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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든 진보든 명예욕·물질욕이 적폐"

[종교개혁 500주년, 원로에게 듣다] '재야 운동가' 김상근 목사

이용필 기자   기사승인 2017.07.30  13: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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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농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촛불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1,000만 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와 '적폐 청산'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올해 5월, 새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촛불 시민만 있는 건 아닙니다. 국정 농단은 누군가에 의해 기획·조작된 것이라며 태극기를 흔든 세력도 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인도 많이 참여했는데요. 이들은 하나같이 "나라가 망하면 종교도, 신앙도 없다", "친북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 교회도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국정 농단을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의 문제로 본 것입니다.

정치 이슈가 터질 때마다 교계도 덩달아 들썩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는 130년밖에 안 되지만,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정치권을 이용·압박했고, 적잖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혁을 외치고 있습니다. 교회의 정치 참여에 있어서도 개혁돼야 할 지점은 분명히 존재해 보입니다.

교계 안에서는 '목사'로, 밖에서는 '재야인사'로 불리는 김상근 목사를 만났습니다. 김 목사는 목회를 한 시간보다 기관 사역을 한 날이 많습니다.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를 나와 수도교회 담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부회장, 김대중 정부의 제2건국위원회 상임의장,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참여정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민주평화통일회의 수석부의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 기자 주

목회자이자 재야 운동가로 사역해 온 김상근 목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김상근 목사(78)는 교계 진보 진영에서 '어른'으로 통한다. 엄혹했던 1970~19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했다. 민주화가 된 이후에는 통일 운동에 매진했다. 여든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극우 진영에서는 그를 '친북 인사', '가짜 목사', '빨갱이'라고 말한다. 한총련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1,000인 선언을 시작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 운동 등을 해 왔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교회협 비상시국대책회의 상임의장까지 지냈다.

정치적 성향 자체를 떠나, 목사인지 시민운동가인지 헷갈릴 정도다. 김 목사는 1939년생이다. 전북 군산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고, 아버지는 북한 인민군에게 사형당했다. 반공 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을 죽이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다. 반면 북한 인민군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켜 준 미국은 '천사'의 나라였다.

반공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천사의 나라로 생각한 미국은 전두환 정권의 학살을 방조했다. 더 이상 천사가 아니었다. 민간인 학살은 북한 인민군뿐만 아니라 남한 군대도, 미군도 자행했다는 것을 알았다. 북한에도 자기와 똑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음이 곧장 용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북한을 용서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용서의 중심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있었다. 40년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는 아버지를 죽인 북한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 길로 통일 운동과 시민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목사가 목회는 안 하고 정치만 한다"는 비판도 수없이 들었다. 김 목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민주 사회 안에서 시민은 정치를 벗어나 살 수 없으며, 목사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굵직한 정치 사안이 터질 때마다 교계 단체, 시민사회 단체 가리지 않고 참여해 목소리를 냈다. 김 목사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 사랑·정의·평등·평화 등을 실현하기 위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목사도 정치 활동은 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단 성경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전제 조건을 달았다. 교인에게 영향을 줘도 안 된다고 말했다. 7월 28일 서울 공덕동에 있는 카페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양복 상의에는 세월호 배지가 달려 있었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는 '맹목적 신앙'
교인에게 정치 성향 드러내면 안 돼
정치 활동 시 성서를 원칙 삼아야"

- 탄핵 정국 당시 '탄핵 반대'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드는 기독교인이 많았다이들은 "나라가 망하면 종교도, 신앙도 없다", "친북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 교회도 망한다"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신앙보다 이념이 앞서는 것 같아 보였다.

