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강호숙 박사(총신대 실천신학 Ph.D)가 2017년 7월 23일 일산은혜교회(강경민 목사) 2부(9시), 3부(11시) 주일예배에서 요한복음 4장 3-30절을 본문으로 설교한 내용(원제: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예수의 복음)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여성에 의해 전달된 복음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강경민 목사님의 39년 목회 동안 처음으로 11시 예배에 여성 설교자를 세우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감동입니다. 오늘 설교할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 모두도 이 예배와 설교를 통해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예수를 믿으면서 외부적으로는 아버지의 핍박과 내부적으로는 의심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서는 신앙과 학문 사이의 갈등을 심하게 겪기도 했습니다. 신학한 후로는 "교회 여성으로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26절을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자, 26절에서 예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저는 여기서 '율법'을 '성경'을 바꿔서 "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었고, 너는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로 바꿔 적용해 보았습니다. 특히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는 해석의 문제요, 입장과 관점의 문제, 성경관, 가치관, 세계관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이웃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는 저자에 의해 자신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술되었듯이, 한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정면과 측면, 위와 아래 등의 시야가 다르듯, 남성과 여성의 성경 읽기도 자라온 환경과 신학적 지식, 신앙관과 성경관, 세계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인식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왜 남성과 여성을 만들었을까. 성을 만드신 뜻과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여성으로 만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성의 성경 읽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의 성경 읽기는 같음과 다름을 찾아 나서는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이분법적이고 획일적인 사고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같음은 공유하되, 다름은 존중한다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좀 더 균형 잡히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의 복음 사역에서 남성 열두 사도와 제자들의 역할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모두 남성이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서 남성 제자들이 부재된 상태에서 여성들에 의해 전달되어 복음서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예수의 성육신 탄생, 예수의 유아·유년에서 청년 시절까지의 생애 관련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도 여성들이 직접적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살펴보게 될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본문도 여성에 의해 전달된 복음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예수의 복음

사마리아 여인을 다루는 본문에서 우리는 예배 시작 때마다 매우 익숙하게 듣는 말씀이 있죠? 4장 24절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입니다. 또한 본문 내용이 가스펠로 되어있는데, 바로 "우물가의 여인처럼"이죠. 저는 이 가스펠을 중·고등학교 시절에 많이 불렀습니다.

이 찬송 가사는 이렇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에 주님 하신 말씀,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 주소서 넘치도록 채워 주소서." 이 찬송처럼, 이 구절은 메시아를 만나 영생의 생수를 마시며 구원의 기쁨 가운데 우물가의 여인이 이웃에게 전도하는 메시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예배, 메시아, 영생과 같은 기독론적이고 교리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목회 상담에서도 애용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심층 상담하시며 여인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상담 과정은 목회 상담에서 많이 접목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런 관점을 달리하여, 왜 예수님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 같은 종교 지도자와는 달리, 사마리아인이면서 여성, 여성 중에서도 소외되고 외면당했던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자신을 메시아로 계시하셨는지, 즉 사마리아 여인이 전해 주는 예수의 복음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회·문화적 배경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본문에서도 명시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절대 상종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침략당했어도 단일민족을 유지했으나, 북쪽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함락당하면서 혼혈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하며 멸시했음을 알 수 있고,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도달하려면 사마리아로 지나가지 않고, 6일이나 걸려도 요단 계곡을 통해 갔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유대인들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은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을 받았고, 종교·사회·정치적으로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성들은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성의 뜰'에서 예배해야만 했으며, 사유재산권이나 증인도 될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거룩한 후손을 낳는 존재로 치부되었고, 이혼할 수 있는 권리는 철저히 남성에게만 있었습니다.

셋째, 유대 사회는 집 밖이나 공적인 모임에서 여성과 대화하는 걸 부정하게 여겨 금기시했다는 점입니다. 유대 전통이나 탈무드에 보면, 여성을 사악하다고 여겨 순진한 남성이 그 꼬임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밖에서 여성과의 만남을 제한했으며, 특히 랍비들은 자신의 아내를 포함하여 어떤 여자와도 집 밖에서 대화하는 일을 매우 부정한 일로 여겼습니다.

