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덩케르크(Dunkirk)'(201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편집자 주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영화 '덩케르크(Dunkirk)'(2017)는 쉴 틈을 주지 않고 곧장 전쟁 한복판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예열 시간을 기대한 관객은 바로 옆에서 터지는 듯한 포탄 소리에 깜짝 놀라고, 영화 속 군인들처럼 귀를 막고 움츠러든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쟁은 수많은 '개인'을 지워 버린다. 전쟁은 개개인을 '적'과 '아군'으로 양분한다. '덩케르크'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1970~) 감독은 지워진 개인의 자리에 오롯이 '인간'을 남긴다. 러닝타임 내내 생존을 위한 분투를 비중 있게 보여 주는 토미(핀 화이트헤드 분)를 맡은 배우가 무명(無名)이라는 사실도 '개인'을 지워 낸다는 의미에서 우연은 아니다. 인물들 대사도 거의 없다. 폭발음, 웅성거림, 비행기 소리 등이 그 자리를 메꾼다.

'덩케르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40년,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서 실제 있었던 사상 최대의 탈출 작전(다이나모 작전)을 그린 영화다. 실화를 옮겨 놓은 이 영화는 "생존은 공포이자 탐욕이고 본능을 농락하는 운명의 장난"이라는 다소 감상적인 대사처럼 죽음과 맞닥뜨리는 인간의 실존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덩케르크 해변에 나와 탈출 선박을 기다리는 병사들(위). 폭격이 떨어질까 봐 하늘을 쳐다보는 병사가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토미가 독일군에서 쫓겨 도망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아래). 영화 '덩케르크' 스틸컷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하는 잔혹한 현실에서는 전우애나 생명 경외의 태도마저 살아남기 위한 도구가 된다. 토미와 깁슨(아뉴린 바나드 분)이 들것에 실린 부상자를 나르는 이유는 어떻게든 탈출을 기다리는 병사들 앞 열로 이동해 먼저 배를 타기 위해서다. 영화는 개별적인 존재가 지워지고 생존 본능만 남은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거나 이를 피하려 아귀다툼을 벌이는 군인들 모습을 계속해서 비춘다.

적(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적은 오히려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재난과 같은 모습이다. 어뢰가 터지거나 포탄이 떨어지는 형태로 등장할 뿐이다. 적군인 독일 군인이 등장하는 신은 영화 말미에 1번 있다. 많은 이가 이 영화를 두고 재난 영화의 문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오히려 거대한 운명 앞에 분투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탈출 작전을 위해 징발한 민간 선박들이 덩케르크 해변에 도착하면서 비로소 극에 달했다가 결말로 내달린다. 다이나모 작전을 실행하려 했던 영국군은 덩케르크에 갇힌 군인들을 태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선박 숫자 때문에 '선박 징발령'을 내린다. 실제로 민간인들은 화물선, 유람선, 어선, 호화 요트 등을 끌고 영국기를 게양한 채 덩케르크 해변으로 배를 몰았다. 그렇게 900여 척의 철수 선단이 확보됐다.

포탄이 떨어져서 들것에 실린 부상자를 나르던 병사들이 사망하자, 토미와 깁슨은 부상자를 이용해 앞줄로 이동하려고 한다(위). 바다 위에서 큰 선박이 오기를 기다리는 병사들(아래). 영화 '덩케르크' 스틸컷

주목할 사실은 인간이 연대하고 구출되는 그 자리에 '개인'이 호명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잔교: 일주일', '바다: 하루', '하늘: 한 시간'이라는 세 가지 시공간을 오가는데, 이 중 '바다: 하루'는 문스톤호를 이끌고 구출 작전에 가담하는 선주 도슨(마크 라이런스 분)의 모습을 비춘다. 도슨은 전쟁에 나간 군인들을 '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공군기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후 잠깐 언급되는 도슨의 둘째 아들 피터의 말에 따르면, 도슨의 첫째 아들은 공군 파일럿으로 전쟁 초기에 전사했다.

영화는 지우는 것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듯 보이는데, 개인의 개별성은 내보이지 않고 극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군인들의 개인사에도 무관심하다. 그런 가운데 구출 서사의 바닥에 도슨의 개인사가 숨겨져 있다. 영화 말미 덩케르크를 탈출한 군인들 한 명 한 명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는 영국민들 모습이 나오는데, 확장시켜 말하면 구출된 33만 8,226명은 종국에 33만 8,226개의 생명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탈출한 수많은 개인의 존재는 그렇게 회복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병사들과 도슨(아래). 영화 '덩케르크' 스틸컷

놀란 감독은 작은 선박들이 전장에 찾아온 '기적'을 두고 "구출을 위해 항해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위대한 공동체의 힘을 보여 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인 개인들의 연대는 인류애와 '공동체'라는 가능성으로 수렴한다.

이스라엘 소설가이자 평화 운동가인 아모스 오즈(Amos Oz, 1939~)는 <광신자 치유>(세종서적)에서 '섬이 아닌 반도(半島)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했다. 절반은 바다로 튀어나오고, 절반은 대륙에 붙은 반도. 인간은 타자와 떨어져 있는 동시에 이어져 있는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다. 각박한 삶의 현실 가운데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을 극복하는 길은 이렇듯 존재의 개별성과 보편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지점을 지적한 철학자도 있다. 그는 '서로주체성'이라는 표현을 썼다. 인간이라면, 서로의 주체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차이를 차이로 보존하면서 '같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풍요로운 다양성을 드러내는 길이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