나와 가까운 장로님이 있다. 내가 평소에 세월호 배지를 차고 다니니까, 언제까지 차고 다닐 거냐며 떼라고 하더라. 그 이야기를 들은 후 한참 뒤 만났는데, 장로님이 태극기와 성조기 배지를 달고 있더라. 당장 떼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웃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태극기 집회가 말하는 '좌파 정부'가 집권했는데 나라가 망했는가. 북한에 나라를 갖다 바칠 거라고 주장했는데, 그렇게 됐는가. 그럴 일도, 그럴 수도 없다. 기울어 가던 나라가 안정되고, 정상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태극기 집회에 참가했던 기독교인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라는 자기 각성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 기독교인은 신앙보다 이념이 앞선 것 같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건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비적 신앙, 극우적 신앙, 박정희 신앙이라고 본다. 아주 맹목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진보 진영처럼 조직을 꾸려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 수정 없는 자세는 근본주의 신앙에 가까우며 매우 위험하다.

- 19대 대선에서 전광훈 목사를 중심으로 한 기독자유당이 '교계 대표'를 자처하며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지지 선언했다. 그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나.

부끄러웠다. 국민 대다수와는 다른 판단을 했으니까. 그런 판단을 하는 자들이 기독교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끄러웠다. 젊은이들이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는 목사들을 보고, 그들이 속한 교회에 나가겠다는 생각을 할까. 아니라고 본다.

- 기독자유당이 기자회견을 한 날, '목회자 3,000인'도 국회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독자유당보다 덜했지만, 역시 비판을 받았다.

사실 나한테도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 달라는) 제의가 왔다. 거절했다. 일단 대선의 큰 흐름이 만들어진 상황이었고, 굳이 나설 국면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분들은 혹여나 국민의 보수성이 발동해 대선판이 뒤집히지 않을까 걱정해 나선 것 같다. 적폐를 청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에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해가 된다.

김상근 목사는, 목사가 교인을 상대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보수든 진보든 목회자의 정치 참여는 어디까지 허용 가능하다고 보는가.

교인을 상대로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서에 나오는 원칙(사랑·정의·평등·평화 등)을 천명해야 한다. 최종 판단은 교인 몫으로 남겨야 한다.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국회의원 선거운동 기간 중 지방에 있는 한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적 있다. 당시 야당 국회의원 후보와 함께 갔다. 마침 교회에 여당 후보도 왔더라. 그런데 목사가 설교 시간에 여당 후보에게 "왜 우리 교회에 함부로 오냐"고 면박을 주더라. 내가 더 민망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다수 큰 교회는 정치인이 오면 일으켜 세우거나 발언 기회를 주거나 기도를 하는데, 이런 건 삼갈 필요가 있다.

- 그렇다면 교회 밖에서 목회자가 정치 활동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자유롭게 했다.(웃음) 내가 목회할 때 교인의 80%는 여당을 지지하고, 20%는 야당을 지지했다. 밖에서 내가 그러고 다녀도 교인들은 용납해 줬다. 정치적인 설교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철저히 성서를 바탕으로 했다. 누구를 지지하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교인들은 어차피 아니까.

-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기 전 지난해 7월 21일 교회협은 비상시국대책회의를 발족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발족한 지 25년 만이었다. 이후 탄핵 정국이 형성이 됐고, 촛불 혁명이 일어났다. 시기가 절묘한데, 비상대책회의가 꾸려진 배경은 무엇이었나.

교회협이 비상시국대책회의를 연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면 나라가 망하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도 대통령을 했다면 정말 나라가 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약 25년 전 교회협은 엄혹한 시대에 맞서기 위해 비상시국대책회의를 조직한 적 있다. 원래 교회협은 위원회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회의 조직을 따로 만들었다. 서로 토론하고, 협의해서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였다. 현역뿐만 아니라 나와 같이 은퇴한 사람도 부르고, 복음주의 인사들도 함께했다. 교회협이 지향하는 '에큐메니컬'을 실현한 셈이다.

교회협은 사회를 바로 세우고, 잘못 가는 위정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을 스스로 느끼는 조직이다. (교회협) 역사가 그렇다. 나에게 상임의장을 맡아 달라 요청이 들어왔는데, 오랜만에 긴장감을 맛봤다. 막상 하려니 어려움도 뒤따랐다.