'우물가의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Jesus and the Samaritan Woman at the Well). 1640~1641년, 구에르치노(Guercino) 작품.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이 세 가지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에서 갈릴리를 가실 때에,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행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근거는 헬라어 원문과 영어 성경에 보면 "반드시 통행해야 하겠는지라", 또는 "통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라"는 언어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제 육 시쯤 되었다고 시간을 명시하고 있는데, 유대 시간으로 정오 12시입니다.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들은 주로 저녁 때 물을 길러 나오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는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건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 마을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거나 접촉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9절 "사마리아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의 질서와 여자와 집 밖에서 대화해선 안 되는 랍비의 전통과 가부장적 질서를 깨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27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먹을 것을 사러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이상하게 여기다'라는 동사는 '깜짝 놀라다'(wonder, marvel, be astonished)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저는 '이상하게 여기다'라는 말이 이상해서 바이블웍스를 통해 살펴보았는데, 복음서에서 이 단어의 대부분은 예수님이 이적과 기사를 베풀 때, 제자들이 놀라는 반응에 주로 사용되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거나(마 8:27; 눅 8:22-25), 말 못 하는 귀신을 쫓으실 때 보였던 제자들의 반응(마 9:32-33; 막 1:27)과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하여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한 사건은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한 하나님 현현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여자와 말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유대 당시엔 여자와 말하는 게 있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로서, 예수님의 행보는 가히 혁명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의 경우에 이를 적용해 본다면, 오늘 이렇게 11시 예배에 설교를 하는 일이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한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16-18절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가 남편이 아니라고 나오는데, 유감스러운 건 일부 목사님은 때로는 사마리아 여인을 '창녀'나 성적으로 문란한 죄 많은 여인으로 보면서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혼권이 없었던 여성들 처지로 볼 때, 남편들에 의해 계속 이혼을 당해 왔던, 그리고 지금의 남편도 남편이 아닌, 남자들에게 버림받은 여자로서 남자에 대한 아픔과 상처가 많은 여자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시고,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심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처럼 율법과 가부장 시대의 편견에 따라 사마리아 여인을 정죄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삶의 고달픔과 상처, 고립과 암울한 삶을 동정하신 따뜻하신 분이셨음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인들이 여성을 함부로 대하면서 가차 없는 정죄와 심판의 율법을 들이댄 것과 반대로, 동정과 연민을 통해 인간의 부르짖음과 고통에 응답하며 구원하는 신의 현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망과 고통의 현실 속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양이 되셔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바클레이(Barclay) 주석가는 "모든 진실한 권위는 동정에 기초한다. 복음서는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끝난 게 아님을 보여 주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하였습니다.

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여자여'라는 호칭은 요한복음에서만 6번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2장 4절 가나의 혼인잔치("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에서, 오늘 본문에서, 8장 10절(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나")에서, 19장 26절(십자가에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에서, 20장 13절, 15절("어찌하여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에서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여자여'라는 호칭을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한 이유가 있다고 연구한 논문이 있습니다. 그 당시 '여자여'라는 호칭은 무례한 말투나, 경멸의 말투가 아니라, 오히려 여자를 최고로 높이는 호칭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추측건대,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의 선포처럼, 여성들도 하나님나라의 가족에 포함된다는 구속적 관점을 의도적으로 부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밝히신 것은 매우 특이합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아버지'라는 용어가 희귀하였는데(다윗이 시 89:26에서 '아버지'), 예수에 의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예수님의 신관에서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아버지는 남성이다'라는 이미지와 신관이 매우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는 "우리의 근원이 되시고 섭리하시며 돌보시는 친근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호칭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엄위하신 하나님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데에는 우리를 친근히 대하시는 분이라는 개념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보입니다. 여기서 여성들이 친아버지의 폭력과 상처받은 경험에 의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를 한국교회가 헤아려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서,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나 사마리아 여인,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 아버지가 바로 너희 아버지요, 내 하나님이 곧 너희 하나님임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 같은 종교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신관인데,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28-30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와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동네 사람들이 왕따당한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단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비롯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가 유대인에 대한 열등감 속에 예배 장소의 정통성 문제와 오실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이었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심산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나름 자신들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열등감 속에서 이를 보증하고 해결해 줄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려 왔는데, 예수께서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말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기에 '그리스도가 오셨다'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외침에 쉬이 응답한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 말씀드리면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첫째,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를 드러낸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질서와 남성의 질서, 랍비 전통의 장벽 즉 옛 질서를 깨고, 상처 있는 여인, 왕따당한 여인, 하자 있는 여인을 만나 하나님나라의 새 질서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여기서 옛 질서를 깼다는 의미는 달리 표현하면, 종교적·사회적·정치적·율법적으로 퍼져 있는 악한 세력과 차별적 질서를 타파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서 회복되는 구속의 질서를 요구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선포는 민족·성별·신분 차별이라는 옛 질서를 깨고, 낮고 천한 이름 없는 여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드러내신 것은 복음입니다.

