은현 평화의 집'에 도착했다. 항구와 도심 중간에 있는 작은 동네에 자리 잡고 있었다.

2층으로 이뤄진 평화의 집은 회의실·사무실·세면실·게스트룸 등으로 이뤄져 있다. 최대 10가정이 지낼 수 있다. 은퇴한 목사와 쉼이 필요한 목회자를 위해 마련하고 싶었다. 은퇴 이후 곳곳에서 후원이 이어졌고, 평화의 집을 세울 수 있었다. 김 목사는 '평화의 집' 대표를 맡고 있다.

흰색 고무신을 신은 김정명 목사가 활짝 웃으며 기자 일행을 반겼다. 편하다는 이유 하나로 줄곧 고무신을 애용해 오고 있다고 한다. 평화의 집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은퇴 1년 뒤 외로움, 고독 직면
자녀들 사고로 교인들 아픔 깨달아
"하나님 은혜로 분 넘치는 삶 보내,
큰 교회 목사 되니 왕 된 기분"

- 은퇴한 지 8년이 다 되어 간다. 은퇴 이후 어떻게 지냈나.

나름대로 목회를 정직하게 했으니까,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실 줄 알았다.(웃음) 2009년 은퇴하고 보낸 첫해는 너무 좋았다. 산에서 지냈는데 자유했다. 1년이 지나니까 갑자기 고독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누군가로부터 잊힌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산장의 여인'이란 노래가 입에서 절로 나오더라.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이 외로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그러면 안 되는데, 교인들한테 연락도 하고 싶고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 기도하면서 나 자신과 끊임없이 싸웠고, 극복할 수 있었다. 평안을 되찾나 싶었는데 또다시 정신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작은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쳤다. 하나님 은혜로 치유가 됐지만, 2년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숨 돌리고 나니까, 이번에는 51살에 얻은 늦둥이가 힘들게 했다. 사춘기였다.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큰딸이 뇌종양에 걸렸다. 앞이 캄캄해지더라.

나는 아무것도 해 줄 게 없었다. 목사 아내인 큰딸에게 "하나님이 목회자 가정을 위해 (병을) 주신 거다. 네 교인이 암 걸렸을 경우를 대비해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미리 경험하게 하신 것"이라고 위로했다. 작은딸한테는 "불행이 아니라 불편일 뿐이니 예수 안에서 자유롭게 살자"고 했다.

자식들이 아픈 걸 경험하니까 교인들한테 미안해지더라. 내 자식처럼 아픔을 경험한 교인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내가 그만한 위로를 줬나 싶더라.

- 자녀들이 고통받을 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없었나.

그동안 은혜에 감사하니까 별로 원망하지 않았다. 교인의 아픔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는데, 가족의 고통을 통해 깨닫게 해 주셨다고 믿는다. 이제야 철이 들었다. 지금 목회하면 잘할 것 같다.(웃음)

28세 청년 장애인을 키우는 교인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멍에를 진 거다. 나 같은 사람은 이렇게 힘든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는 80~90년 살다 (천국으로) 이민을 간다. 나 같이 세상에서 편한 '배역'을 맡은 사람은 천국에 가면 출연료가 별로 없다. 하지만 당신처럼 힘든 배역을 맡은 사람은 천국에서 30배, 60배, 100배 대우를 받을 것이다."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은 하나님의 보상이 이뤄진다고 믿는다.

- 주요 교단의 정년은 70세다. 기하성 총회는 75세로 긴 편이다. 만일 은퇴하지 않았으면, 2024년까지 목회하는 게 가능했다. 이른 은퇴에 아쉬운 점은 없는지.

목회할 때는 몰랐다. (은퇴하고) 밖에서 보니까 목사 노릇 제대로 못했다. 교회가 할 일이 이제야 눈에 보인다. 그런데 이제 힘이 없다.(웃음)

- 이를테면 어떤 게 눈에 보이던가?

사회적 약자들. 다문화 가정부터 탈북자들, 노인들, 미자립 교회 목회자 자녀들. 돕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힘이 없다.

- 60세 은퇴를 선언하게 된 결정적 이유로 '목회 열정'을 들었다. 2009년 고별 설교 당시 "목회 경력이 길어질수록 교인 개개인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고, 처음 마음,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나님 은혜로 큰 교회에서 누리고 살 수 있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죄송했다. 보답을 하고 싶었다. 신장도 기증(김 목사는 1997년 장기 기증을 했다 – 기자 주)했는데, 제대로 보답할 길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목사들이 욕먹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라도 (일찍) 그만둬서 예수님 입장 좀 세워 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 조기 은퇴를 선언했다.