25년 전과 다른 점도 분명 존재했다. 과거에는 군사정권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었다면, 이번에는 비탈길로 내리 달리는 국가에 제동을 걸고, 바로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현역, 원로, 복음주의권 인사들이 참여한 비상시국대책회의는 폭넓은 합의를 통해 시국과 관련한 목소리를 냈다.

- 교회협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존재감이 없어졌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불행한 일이다. 교회협이 1970~1980년처럼 뭘 하는 것 같긴 한데, 내용과 실효성이 없다. 반면 과거에 비해 몸집은 훨씬 커졌다. 에큐메니컬 관점에서 보면 조직이 커지는 건 필연적이다. 여러 활동을 하다 보니까.

그런데 몸집을 키울 때 무엇을 위해 키울지 고민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조직을 꾸렸어야 한다. 교회협은 어느 순간 덩치 경쟁의 구도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몸집을 유지해야 하니 다른 연합 기구에 속해 있는 교단에게도 회원권을 줬다. 이중 멤버십이 허용되니까,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고, 힘도 붙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간과할 수 없는 일인데 바로 재정 문제다. 몸집을 유지해야 하니 큰 교단이나 대형 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규모가 큰 곳일수록 보수적이고, 보수 정권과도 가까웠다. 어느 정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올해 교회협 총무가 바뀌는데, 이번 계기로 새로워져야 한다. 정체성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회원 교단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만 한국교회의 참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김상근'이라는 석 자 안에는 '목사'와 '재야 운동가'가 공존한다. 굳이 따진다면 둘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나.

(망설임 없이) 나는 목사다.(웃음) 실제 재야에서도 목사로 통했다. 상임대표나 의장을 맡았어도 목사로 불리었다. (목사) 정체성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기도와 성찰, 묵상 등을 많이 했다. 시민운동을 하면서도 기독교적인 언사를 의도적으로 많이 쓰기도 했다. 그만큼 기본을 지키고 싶었다.

- "목사가 왜 정치를 하느냐"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을 텐데.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게 정치와 연결돼 있다. 기본적으로 누구나 투표를 한다. 정치적 판단과 행위를 하는 셈이다. 정치에서 분리됐거나, 초월할 수 있는 시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의 (활동) 폭이 너무 넓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목사가 왜 정치하냐"고 비판하는 건 불가하다. 주로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곳을 아는데, 내가 볼 때 오히려 그쪽이 정치 목사다.

우리가 치열하게 박정희·전두환 독재와 투쟁할 때 저들은 국가조찬기도회를 열고, 열심히 기도해 줬다. 이것이야말로 굉장히 정치적인 행위다. 같은 행동을 하면서 자기는 괜찮고, 남은 잘못됐다고 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행위는 비난할 수 있다. 목사가 권력을 잡기 위한 행태 말이다. 집권 한번 해 보겠다고 기독교 당을 만드는 게 말이 되는가. 지난 20대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은) 운이 좋았으면, 국회의원 1명을 배출할 수 있었다. 실제 그렇게 된다 한들 뭘 할 수 있겠는가. 이런 행위야말로 "목사가 왜 정치하냐"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

- 기독자유당은 1석만 차지해도 동성애·이슬람·차별금지법을 막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답변 없이 미소만 지음)

북한군에 총살당한 아버지
40년간 김일성 향한 증오
5·18 후 친미·반공 의식 사라져

지금은 평화통일에 헌신하고 있지만, 한때는 반공주의자였다고 고백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1939년생으로 일제강점기 말에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광복과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나는 전북 군산에 살았는데, 1945년 광경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동네에 일본인이 그렇게 많이 살았다. 호남 곡창지대에서 거둬들인 쌀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일본인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던 동네다. 당시 내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모르고 살 정도였다. 해방이 되고 일본 사람들이 배를 타고 돌아갈 때 울고불고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해방 이후 우리 가족은 무역상을 하던 일본 사람이 살던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느 날 여름에 다다미(일본식 돗자리)를 말리려고 걷었는데, 그 안에 돈다발이 쫙 깔려 있었다. 그렇게 많은 돈은 처음 봤다. 아마 그 일본인은 다시 돌아올 줄 알고 돈을 놓고 간 듯하다. 아버지가 리어카에 돈을 실어 조선은행에 갔다 줬다.

