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신박하지만 씁쓸한 보드 게임이 곧 출시된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를 주제로 하는 '이지혜 게임'이다. 재미를 목표로 하는 여느 보드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이지혜 게임'은 여성이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겪을 수 있는 현실을 담았다. 길 가다 성추행을 당하거나 남자 선배들에게 외모 품평을 당하는 상황을 게임을 통해 보여 준다.

보드 게임에는 주인공 이지혜뿐 아니라 아빠, 엄마, 남동생, 남자 친구, 동성 친구 등 지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각 이지혜가 사회생활하면서 필요한 덕목을 하나씩 갖고 있다. 이를테면 아빠는 사회성, 엄마는 자존감, 남자 친구는 순응도를 담당한다. 이들은 이지혜가 현실에서 겪는 상황을 보고, 보드 게임 답안지에 나온 예시 중 한 가지를 골라 이지혜에게 조언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자 선배에게 외모 품평을 당한 경우 △못 들은 척 자리를 뜬다 △선배들에게 화를 낸다 △거울을 보고 황급히 화장을 고친다 △테이블에서 남자 선배 얼굴 순위를 매긴다 중 한 가지를 골라야 한다. 이지혜는 주변 사람이 골라 준 답변대로만 행동할 수 있다. 만약 이지혜 스펙 중 하나라도 0이 나오면 게임은 끝난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거나, 사회성이 떨어지면 게임이 끝나는 게 룰이다. 주변 인물은 서로 궁리하며 각자가 맡은 이지혜의 스펙이 줄어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변 인물이 그녀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여성의 삶을 간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이지혜 게임'이 출시된다.

현재 '이지혜 게임'은 제작비 충당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고 있다. 300만 원 목표 액 중 270만 원가량이 채워졌다. 펀딩이 끝나면 '이지혜 게임'은 9월 중순 시중에 판매될 예정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다소 생소한 이 게임을 두고 "초현실적인 게임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떠오른다", "게임에 성공하고도 씁쓸할 것 같다"고 평했다. 

보드 게임은 '놀래미', '더쿠'라는 닉네임을 쓰는 두 사람이 제작했다. 이들은 페미니즘을 접한 뒤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이지혜 게임'을 기획했다고 했다. 두 사람을 7월 27일 서울 건국대 근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 '이지혜 게임'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놀래미 /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었다. 작년에 페미니즘을 둘러싸고 많은 일이 있었다.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때 여성들이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표현했다. 그 말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나 역시 사회에 존재하지만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외 여러 여성 문제를 접하면서 이게 비단 나만의 일, 나의 잘못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성들에게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페미니즘 이슈는 계속 발생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라. 더쿠와 이야기하는 도중 답답한 마음으로 '이지혜 게임'을 기획하게 됐다.

더쿠 / 나는 '더쿠'라는 출판물을 만든다. 놀래미는 에디터로 활동 중이다. 평소 놀래미가 페미니즘, 여성 문제를 아침저녁으로 이야기했다. 내가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대화할 때마다 공감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이런 일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여성들이 겪는 상황을 들으면서 콘텐츠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보드 게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나. 책을 만드는 게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더쿠 / 보드 게임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함이 있다. 내가 지금 출판물을 만들고 있지만, 책에는 한계가 있다. 책을 보고 느낀 것들이 잔상처럼 있다가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게임은 좀 다르더라.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이나 영화와 달리 직접 상황극에서 역할을 맡으면, 한국 여성 이지혜의 상황을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놀래미 / 찾아보니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보드 게임은 전무했다. 물론 다른 게임에서도 여성은 등장한다. 여성이 주인공인 게임도 있지만 성적 대상화됐거나 고정된 성역할이 부여됐다. 아직까지 게임이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일단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게임을 제작하면, 이후 다른 곳에서도 페미니즘 게임 콘텐츠를 만들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했다.

- 이름을 '이지혜 게임'이라고 정한 이유가 있나.

놀래미 / 처음에는 '블러드 헤머'였다. 답답한 현실을 보면서 과격하게 네이밍을 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람들의 공감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990년대에 가장 많이 사용한, 있을 법한 이름으로 짓게 됐다. 이지혜라는 이름이 가장 보편적인 것 같더라.

- 보드 게임 스토리는 어떻게 만들었나.

놀래미 / 이지혜의 일생을 네 가지로 나눴다. 유년기·청년기·중년기·노년기다. 일단 유년기와 청년기는 나의 경험은 물론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참고했다. 예를 들어 이지혜는 어릴 때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한 할머니가 자신과 남동생을 차별하는 일을 경험한다. 우주 비행사가 꿈이라는 이지혜에게 친척들은 "넌 얼굴이 예쁘니까 미스코리아를 해"라고 말하기도 하고. 청년 때는 대학 개강 총회에서 외모 품평을 당한다.