내가 왜 그만둬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봤다. 나는 성공한 목사보다 훌륭한 목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하루에 해야 할 기도 시간을 정해 놓았고, 나만의 도덕적 기준도 세웠다. 지키지 못할 시 스스로 벌(금식)을 가했다. 하도 굶다 보니까 교인들이 금식 좀 그만하라고 하더라.(웃음) 큰 교회 목사가 되니까 이 기준을 지키지 못하겠더라. 왕이 된 기분이었다. 나와의 약속도 못 지키니까 담임목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해도 이전처럼 마음이 가지 않았다. 교인 중 누가 돌아가시면 부목사한테 장례 치러 주고 오라고 시켰다. 나는 어느새 관리인이 돼 있었다. 열정이 없었다. 노력을 안 한 건 아닌데, 잘 안 됐다. 교인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꼭 초대형 교회 담임목사 같다. 얼마나 누렸기에 이런 말씀을 하는가.(웃음)

담임할 때 교인은 1,000명 정도 됐다. 전라남도는 장로교가 주름잡고 있는데, 기하성 교회가 이 정도면 꽤 큰 편에 속한다. 사실 나는 자가용도 없고, 누린 건 별로 없다. 그저 담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섬김을 받았는데, 황송했다. 교인들이 평소 못 먹는 음식을 대접해 주고, 선물도 사 주고.

목사는 청빈해야 한다는 게 내 모토인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교인들이 섬겨 주니까. "제발 나한테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한테 베풀어 달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게 교인들 마음이다. 황송한 대접을 받는 게 한편으로 너무 부담스러웠다. 개척교회 목사들은 평생 어렵게 살지 않는가.

- 2007년 후임 목사를 청빙할 때 내건 자격 조건이 눈에 띈다. 무소유·정직·나눔·섬김을 실천하고, 교회 비전과 정관에 동의하면 교단 제한 없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고 공고했다. 요즘 일부 교회는 목사에게 학력·경력 등 '스펙'을 요구한다. 심지어 지원자 아내 이력서도 제출하라는 곳도 있다. 스펙이 아닌 '목회 정신'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면.

내가 목회할 때마다 늘 강조한 게 있다. 우리 부목사들은 잘 안다. 아직 하나님나라가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천국 독립군'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라고 주문했다. 하루에 기도 3시간씩 하고, 무소유 삶을 실천하라고 했다. 힘들다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예수처럼 죽으라고 했다. 그래야 부활하니까. 예수가 '방법'이라는 걸 믿고, 정직·섬김·나눔의 생활을 실천하라고 했다. 그런데 부교역자들이 오래가지 못했다. 3~6개월마다 바뀌었다.(웃음)

은현교회 정관의 핵심은 '재신임'이다. 목사는 6년, 장로는 5년에 한 번씩 재신임을 받는다. 신임이 안 되면 그만두게 했다. 내가 주도해서 정관에 반영했는데, 딱히 반발하는 장로는 없었다.

목회해 보니까 지식은 별게 아니더라. 목사가 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삶으로 보여 주지 않으면 허공에 손짓하는 것과 같다. 예수 정신을 가지고, 예수 닮은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대개는 관심을 안 가진다.(웃음)

"5․18민주화운동 당시 도망다녀"
부채 의식 느껴, 6월 항쟁 적극 참여
함석헌·문익환·한완상 시국 강연 초대
사회운동 통해 가난한 자 눈에 들어와

은퇴를 하고 부침도 겪었지만, 교인들이 겪은 아픔도 깨달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1982년 은현교회 3대 목사로 부임해 27년간 사역했다. 은현교회 특징으로 민주화 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중소 도시 교회가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경우는 흔치 않다.

내가 순복음 출신 목사니까, 사회를 잘 몰랐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게 된 이유가 있다. 197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1980년 5월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 처가가 전라도 광주였는데, 하필 도청 부근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이 터졌을 때였다. 장인이 빨리 도망가라고 하더라. 공수부대가 젊은 사람이라면 무조건 잡아간다는 것이다.

주변 목사들이 같이 수습하러 나가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무서워서 도망만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라리 운동에 가담했다가 죽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적어도 교포 목사가 죽을 정도면 '폭도'라는 말은 덜 들었을 테니까.