일본인이 떠난 군산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밤에는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뛰어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서북청년단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때 아버지를 잃었다. 북한 정치보위부에 체포돼 사형당했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죽물 공장을 운영했다. 집안이 비교적 부유했다. 일본인이 떠난 관제소의 소장을 맡기도 했다. 저쪽에서 볼 때는 부르주아에 부역자니까 사형시킨 것 같다. 사형 전 아버지를 멀리서 지켜봤다. 걸어가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사형당하고 한 달 만에 미군에 의해 군산은 수복됐다. 아버지 주검을 찾았는데, 너무 부패해서 옮길 수 없었다. 얼굴은 회칼로 난도질당해 있었다. 인민군이 총살을 하고, 시신 훼손은 남쪽 공산당이 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자리에 묘를 세웠다. 전쟁 이후 우리 가족은 가재도구를 내다 파는 등 어려움 속에 지내야 했다.

- 이렇게 가슴 아픈 경험을 하면 반공 의식이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목사님은 반공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전쟁 이후 삶이 굉장히 고달팠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길에 아버지의 묘가 있어서 수시로 들렀다. 아버지 묘를 볼 때마다 김일성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크면 김일성 너는 내 손으로 죽인다'고 생각했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어쩌다가 평화통일 운동과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앞장서게 됐는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 이전까지, 민간인 학살은 저놈(인민군)만 했지, 우리(남한)가 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 광주 사건이 터지고 눈을 새로 뜨게 됐다. 당시 교회협이 광주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때 위원장을 맡았다. 미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그전까지 나에게 미국은 천사였다.

6·25 당시 미군이 군산을 수복할 때 나는 길거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더는 도망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미를 넘어서 미국을 천사의 나라로 생각했다.

근데 광주 사건이 터지고 나서, 미국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작전권이 미국한테 있는데 왜 (학살을) 안 막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역사를 공부하게 됐다. 민간인 학살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도, 미국도 한 것을 알았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 아버지가 학살당한 것처럼 우리 군도 북한 주민을 학살한 것이다. 북에도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싶었다. 이승만·박정희 욕하고….

- 깨달음 이후 북한에 대한 증오는 사라졌는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마음이 쉽게 변화되지는 않더라. 굉장히 큰 내적 고통을 겪었다. 화해하라는 성경 구절을 보고,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따졌다. '당신은 아버지의 학살을 경험해 봤는가', '학살당해 보고 이런 말씀하는 거냐'고. 정말 처절했다. 결국에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에 승복하게 되더라. 그 과정은 길고 깊었지만, 결국 따르게 됐다.

1990년대 들어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협력회의에 참석한 적 있는데, 당시 북한 개신교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내가 살아온 삶을 간단히 전달하고, 나와 같은 사람이 북한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위정자들이 참회할 리 없으니 교회가 앞장서 민족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의 역사를 만들자고 했다.

기독교 통해 사회운동 꿈꾸다
"목사직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돼
명예욕·물질욕은 교회 적폐 요소
자리 연연하니 '마피아' 소리 들어"

-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뭔가.

원래 목회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공대를 다니다가, 장공 김재준 목사 글을 보고 한신대에 입학했다. 그 글을 봤을 때, 시대적 절망을 겪는 나와 우리 가족이 어쩌면 기독교로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당시 기독교는 내게 커다란 존재로 보였다. 이렇게 큰 세력이 사회의 희망을 주는 동력으로 작동한다면 시대적 절망도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시 교회가 부흥 집회도 많이 했는데, 뭘 해도 수백 수천 명이 모였다. 이 힘, 기독교의 힘을 사회에 희망을 주는 동력으로 삼을 수 없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다. 신학대 공부를 마치고, YMCA에 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동환 목사가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에 와서 도와 달라 하더라. 그 당시 문 목사는 한신대 교수로 재직하며 수도교회 담임으로 있었다. 갈 때는 3년만 있다 나올 생각이었는데, 전도사·부목사·담임목사를 하며 15년을 지냈다. (웃음)

젊은 신학도들을 향해 명예욕과 물질욕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 '사회에 희망을 주는 교회 운동'은 지금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해서 젊은 신학도들에게 조언한다면.

