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미시시피한인침례교회 안정섭 목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포스팅을 보강해서 쓴 글입니다. 7월 2일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이 로마서 1장을 주제로 진행한 한백 신학 교실 세 번째 강의 내용에 대한 반론입니다. 김진호 실장의 발표문 전문은 링크(바로 가기)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김진호 실장은 로마서 1:26-27을 로마제국 원로원의 귀족 계층과 김진호 실장이 칭하는 '그리스도파'라는 사람들 간의, 계층 간 갈등 관점에서 나온 것이며, 동성애 일반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귀족층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여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로마서 1:26-27에 대한 김진호 실장의 해석은 성경 본문에서 그 뜻을 찾아내는 주해(exegesis)가 아니라, 본문 내용을 자신의 의도에 맞춘 전형적인 자의적 해석(eisegesis)이다. 필자는 김진호 실장의 자의적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본래 성경이 말하는 뜻을 문맥에 따라 해석하여 밝히고자 한다.

I. 로마서 1:26-27의 자의적 해석(eisegesis)

먼저 김진호 실장은 1:18-32을 제시하면서, 반동성애적 신앙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 단락에서 문맥보다 26-27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김 실장은, 이 단락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항 '사람들(ανηρ)'이라는 단어를 원로원 귀족 계층인 로마 귀족 계층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로마서 1장 전체를 다 보아도 '사람들(ανηρ)'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1:18과 2:1의 '사람'이란 단어는 '아네르(ανηρ)'가 아니고 '안드로포스(ανθρωποs)'이다. 로마서 4:8절과 7:2-3절에 '사람(ανηρ)'이 나오지만 이는 일반적인 사람이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이 단어도 원로원 계층 사람들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

또 1:27에 나오는 '남자'라는 단어는 '아네르(ανηρ)'가 아니고 '아르센(αρσην)'이라는 단어이다. '아르센(αρσην)'은 남성의 성적 특징을 담고 있는 말일 뿐 원로원 계층과 연결할 수 있는 고리는 어디에도 없다. 영국의 Arsenal이라는 프로 축구팀도 이 단어에서 온 말이다. 단어 하나에는 의미가 없다. 문맥 속에서 읽을 때 단어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김진호 실장이 정해 놓은 답에 성경 본문을 맞추기 위해 제시한 것은 로마 원로원 귀족 계급과 그리스도파 간 대립이다. 김진호 실장은, 그리스도교가 종교의 모습을 띠기 시작한 때는 AD 90년대이기 때문에 로마서가 쓰이던 50년대 중반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공동체 안에 섞여 있던 느슨한 공동체라고 했다. 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 갈등 상황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설정이지, 실제 역사적 상황이나 고문서들에 나타난 증거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김진호 실장 말처럼, 기독교 공동체를 유대교와 함께 존재하던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취급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AD 70년 유대-로마 전쟁 이전이라고 해야 한다. 또 바울서신을 보면 AD 70년 이전에도 분명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을 다시 유대교로 돌리려는 자들 때문에 바울은 골머리를 썩였다.

바울 시대 기독교를 단순히 유대교 공동체 중 한 분파 정도로 취급할 수 없다. 바울을 고린도전서 1:12에서 '그리스도파'라는 말을 썼지만,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안의 극단적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김진호 실장은 바울서신과 일반 서신들에 분명히 나타난 증거를 모두 무시한다. 바울서신 중에서도 로마서·갈라디아서·고린도전후서·빌레몬서·빌립보서·데살로니가전서만 바울이 직접 쓴 것으로 본다. 이러한 서신에는 바울의 급진적인 태도가 나타나 있지만, 나머지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기에 모두 위서(僞書)로 보고 무시한다.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AD 90년 이전에는 기독교가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P46'이라는 신약 사본에는 신약성서의 서신서들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P46가 쓰인 시기는 빠르면 1세기 후반이고 보통 2세기 초반이나 중반으로 본다. 게다가 P46도 다른 사본을 보고 베낀 증거들이 분명하기에 기독교가 AD 90년 이후에야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학자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기 이전에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로마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이 추방되자 유대인들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이 지도자가 되었다.