더쿠 / 중년기나 노년기의 경우에는 신문 기사를 참고하고 있다.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 주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중년 여성, 경력 단절 여성, 노인 빈곤과 학대를 당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 제목은 '이지혜 게임'인데, 역할극 중 이지혜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놀래미 / 맞다. 게임에서 이지혜는 선택권이 없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여자로서 살기 힘들다고 하면 '이렇게 했어야지', '왜 그렇게 행동했어'라고 옆에서 말하는 사람이 많다. 게임에서는 그런 현실을 반영해 사람들 조언대로 살아 보도록 했다.

게임 도중 이지혜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 조언을 듣고 행동했을 때, 스스로가 어떻게 변화됐는지를 간간히 설명한다. 자존감이 얼마나 떨어졌고,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는지 등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과정을 들으면 마음이 착잡해질 것이다. 이지혜는 스펙이 0으로 떨어지지 않아 살아남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마음은 너덜너덜해졌을 거다. 사회에서 생존했다는 말은, 결국 이지혜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여러 상황을 겪고 인격이 깎이면서 살아남은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쿠 / 이지혜를 둘러싼 지인들도 마찬가지다. 우승해도 마음은 찝찝해진다. 생존에 맞춰 게임을 진행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하고 싶지 않아도 이지혜에게 참견하고 잔소리해야 한다. "이렇게 선택해"라고 말하는 순간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거다. 이지혜가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걸 듣다 보면, '내가 한 말이 한 사람의 삶에 이런 영향을 미칠 수 있겠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을 것 같다.

- 남성인 더쿠 씨는 여성 문제를 다룬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어렵지 않았나.

더쿠 / 나는 스토리 제작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여서 대부분 놀래미가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에피소드 회의를 할 때, 놀래미가 성추행 문제를 넣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여성의 성추행 문제는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놀래미에게 성추행은 일반 여성이 쉽게 겪는 일이 아니고, 뉴스에서 다뤄질 법한 일 아니냐고 물어봤다. 놀래미가 그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속상해했다.

지인들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잘 몰랐다. 놀래미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처음에 '시선 강간'을 말했을 때 설마, 했다. 그런데 실제로 남성들이 길거리에서 여성들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더라. 현실을 알게 되니 보이는 게 많아졌다. 여성 문제가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점이 많은데 내가 직접 겪지 못하니 몰랐던 것뿐이었다. 남성들이 '이지혜 게임'을 통해 뉴스에 빈번히 나오는 여성 문제가 일부 여성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나.

놀래미 / 남성들에게 "네가 흑백논리에 빠진 거 아니냐"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들 역시 인생에서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어려움을 토로했던 여성이 없었던 것이다. '이지혜 게임'에서 다루려고 하는 현실이 일부 여성의 문제라고만 생각한 거 같다.

최소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부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자기를 믿어 줘야 할 가족, 지인이 현실을 부정하는 말을 하면 더 상처받기 때문이다.

더쿠 / 어떤 남성분이 "'이지혜 게임'만 만들 게 아니라 남성 인권을 위한 '이지훈 게임'도 만들라"고 했다. 답을 따로 하지 않았지만, 본질을 생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종종 이런 메시지가 오는데, 왜 여성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지 먼저 생각해 줬으면 한다.

- 이 게임을 어떤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나.

놀래미 / 친구들끼리도 할 수 있고, 가족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가족과 함께 페미니즘, 여성 인권 등의 주제로 대화하기 쉽지 않다. '이지혜 게임'을 하면서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남녀노소 상관없이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느끼던 사람들이 해도 좋겠다. 한국 사회에 무수히 많은 이지혜가 있다는 점을 느끼고 서로 응원했으면 한다.

- 크라우드 펀딩을 하고 있다. 이지혜 게임은 언제 시중에서 볼 수 있나.

더쿠 / 텀블벅에서 30일 정도 더 후원을 받을 예정이다. 목표 금액은 300만 원으로, 제작비에 쓰인다. 지금 270만 원 정도 모였다. 목표액은 300만 원이지만, 많이 모일수록 퀄리티 높은 보드 게임을 만들 수 있다. 펀딩 금액이 더 늘어나면 더 많은 에피소드를 추가하려고 한다. 어떤 날은 0원 모일 때도 있었는데, 요 근래 많이 후원해 주셔서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후원자는 9월 중순 '이지혜 게임'을 받게 되고, 이후 독립 출판 서점이나 동네 책방에서 판매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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