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페미니즘 입문서로 꼽히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의 저자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가 방한했다. 그녀는 7월 25일 성평등 주간을 맞아, 서울특별시 여성가족재단이 주최한 '여성 혐오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 대담에 패널로 참석했다. 400여 명이 행사가 진행된 성평등도서관을 빼곡히 메웠다. 의자가 모자라 바닥에 앉은 사람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우에노 치즈코가 이야기할 때 필기하거나 사진을 찍는 등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현재 한국 페미니즘이 주로 다루는 '여성 혐오' 개념을 소개했다. 그는 여성 혐오가 '호모소셜(Homosocial)', '호모포비아(Homophobia)' 개념과 함께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모소셜을 대체할 정확한 번역어는 없지만, 통상 호모소셜은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이 서로를 인정해 주는 연대를 뜻한다. 이들은 '남성다움'을 강조한다. 성 역할에서 남성다움을 과시할 뿐 아니라, 성관계 중 삽입당하는 자가 아니라 삽입하는 자로 살아남는 것을 중대시한다. '님성다움'이 없는 사람은 패배자 취급을 당한다.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네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남자에게 남자로 인정받은 남자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이런 남자는 반드시 여성화된다)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은 여자 △남자에게 여자로 인정받지 못한 여자다. 기준은 호모소셜한 남자들이 만든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 혐오를, 여성은 자기 혐오를 하게 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우에노 치즈코가 방한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우에노 치즈코는 호모소셜 집단이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호모포비아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보았다. 그녀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계집에 대한 경계는 주체 위치로부터의 전락, 즉 '나도 언젠가 성적 객체화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남성 집단 사이에서는 '계집'에 대한 마녀사냥이 격렬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호모포비아라고 한다"(38쪽)고 설명한다.

호모소셜한 남성이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을 성적 객체화하고, 이를 남성들이 서로 승인해 연대가 성립한다는 의미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 여성 멸시가 여성 혐오를 만든다고 했다. 한마디로,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혐오로 성립되고 호모포비아로 유지된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가 여성은 물론 '패배자'로 분류되는 남성 간의 연대도 어렵게 만든다고 했다. 파워 게임 속에 남녀 모두 여성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을 패배자로 만든 여성성을 혐오하고, 패배자가 된 남성들 역시 자신이 패배자가 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여성성을 격렬히 부인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여성 혐오를 두고 한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의 개념은 호모소셜, 호모포비아와 함께 설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강의 후에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아 대담을 이어 나갔다.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참가자들은 페미니즘 이론부터 현실에서 겪는 여성 혐오 사례를 질문했다. 현장에서 나온 이야기를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 여성 혐오 사회에서, 패배자가 된 남성은 물론 승자가 된 여성 역시 패배자가 된 여성의 '약함'을 싫어하고 자신에게도 그 약함이 있을까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누구나 승리할 수 없고 누구나 강해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에게 의존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나약한 상태가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결국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나약하고 의존적인 게 과연 나쁜 것일까.

파워 게임에서 이탈하지 못한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패배자가 된 남성은 여성 혐오를 통해 본인이 패배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한 사람만 이겨서 살아남는 게 우리의 사명일까. 남자 이상으로 강해지려고 하는 게 페미니즘일까. 나는 약자가 약자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본다. 약한 상태 그대로 존중받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됐다.

- 남성에게 여성 혐오를 멈추라고 하면, 어떤 남성은 "나는 이미 여성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 남성에게 "넌 여성 혐오적이야"라고 말하면, 그는 "아니, 나는 여성을 사랑해"라고 말한다. 남성은 사랑한다는 말을 존경이라는 말로 바꿀 수는 없을까. 남성이 말하는 '사랑'의 뜻은, 성적 대상인 여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게 좋다는 말로 호환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인데, 남성은 여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내 안에 있는 불편함·분노·억울함을 설명하는 언어를 발견했다. 그러나 한국 페미니즘에서는 미러링 등 무조건 남성을 배척하는 태도도 보인다. 처음에는 시원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이런 방식이 더 이상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미러링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질이 좋지 않은 적과 싸울 때 같은 전법으로 싸워서 좋을 일은 없다. 그 사람들을 넘어서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사람이 바뀔 수 있는 건 온라인에서가 아니다. 오프라인, 개인 관계에서만 바뀔 수 있다.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남자들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특정한 요구를 받으면 바뀔 수 있다. 누가 요구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물론 요구해도 바뀌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인 관계 속으로 남성을 끄집어내는 게 필요하다.

-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남자아이들은 군대를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더라. 그런데 군대를 '남자다움의 학교'라고 하는 것이 내게는 조금 낯설었다.