둘째,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복음은 인격적인 복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있어 예수님은 선지자이며 구주이시기도 했지만, 그녀가 지금껏 만나 본 적 없는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그 당시의 도덕과 윤리로 판단하지 않고 공감과 친절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름 없는 여인, 상처 많고 왕따당한 여인을 만나 주신 것은 남성에게 상처받은 그녀에게는 치유의 사건이요, 사랑과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의 시간이었을 겁니다(10절).

또한,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을 허용하면서 대화를 하셨다는 것은 여성을 '생각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신 것이며, 예수를 믿음에 있어 무조건 복종하고 맹신하는 게 아니라, 질문과 의심을 통해 인격적인 믿음으로 나아감을 말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신학 이후에 끊임없이 드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왜 주님은 그 당시에 증인도 되지 못했던, 그리고 일곱 귀신이 들 정도로 삶의 밑바닥에서 살아왔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인류 최초의 예수의 부활 사건의 첫 증인을 삼으셨을까?"였습니다.

제가 속한 총신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면 '여성 안수'를 열어 주게 될까 봐서인지, 그냥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답하는 정도'로 해석하거나, 심지어는 기독교 전통에 의거하여 "베드로가 부활의 첫 증인이라고 간주한다"고 어느 조직신학 교수는 기독론에 기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할 수 없었고,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께 질문한 결과,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자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없다"라는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남자라서 증인이 될 수 있고, 여자라서 증인이 안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의 증인이 되지 못한 남성 제자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을 수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주님 편에서 '아닌 건 아니며, 남자든 여자든 성령 충만한 증인을 통해서 예수의 복음이 전파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입장에서 나같이 비천하고 형편없는 사람을 만나 주신 그 은혜와 사랑에 얼마나 감격하였을까를 상상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난 사건은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한국교회가 대체적으로 여성을 '집단'으로만 치부하여 여성의 하나님 경험과 은사를 인정하지 않는 건 잘못입니다. 남성이든지, 여성이든지, 각자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고유하고 독특하게 창조된 존귀한 존재, 즉 모자이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름다우심과 지혜를 경험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나름 해석해 보면, 무한하신 인격을 지닌 보이지 않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영'이신데(24절), 이는 우리 신앙에 매우 중요한 신관입니다. 무한하신 인격이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며, 우리 모두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으로 인지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더 겸손하고 진실하며 인격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셋째, 사마리아 여인이 전한 복음에서 하나님나라 전파자의 범주가 확장된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유대인과 남성을 넘어 비록 이방인이며 사회적으로 약자, 천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더욱이 여성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으셨다는 하나님나라 증인의 포괄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남성 제자들이 전하면 중대하고, 사마리아 여자가 전하면 하찮은 게 아닙니다. 사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그 당시 별 볼 일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온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 예수가 누구신지 알려 주며, 이들의 깨달음과 증언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전파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27-28의 말씀에서는 예수의 복음은 미련한 자를 통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약한 자들을 통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멸시받고 천한 자들을 통해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나라 지혜의 역설을 보여 줍니다. 대체적으로 한국교회는 고전 14:34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를 진리처럼 지키면서 여성을 '침묵하는 존재'로서 규정하여 여성들의 입과 소리를 막아 왔습니다. 합동 교단에서는 11시 예배 때, 여자가 설교하는 행위를 금기시하고 있는데, 저는 오늘 예수님의 복음으로 이렇게 설교하고 있음이 감격적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복음을 믿는 복되신 일산은혜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전해 준 복음은 시대의 편견과 통념, 불의와 차별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21세기 오늘보다 종교적 정치사회적으로 훨씬 더 차별받고 소외받은 여성이었음에도, 예수를 만나 치유받고 용기를 얻어 예수를 증언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적 도전과 예수에 대한 헌신이 우리 모두에게 넘쳐 나길 바랍니다.

강경민 목사님의 개혁적인 리더십과 성 평등한 교회를 염원하는 일산은혜교회 성도님들의 열정과 열림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부 공동체요, 남녀 친교 공동체입니다. 특히 신부 공동체라는 것은 교회의 성격에서 신부성이 요구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신부의 순결성, 약속의 말씀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삶, 그리고 여성성입니다. 남녀의 평화 없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성 평등을 위한 실천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회복을 지향하자는 것이며, 남녀평등과 정의, 사랑과 평화를 이루려는 비전을 담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처럼, 남녀가 서로를 존중하고 남성과 여성이 함께 연합하는 교회가 될 때, 복음의 역동성과 함께 평화와 행복도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아멘!

강호숙 / 총신대 실천신학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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