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강을 살린다며 16개의 대형 댐을 세워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강에 물이 많아졌으나 흐름을 잃어버리자, 물은 썩고 물고기들은 떼죽음당하고 철새들조차 찾지 않는 죽음의 강이 되었습니다.

흐름을 잃어버리면 물이 아무리 많아도 녹조 라떼가 됩니다. 사진 제공 최병성

하나님은 강을 흐르도록 창조했습니다. 강의 생명은 흐르는 역동성에 있습니다. 고인물은 썩는다는 옛말처럼, 흐르지 않으면 물이 아무리 많아도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녹조 라떼로 전락한 4대강 사업과 똑같습니다. 많은 분이 교회 성장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가 수천, 수만 명씩 모이는 대형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병든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향해 서슴지 않고 '개독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개독교라 욕하는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병든 것은 '교회'라는 댐에 갇혀 세상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르지 않는 강물이 썩게 되듯, 세상을 향해 흐르지 않는 교회는 병들기 마련입니다.

소통의 사명을 회복하라

21세기에 국가와 기업에 가장 중요한 화두는 소통(疏通)입니다. 국어사전에 소통(疏通)이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녹조 라떼로 전락한 4대강이 맑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4대강 댐의 수문을 열고 흐름이라는 소통을 회복해야 하듯, 병든 교회가 다시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라는 댐의 수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더 건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향해 흘러가야 합니다. 사진 제공 최병성

병든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교회로 회복하는 길은 딱 하나뿐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예수를 바로 알고, 진짜 예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회복을 위해 우리가 바로 알고, 따라야 할 예수는 어떤 예수일까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막연히 저 높은 하늘에서 예배받는 것만을 즐기는 이상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도 가장 낮고 아픔이 있는 이들이 있는 곳으로 더 깊이 내려가셨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아픔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를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신 성육신 사건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성육신하신 예수를 믿고, 성육신 사건 위에 서 있는 교회가 예수님처럼 세상으로 성육화하는 삶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을 소통케 하는 예수의 꿈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며, 앞으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4장 16-21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딱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소통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소통의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함의 소통을,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의 소통을, 억압받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함의 소통을, 세상 모든 이들에게 값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 은혜의 소통을 선물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공생애 내내 소통케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픔과 눈물로 가득한 세상의 막힌 곳을 소통케 하는 예수의 간절한 소망을 또 다른 한 단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꿈'입니다. '소통케 하는 자 예수'라는 말을 '예수의 꿈'으로 바꾸자 제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꿈꾸는 자였습니다. 세상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고, 눈물을 닦아 주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저 먼 하늘에 막연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사랑과 평화가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자 아닌 따르는 자 되어야

대한민국에 교회가 참 많습니다. 5,000만 대한민국 국민 중 1/4이 기독교인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의 꿈을 함께 꾸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하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달리면서까지 이루고자 했던 예수의 삶과 예수의 꿈을 꾸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예수를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꿈을 함께 꾸며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 제공 최병성

신약성경을 읽고 또 읽어 봐도 예수님이 '나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나를 따르라'고 강조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수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교회당 안에 갇힌 거룩한 '제사장 예수'일까요, 성공과 출세를 보장하며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는 '무당 예수'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생명을 다 내어 주며 소통의 삶을 살아가신 '꿈꾸는 자 예수'일까요.

교회마다 제자 훈련이 넘쳐 납니다. 그러나 제자란, 스승이 한 말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승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 스승을 닮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일예배, 주일 오후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철야 예배, 새벽 예배… 예배도 많고, 예배하는 교인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예배 교인으로만 가득하기에 교회가 4대강 녹조 라떼가 된 것이지요.

예배에 갇힌 교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 제공 최병성

예수님은 내 꿈을 함께 지고 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꿈을 함께 꾸며 세상 속으로 깊이 내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꿈을 교회 성장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며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셨고, 그 세상을 보시기에 좋다고 감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지, 교회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정의와 평화와 사랑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길 원하셨지, 예수 믿는다며 건물 안에 모여 예배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꿈을 위해 달려간 곳은 '길'이었다

예수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한 장소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소통케 하기 위해 예수님이 선택한 곳은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성전에서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모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상처받고 아픔 있는 이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길'에서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했습니다. 사진 제공 최병성

예수님은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다 골고다 언덕길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삶을 딱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길 위의 예수'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병든 이유는 '길 위의 예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내려와 담을 허물었는데, 교회는 세상과 담을 쌓았습니다. 오늘 교회는 화려한 교회 건물 안에 갇혀 세상과의 소통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따르는 길은 예수와 함께 꿈을 꾸는 것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억압받고 눌린 자들에게 자유함을 주고자 하는 간절한 꿈을 꾸셨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er King) 목사는 1963년 8월 28일, 링컨 기념관 앞에서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이렇게 그의 꿈을 외쳤습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빈둥거리지 맙시다. 우리가 현재나 미래에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꿈을 여전히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피부 색깔에 의해 판단받지 않고, 그들의 인격에 따라 판단받을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칠은 땅이 평평해지며, 구부러진 땅이 펴지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희망의 돌멩이가 묻혀 있는 절망의 산을 개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우리나라의 소란한 불협화음을 아름다운 형제애의 심포니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세상을 소통케 하는 자였다면, 우리 역시 세상을 소통케 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가 세상을 향한 꿈을 꾸는 자였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아픔을 치유하는 자의 삶을 꿈꿔야 합니다.

자, 우리도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향한 꿈꾸는 자의 길을 예수님과 함께 달려가면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아픔 가득한 세상으로 달려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진 제공 최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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