군대 시스템 자체가 고역이다. 나는 아이들이 군대를 공포로 느끼는 게 정상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군대가 남성다움의 학교라고 말한 건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 담론은 예전부터 있었다. 왜 그랬을까. 군대는 절대복종의 상하 관계, 호모소셜한 전우애 관계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군대만큼 남성성을 강조하는 호모소셜한 집단도 없다.

주목할 점은 일본 젊은이에게 전쟁이 나면 총 들고 싸우겠냐고 물으면, 대부분 도망가겠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나는 일본 젊은이에게 있는 평화주의가 정상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 남자 사람 친구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화하다 보면 꼭 "그래서 여자인 너는 군대 안 가잖아"라는 말이 나온다. 그 말을 한 남성에게 나는 "나한테 따지지 말고 국가에 따져"라고 모질 게 말하지 못한다. 그들 역시 피해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려면 '둔감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둔감력'은 대충 넘기고 받아들이며 참는다는 말이다. ('둔감력'으로 무장한)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들으면 불편해한다. 남성 개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고 시스템을 비판하는 건데, 자신을 공격하는 거라고 오해한다. 이미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렇다.

일본은 징병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단체 행동으로 문화를 바꿨다. 반전 시위에 나와 "전쟁이 무서워 떨린다"를 표어로 삼았다. 표어만 보면 전혀 용감하지 않다. 그러나 "무서워서 떨린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용기다. 한국 남성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같은 적을 향해 싸웠으면 좋겠다.

현장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받기도 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묻고 싶다. 최근 출간한 <대화를 위해서> (뿌리와이파리)를 읽었다. 책에서,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에 나오는 담론을 풀어 가기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많았다.

'위안부' 문제에서 사람들은 일본을 고발하는 방향으로 간다. 일본은 물론 고발당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러나 이 문제 제기가 우리 주변·사회·국가에 있는 성폭력으로 뻗어 가지 않으면 일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저자들은, 국가와 국가 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게 아니다. 보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문제를 다룬 것이다. 나는 책 한 권 때문에 흑백논리로 나뉘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쪽 모두 어느 정도는 맞고 또 어느 정도는 틀리다. 비난이나 갈등, 옹호가 있는 것은 이해하지만, <제국의 위안부> 가 형사재판 대상까지 되는 건 비정상적이라고 본다. 다양한 문제를 대화로 풀지 않으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목을 '대화를 위해서'라고 지었다.

- 일본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가. 올해 여름 트위터 안에서 '남녀 역전된 일본 사회'를 해시태그(#男女逆転した日本社会)한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 반응이 궁금하다.

그런 운동이 있었는지 몰랐다. 일본에서 남녀 역할이 바뀌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바꾸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일본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전,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많은 젊은이가 와서 감동받았다. 한국에서는 강남역 여성 혐오 사건이 계기가 되고, 이후 '나는 페미니스트다' 물결이 일었다. 피플 파워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도 페미니스트가 함께했다. 좋은 현상이다.

반면, 일본은 조직적이지 않다. 페미니즘이란 말은 스티그마를 갖고 있다. 일본 사람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는 건 쉽지 않지만, 이들은 유년 시절 평등 감각을 갖고 자랐다. 이제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정치가가 성차별 발언을 하면, 소셜미디어에서 난리가 난다. 어떤 젊은 남성이 "육아를 협력해 주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 젊은 일본인 의식은 변했지만, 네트워크를 만드는 운동이 적다는 게 안타깝다.

일본 페미니즘의 최대 과제는 세대 교체다. 나 역시 이미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등을 보면서 배워 왔다. 그 여성들이 싸워 줬기 때문에 우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세대 간 연대를 만들어 낸 것이 훌륭하다.

- 일본과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신자유주의 사회는 남성과 여성은 물론 동성들도 분단시킨다. 진정한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약자가 약자와 연대해야 한다. 이게 우리들의 과제다. 일본 사람들은 나에게 페미니스트가 남성 동성애자와 연대할 수 있느냐고 종종 묻는다. 나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답한다. 다만 여성 혐오가 없는 남성 동성애자와 가능하다. 여성화된 남성에게도 여성 혐오는 존재한다. 그것만 없다면 가능하다.

또 나는 동북아 국가 일본·한국·중국이 연대했으면 좋겠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번역됐다. 중국에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본·한국·중국 세 국가가 가부장제 및 여성 혐오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서로 배울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속돼 있는 '위민스액션네트워크'에 최근 한국분이 오셨다. 다른 분들도 위민스액션네트워크와 더 많이 연결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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