칼바르트 선생이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했다. 신문에만 빠져서도 안 되고, 교회에만 매몰돼서도 안 된다. 둘 다 쥐어야 한다. 대부분의 목사가 그런 건 아니지만, 항간에는 높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 지도자가 되기 위해 목사를 지향하는 이들이 있다. 촌시라도 그런 생각 갖지 말라.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명예욕·물질욕 등 자본주의 생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교회 적폐다. 지금은 교단 총회장·총무 되려면 수천만 원 넘게 써야 한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예수는 낮은 자리에 가기 위해 오셨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셨다.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목사가 돼야 한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보수 교단이나 대형 교회 말고도, 교계 단체가 밀집한 종로5가에는 "'진보 마피아' 때문에 에큐메니컬 진영의 발전이 없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편법과 인맥을 동원하는 일부 세력을 비판하는 말이기도 한데, 이 부분에 대한 반성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종로5가 마피아'라는 소리가 왜 나오겠는가. 결국 (진보 진영) 목사들도 자리에 탐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어떤 자리에 오르면, 그게 성공의 증표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마피아 이야기가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정치권과의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진보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면 교회협 쪽 인사들이 정부 일을 하기도 했으니까. 나름 변명하자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질 때 나를 포함한 교계 진보 인사 몇몇이 정부에서 일을 했다. 정치권에서 오라고 하니까 좋다고 바로 간 건 아니다. 각자 생각하는 사회적 선교와 맞닿아 있다는 판단이 설 경우 움직였다.

- 목사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장공 김재준 목사다. 그분의 글을 읽고 한국신학대에 갔으니까. 문동환 목사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품성과 혼이 맑았다. 박형규 목사에게서는 성육신 생활을, 김관성 목사에게서는 에큐메니컬 운동 정신을 배웠다. 이어령 선생에게도 배우고. 많은 어른에게서 배웠다. 나는 행복한 세대다.(웃음)

- 이 시대 목회자가 갖춰야 할 가장 큰 자질이나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가슴'이 필요하다. 아우성, 울부짖음, 아픔, 고통, 실존, 사회구조의 병폐를 느낄 수 있는 가슴 말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직자라면 이 가슴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자칫 소시민적 행복에 빠지거나, 출세와 성공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 하나님의 가슴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재야 운동가가 바라보는 예수는 어떤 모습인가.

국면마다 새롭게 보인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한테 설명한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상상할 수 없는 이 낙차, 낙차를 감히 감당하고 몸소 이뤄 낸 분이다. 그러나 나는 조그만 낙차조차 극복하지 못한다. 정말 1cm의 낙차도 어렵고 힘든데… 예수님은 상상할 수 없는 깊이의 낙차를 극복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 지난 삶을 돌아봤을 때 아쉽거나 후회되는 점이 있다면.

많다. 나더러 자서전 쓰라는 사람이 많은데 극구 사양한다. 자서전을 쓸 만큼 (잘)살지 못했다. 참회록을 쓰라면 쓰겠는데, 쓸 용기는 또 없다. 실제 그렇다. 수도교회에서 15년 목회했는데, 돌이켜 보면 너무 부족했다. 교인들에게 미안하다. 내가 가장 치열하게 몸담은 게 기장 총무인데, 돌이켜 보면 회한들이 구석구석 남아 있다. 그렇다고 삶 전체가 실패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고,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미흡하다. 퍽 아쉽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나이 80이 다 돼 가는데, 재야 사회운동도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다. 뒷자리에서 박수·격려하는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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