황제가 죽은 후 칙령이 폐지되자, 두고 떠난 교회를 염려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와 보니 이미 이방인들이 교회를 잘 이끌고 있어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교회이기에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로마서를 쓴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의 주된 독자는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지, 유대교를 신봉하던 유대인들이 아니다. 로마서의 끝부분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말한다고 하는 부분도 일부 있지만, 로마서 대부분은 돌아온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바울은 계급 간 갈등 때문에 로마서를 쓴 것이 아니다. 당시 갈등의 당사자였던 로마 교회 이방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로마 교회를 설립했다가 추방되고 난 뒤 돌아온 유대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들 사이를 중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김진호 실장은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을 1:26-27을 해석하는 데 인용한다. 김진호 실장은 로마서 13장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납세 거부 운동이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했다. 납세 거부 운동으로 로마 지배계급과 큰 갈등이 생긴 것 때문에 로마서를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13:1-7은 12:3부터 흐르는 사고의 순서를 이해하고 읽어야 한다. 12:3 끝부분은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어 4-13절은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믿음의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또 12:14-21은 기독교를 핍박하던 유대인 원수들을 축복하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13:1-7은 이방인 원수들도 역시 사랑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바울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리스도인 형제 → 유대인 원수 → 이방인 원수'로 동심원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지, 로마 교회 신자들이 로마의 원로원 계급과 투쟁이 벌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로마서는 로마제국의 지배계급과 유대교 분파인 그리스도파와의 갈등 때문에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쓰인 것일 수 없다. 바울이 로마시민이었다 해도 그러한 갈등을 중재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갈등을 중재하려면 갈등 당사자 양쪽 모두에게 말할 위치에 있어야 한다.

또 김진호 실장은 네로가 폭군이 아니라 대중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제전과 검투를 늘렸다고 말하며,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했던 폭군이라는 주장은 원로원 귀족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 네로에 대한 기록은 모두 불태워졌고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하려면 기독교가 형성되기보다 30년 전쯤이기에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한다.

고대 로마 역사가들 기록을 무시하고 네로에 관한 진실은 모두 불태워져서 왜곡된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역사적 기록들을 무시하고 억측에 근거해서 네로가 폭군이 아니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원로원 계급과 그리스도파의 갈등 사이에 네로를 끼워 넣어, 네로를 민중들을 위해 원로원과 싸웠던 인물로 각색하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본적인 원리는 먼저 로마서 안에서 찾아야 하고 관련 문헌이 없을 때에는 다른 바울서신에서 찾아야 한다. 그래도 없을 때는 신약성경 전체와 70인역 구약성서를 인용할 수 있다. 성경 이외의 문서를 인용할 때는 본문의 사회적 문화적 관습을 밝히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네로와 로마서의 연관성은 클라우디우스가 죽고 네로가 즉위함으로 쫓겨난 유대인들이 돌아왔다는 정도다. 13:1-7에서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는 기독교가 크게 핍박을 받던 시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당시 핍박은 주로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다시 유대교로 돌리려고 했던 핍박이다.

김진호 실장의 문제 제기는 동성애로 시작하는데, 이어지는 주장은 이와는 연관이 적은 로마 교회의 문제가 로마제국 원로원 계급과 그리스도파 유대인들 간의 투쟁이라고 설명했다. 원로원 계급을 내세운 이유는 동성애가 원로원 계급이 대표하는 로마 귀족들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당시 동성애가 귀족 계급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방인들의 추악한 모습으로 먼저 제시한 것일 뿐이다. 이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죄들을 나열한 것이고 사람들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신 것이 동성애라고 설명한 것이다.

김진호 실장은 바울이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봤지만, 동성애뿐 아니라 성애 자체를 부정적으로 봤다고 말해 동성애를 이성애와 똑같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물타기해 버렸다. 그러나 바울은 결혼과 성애 자체를 부정한 적이 없다. 본인이 복음을 위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을 다니다 보니 결혼을 포기한 것일 뿐이다.

