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랫동안 배를 쓰다듬으셨는데, 저는 그게 영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어요."

"내 무릎에 앉을래? 나지막이 말씀하셨는데, 불쾌했지만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어요."

"항상 '주의종'에게 불순종하면 천벌 받는다고 말씀하셨지요."

S교회 '성폭력 피해자 지원과 대책 마련을 위한 기자회견'을 계기로 S교회 여성 교인들과 만났다. 그들은 허심탄회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은 "강간 피해자는 아니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고발하지는 않겠지만" 여성 교인의 80%는 목사에게 크고 작은 성추행을 당했을 거라고 말했다. 교회에서 성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나에게 교회 성폭력과 일반 성폭력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질문하고는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나는 협의의 성폭력(sexual violence) 개념이 아니라 광의의 성폭력(gender violence)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 통용되는 성폭력 개념은 강간 등 성적인 폭력에 한정된다. 교회 성폭력을 논할 때도 이 개념을 그대로 차용한다.

그러나 여성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고발할 때는 '무엇을 성폭력으로 볼 것인가', '강간인가 화간인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성폭력을 단지 성적 접촉에 따르는 폭력으로 한정 지을 경우, 누구 말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가 따지게 되면, '객관성'이나 '합리성'을 규정하는 선택의 권력관계는 정치적인 의제가 된다.

"교회의 논리가 아닌 상식의 잣대 위에서"라는 말은 S교회 K 목사 성 추문을 보도한 시사 다큐 프로그램 진행자가 했던 멘트다. 지금은 K 목사 지지파들에 의해 재전유(再專有)되고 있다.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 행동을 이유로 들며, '상식적'으로 피해자 증언이 사실인지 조작된 거짓말인지 판단해 달라는 것이다.

'상식'에 호소해 피해자가 폭로한 성폭력 피해 경험을 허위 사실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면, 이때의 '상식'은 분명 남성 중심의 언어 논리일 것이다. 이럴 때 '성적 접촉에 따른 폭력'이라는 좁은 의미의 성폭력 개념을 사용하면, 언어의 남성 독재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성폭력 사건은 자꾸만 허위 사실처럼 치부된다.

'성관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성관계 책임은 '유혹자'인 여성에게 돌아온다. 이들은 '상식'의 잣대로 여성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2차 가해를 정당화하며, 남성은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만 지게 된다. 이에 반해, 집단 간 갈등 속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간혹 집단의 이해관계와 관련한 정치적 이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남성 집단의 정치 싸움에 휘말려 피해 여성 주체는 사라져 버린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성폭력 피해 사실이 여성의 입장에서 성립하려면 광의의 성폭력 개념이 필요하다. 넓은 의미의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을 매개로 행해지는 모든 유형의 폭력으로 개념화하며 성별 권력관계 자체를 문제시한다. 여성 주체의 젠더 인식에 기초하여 성립된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폭력을 남성 권력의 문제, 즉 폭력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다.

젠더화된 신학과 교회

그렇다면 광의의 성폭력(gender violence) 개념이 문제시하는 성별 권력관계가 기독교 신학에서 정당화 내지 신성시된 근원을 찾아보자. 서구에서 근대는 중세적 공동체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중세까지만 해도 여성은 경제 공동체인 가정에서 철저하게 남성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도 단독으로 설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일어나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 생산노동자로 일하게 되면서 가정은 경제 공동체 역할을 상실했다. 가족의 필요성까지도 재고되는 상황이 되었다. 19세기 미국의 기독교는 새로운 젠더 논리를 만들어 남성은 경쟁, 정치, 사업, 임금노동과 연관시키고 여자는 종교, 집, 가족과 결부시키는 공사 이분법에 근거한 영역 분리를 창안했다.

이 영역 분리의 젠더화된 신학은 교회에서 여성이 영적으로 권위 있는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방패 역할을 했으며, 동시에 가정을 '삭막한 세상의 안식처'로 표상하여 예찬하고 여성을 현모양처 역할에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젠더화된 신학 체계는 기독교인 남녀의 사회적 역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젠더까지도 규정하여 '하나님의 부성'에 도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성과 여성을 공사 영역으로 평등하게 분리한 것처럼 보이는 성별 노동 분업은 '위계적 평등성'이라는 기만적 논리를 그 안에 숨겼고, 여성의 우월한 도덕성과 영성, 신체적 아름다움을 찬양했다. 그 감언이설에 속아 여성은 자발적으로 남편의 사랑받는 아내, 자녀에게 헌신적인 어머니가 되는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체화했다. 그렇게 성별 분업은 곧 성별 권력관계가 되었다.