- 극우 진영에서는 여전히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다",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하는데.

경험한 바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내를 나갔을 때였다. 31사단 병사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한 병사가 내게 "빨리 (집에) 들어가라"고 그러더라.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공수부대가 오면 다 잡아간다"고 했다. 옆으로 군용 트럭이 지나가는데, 공수부대원이 군홧발로 사람을 짓이기고 있더라.

처음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을 때 공포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실탄이었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낸 것이다. 평소 예비군 훈련을 받았으니까 무기고 위치도 잘 알고 있었다. 폭동이었다면 경찰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은 시위대에 온건했다. 절대 폭력을 안 썼다. 나중에 공수부대가 경찰까지 쥐어 팼다고 들었다.

1980년 5월 광주는 나에게 괴로움을 안겨 줬다.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나는 빚을 갚고 싶었다. 교회 교육관을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내어 주고, 함석헌·문익환·한완상 등 시대의 선생들을 초대해 시국 강연을 들었다. 나는 목사니까 세무사찰을 받을 일도 없고, 빨갱이로 몰릴 일도 없으니까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 교인들 반응은 어땠나.

내가 교회에서 독재한 편인데, 다들 따라왔다.(웃음) 반발은 없었다.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면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또 이 시기를 전후로 우리 교회가 많이 알려졌다. 택시기사들도 우리 교회를 홍보해 줄 정도였다. 좋은 열매를 맺었다. 나를 미행·감시한 한 경찰은 나중에 우리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가 옳은 일 하는 것 보고 감명받았다고 하더라. 생각해 보면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많아서 가능했던 것 같다. 만약 부자나 고위 공무원이 있었다면 힘들었을 것 같다.

- 목사는 교단에 소속돼 있다. 사회운동에 대한 부담은 없었는가.

우리 교단은 이런 점에서 자유롭다. 기하성은 개교회에 별로 시비를 안 건다. 교단에서 나는 나름의 위치에 서 있었다. 조용기 목사 덕을 안 본 교회 가운데 제일 컸으니까.

- 지난해 12월 촛불 집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정상을 비정상으로 바꾸는 일만 하다 어제 (국회) 탄핵이 결정됐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개인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불행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아버지 두 분 다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치유가 안 됐다. 정상이 아니다. 애당초 대통령이 되면 안 됐다. 상처 있는 분을 아랫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본의 아니게 자기 아버지가 18년간 독재한 것을 봐 왔다. 아버지에 비하면 자기는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가 봤을 때 (박 전 대통령은) 죄를 지었는데, 그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야했으면 됐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지금과 같은 일을 겪고 있다.

한국교회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도 박 전 대통령처럼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회개를 안 하는 게 아닐까. 성경은 분명히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자위하고 있지 않나. 한국교회는 박 전 대통령처럼 정의와 공의를 잃어버렸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 수급 문제 해결하려 총회장 출마
개혁 대상들이 "교단 개혁하자" 줄 서

여수 여서동에 있는 은현교회. 김정명 목사의 뒤를 이어 최규식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2003년 기하성 서대문 교단 총회장을 지냈다. 쉽게 오르지 못하는 자리다. 보통 총회장 자리는 '돈'을 쓰고, 교단 정치를 해야 차지할 수 있다. 총회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

우리도 돈을 쓴다.(웃음) 교단 총회장을 한 이유가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회장이 되기 위해서였다. 현직 교단장이어야만 교회협 회장을 할 수 있다. 회장이 돼서 한국교회 목회자 수급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었다.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갈수록 줄어드니까 이대로 두면 심각해질 것 같았다. 교회협 회장의 공신력을 가지고 적극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교단장에 출마했다. 나는 순복음이니까 '기도발'이 먹힐 줄 알았다. 그런데 돈 쓰는 사람이 되더라.(웃음) 총회장에 낙선했다. 두 번째 나갔을 때는 쉽게 됐지만, 교회협 회장은 못 됐다.

- 교단 개혁을 위한 노력은 없었나.

총회장이 되고 보니까, 교회 상층부가 너무 부패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개혁 대상들이 나한테 "교단을 개혁하자"며 줄을 서더라. 절망했다.

- 교단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교단을 이끌어 온 박성배 전 총회장이 공금횡령으로 법정 구속됐다. 빼돌린 돈을 카지노에서 썼다는 사실이 밝혀져 많은 이에게 충격을 줬다.

박성배 개인 문제로 보면 안 된다. 개인이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가 부패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협조해 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순복음 교단 문제 중 하나는 잘못이 있으면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은혜'로 넘어가는 것이다.

"잘 믿는 사람 많아도
예수 닮은 사람 없어
'자기 부인'하고 예수 좇아야
교인들 아픔 함께 못 한 것 가장 후회"

흰 고무신을 신은 김정명 목사가 평화의 집에서 기자 일행을 맞았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일부 원로목사는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교회 문제에 관여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은현교회에서 매월 첫째 주 1~3부 예배 설교를 맡고 있다. 설교는 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외에는 전혀 개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목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원로가 볼 때는 서투르니까 조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이 '충돌'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은현교회 3대 목사인데, 1대 목사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그때 참 힘들었다.(웃음) 경험한 게 있는 나로서는 원로가 벙어리·귀머거리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일절 교회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반면 담임목사와 교회가 힘들고 지칠 때, 원로가 중심을 잡아 주고 지혜를 더해 줄 수 있어서 좋다는 의견도 있다.

담임목사가 조언을 부탁해 올 때는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나서면 분란이 생긴다. 기도 정도 해 주는 게 도리인 것 같다.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개혁을 외치며 '나부터 회개 운동'과 각종 세미나 등을 열고 있다.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본질을 벗어난 것 같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다. 세상에 예수 잘 믿는 사람, 기도 많이 하는 사람 정말 많다. 그런데 정작 예수 닮은 사람은 없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닮을 수 없다. 제도나 프로그램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예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믿는 사람 대부분은 교만하고 욕심이 많다.

이게 안 바뀌는 한 뭘 해도 안 된다. 예수의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뉴스앤조이>도 마찬가지다. 문제 있는 목사들 폭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

복음서 속 제자들을 보라. 다들 예수 덕 보려고 따라다녔다. 나중에 상황이 안 좋아지니까, 버리고 튀고.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딱 한마디했다. 성령 받으라고. 순복음 교회가 실수한 게 있는데, 성령 받고 예언하고 방언하는 은사만 알고 있다. 진짜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해 자기 부인이 일어난다. 요직을 차지하려는 이들이 한마음 되고, 돈독에 오른 이들이 유무상통하게 된다.

안식년이 왜 있는가. 복 받은 자가 소외된 자들을 위해 나눠 주는 일을 하라고 있는 거다. 재산을 더 늘리고, 받은 복을 몇 배로 튀길까 궁리하라고 있는 게 아니다. 예전에 심방을 갔는데, 그 교인은 새 아파트를 산 상태였다. 그런데 3,000~5,000만 원을 들여 리모델링했더라. 하다못해 노름꾼도 돈을 따면 개평을 준다. 집을 새로 살 정도로 복을 받았으면, 가난한 사람한테 개평을 줘야 할 거 아닌가. 복을 받았으면 나눌 줄 알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노름꾼보다 못하다.

- 일부 대형 교회는 예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항변하는데.

그걸 생색내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꼭 필요한 곳으로 지원금이 흐르게 해야 한다.

- 지난 목회 여정과 삶을 돌아봤을 때 아쉽거나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교인들 아픔에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쉽다. 내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그렇고.

- 앞서 설명한 '목회 열정'과 관련해 후배 목회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열정 없이, 관성대로 목회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텐데.

열정이 없기도 하고, 잘못돼 있다. 예를 들어, 설교를 잘하는 것보다 설교자다운 설교자가 돼야 한다. 삶으로 보여 줘야 한다. 설교자 준비는 안 하고, 설교만 잘하려고 하면 안 된다. 먼저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다운 설교자가 돼야 한다. 신학교에서는 이걸 안 가르친다. 테크닉만 가르친다. 설교는 연설일 뿐이다. 삶으로 보여 줘야 한다.

정말 필요한 건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 유혹을 하면, 생각을 해야 한다. 유혹에 걸려들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을 하고, 그 다음 일도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본능대로 사는 사람은 생각을 안 한다. 영혼(자기 자신)과도 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만일 화나는 일이 있으면, '내 영혼아 왜 화를 내니'라고 말을 걸면서 대화해야 한다. 그러면 쉽게 문제가 풀리는 경우도 있다.

세상에는 거짓이 판을 친다. 거짓·교만과 싸워 이기고, 정직·겸손·온유한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안 된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가능하다.

김 목사는 조기 은퇴를 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지금 목회를 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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