결국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라는 젠더의 위계화는 여성의 자발적 복종하에 여성의 마음과 신체에 새겨진 규율 권력으로 작용했다. 종교는 하나의 상징 체계이며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는 신체적 헥시스(hexis)를 규정한다. 기독교의 남성 지배자들 입맛에 맞게 여성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졌으며, '순종하라'는 명령은 수행적이고도 주술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식민지 근대에 미국의 보수적 근본주의 기독교가 그대로 이식된 한국 개신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이 '원죄'의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부장 체계에 순종하며 남편에게 복종, 자녀에게 헌신할 것을 종용했다. 개신교는 유교의 정절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차용하고 칠거지악(七去之惡)과 삼종지도(三從之道)에 해당하는 유교적 가부장주의로 여성의 성과 몸을 통제하고 억압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여성 해방의 장이 되었다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여성을 '나라와 민족의 어머니'로 호명하여 돌진적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위한 민족의 일꾼으로 자리매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적 인간으로서 자유롭고 평등한 여성 주체는 여전히 가능하지 않았으며, 교회는 시급한 민족의 문제 앞에 여성 해방을 죄악시 여겨 여성이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며 선을 그었다.

교회는 필요에 의해 여성을 동원하면서도 여성의 지위를 제한하는 '참여와 배제'의 이중 논리를 폈다. 교회에서 여성은 가사 노동의 연장으로 교회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지만, 설교권과 치리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이등 성도화'하는 제도적 장치 속에서 열등감과 무력감을 내면화한 '순종적 여신도'가 되어 갔다.

교회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소명을 거부하는 불순종은 죄악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여성들이 여성 해방과 성적 자율권을 주장할 때는 창녀·죄인·이단으로 여겨 배척했고 '순종적 여신도'가 되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가족, 성별 권력관계의 재생산

근대국가 건설을 위한 기독교의 가족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임금노동자인 남성의 생산노동과 부불노동(unpaid work)으로서 여성의 '어머니 노릇'이라는 재생산 노동을 필요로 했다. 낸시 초도로우(Nancy J. Chodorow)에 의하면, 여성만이 배타적으로 '어머니 노릇'을 하는 자본주의적 가족은 어머니를 무력한 존재로 여기게 하고, 어머니가 자기만의 관심사나 일 없이 양육만을 관심사로 갖는다는 편견을 발생하게 했다.

가정에서부터 여성 어머니에 대한 혐오가 자라면서, 오이디푸스 시기에 아들은 공적 영역에 적합한 남성적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어머니와의 공생, 애착으로 특징되는 전 오이디푸스 관계로부터 공격적이고 방어적으로 돌아선다. 딸은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전 오이디푸스 관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기애적 손상(딸보다 아들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에 반항할 수 있는 '남근'이 없다는 점에서 권력 또는 전능성의 상징인 남근을 원한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아버지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가 딸을 온전하고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한다면, 딸은 친밀성과 자율성을 모두 갖춘 독립된 개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적 아버지는 딸에게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태도를 그대로 취하면서, 딸에게 어릴 때부터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최악의 경우, 그는 근친 성폭력을 저지르면서 어린 딸을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 대행으로 삼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딸들은 성적으로 유혹하는 아버지에 의해 '욕망의 주체'가 되는 일에 실패한다. 최초로 아버지에 의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는 생물학과 문화, 종교에 의해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으로 '자연화'된다. 이후 여성에게 강요되는 노동(임신, 출산, 육아, 가사 노동, 감정 노동)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결국 근대의 가부장적 핵가족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 아버지의 성적 지배(성폭력)와 성별 노동 분업을 영속화하는 젠더를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터전이 되었다. 그러므로 보수 기독교에서 신성시해 온 '가족 가치'는 '어머니 노릇'을 위해 여성을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1차적으로 배정해 고립하게 한 뒤 무력하게 만들고 남성의 지배와 폭력 대상으로 내어 주는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로 판명된다.

그들은 여성들의 '순종'을 '하나님의 뜻'으로 신성시하여 남성이 여성을 성폭력으로 지배하는 세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가. 교회에 만연한 성폭력은 그런 견지에서 여성을 '남성 아버지'의 지배하에 두고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어 기독교의 남성 독점 체제, 세계의 남성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정치인 셈이다. 그러므로 교회 성폭력은 성적인 문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문제이며 정치적 이슈이다.

욕망의 주체가 되라

오늘날 교회는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고 염려하며 '착한 가부장' 담론을 일으켜 다시 아버지의 권위를 복구하려 한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는 남성의 성적 지배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여성은 아버지에 의해 육체와 욕망에 대한 권리를 빼앗기고 성적 주체가 되는 길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이제 딸들에 의해 '아버지 살해'가 일어나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아동 정신분석 치료를 하다 보면 아이들은 환상 속에서 '부모를 죽인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죄책감과 회복 충동으로 다시 부모를 살려 내기도 한다. 딸들은 주체가 되기 위해 아버지에게 도전해야 한다. 두려움에 의한 '순종'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어야 한다.

'영적 아버지'의 성폭력 사실을 은폐해서는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파헤치고 죄값을 묻는 일은 두려운 일이지만 욕망의 주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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