II. 1:26-27의 문맥에 따른 주해(exegesis)

그렇다면 본래 문맥에 따라 본문을 중심으로 1:26-27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맥에 따라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흔히 로마서의 주제라고 하는 1:16-17부터 보기 시작해서 2:11까지 연결해서 봐야 한다. 1:16에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2:9-10에서도 같은 구절이 두 번 나온다. 1:16은 모든 이에게 주시는 차별이 없는 복음이라면 2:9-11은 차별이 없는 심판이다. 차별이 없는 복음과 차별이 없는 심판이 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내용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이니 남의 죄를 보지 말고 먼저 자신의 죄를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남을 판단하기보다 이처럼 큰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16-2:11 전체 본문의 문맥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첫 부분부터 살펴보자. 1:18-23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했다. 십자가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의 진리가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던 자들은 바울의 시대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분명하게 드러났는데도 진리를 가로막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에 빠져 생각이 허망해졌고 세상 철학에 마음이 가려져 하나님께서 드러낸 것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24절은 원문에서 '이런 이유로(Διο)'라는 말로 시작한다. 24·26·28절에는 '내버려 두시니'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어 놓은 이유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을 세 번이나 반복 강조해, 인간들의 죄악의 결과들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내버려 둔다는 말은 바울 당시 전문적인 수사 용어다. 경찰이 범인들을 지켜보면서도 그냥 두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되면 잡으려고 지켜보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도 역시 인간들의 죄악들을 인내하시면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1:26-27의 동성애에 관한 구절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면서 때가 되면 심판하시려고 지켜보시는 죄 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첫째 24절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셨다. 둘째 26절에서는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다. 26절의 '욕심'이란 단어는 '음행에 병적으로 집착하여 쾌락을 느끼지만 사실 고통이고 아픈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26절에서는 "그들의 여자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쓴다"고 했다. 창조질서에 따른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여자들끼리 동성애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여자들이란 우상의 신전에 가서 신전의 여사제와 성관계를 하며 예배하는 남자들의 아내들이다. 그들의 여자들이 쾌락에 집착하지만 사실 고통스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자들뿐만이 아니다. 28절은 '또한'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남자들도 똑같이 비정상적인 음행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도 여자들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버리고 욕정에 불탔다고 했다. 당시 남자들의 동성애는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 스승과 어린 제자나 주인과 어린 노예 사이에 일어난 성적 착취였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남자끼리의 동성애는 자유민 남자들이 노예들을 데리고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그 피해자들은 대부분 청소년기의 남자 노예들이었다.

셋째는 28절의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 이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을 때 이러한 더러운 음행을 행하는 뜻이다. 이런 상태도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김진호 실장은, 1:29-31까지 이어지는 죄의 현상들을 1:26-27에서 동성애를 지적한 것이 너무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묘사라서 그 뒤에 체계적이지 않은 내용들을 두서없이 나열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죄의 현상들도 앞에서 동성애에 대해 잘못 말한 것을 덮으려고 정신없이 늘어놓은 말이 절대 아니다.

먼저 맨 앞에 나오는 불의와 추악, 탐욕과 악의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죄들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기와 살의 분쟁과 사기는 마음에 있던 죄들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못한 사람들은 안 보는 곳에서 수군거리며 흉을 보고 비방한다. 이런 사람들의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능욕하고 병적 자만심을 가지고 자랑질하며 오만하게 구는 자들이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발견하면 악을 도모하는 모략꾼이 되고 마지막에는 부모조차도 무시하고 거역하는 교만의 최고봉에 오르게 된다.

그러면 그러한 병적인 현상이 고착화한 모습이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α'로 시작하는 네 가지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없는 우매한 자이고, 하나님과 약속을 어기는 자가 된다. 또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에 무정한 자가 되고, 자신이 용서받은 것도 모르기에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자가 된다.

이 죄의 목록들은 물론 모든 죄를 다 기록한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앞에서 동성애를 비롯한 음행으로 표현된 우상숭배가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향을 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이 이처럼 음행과 우상숭배를 말하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29절부터 나오는 죄의 목록을 통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죄의 목록들은 동성애보다 더 작은 죄라고 말할 수 없다.

문맥을 통해 보면, 이 본문에서 바울의 핵심은 성적인 타락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병적 상태가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지 예를 들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들이 반동성애적 구절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 두 구절만 잘라서 동성애에 초점을 맞춰 설교한다면 그것도 잘못하는 것이다. 더 긴 단락으로 잘라 모두가 다 예외 없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뜻이다.

맺는말

성경은 본문의 의미를 문맥에 근거해서 밝히고, 당시 사회·문화적 배경이나 수신자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 본문이 가진 본래 의미를 발견해 오늘날에 맞도록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성경 본문 주해(exegesis) 과정이다. 그러나 김진호 실장의 로마서 1:26-27 해석은 먼저 자기 신학에 따라 로마서도 계급 간 갈등 구조로 보고 로마서 문맥과 상관없이 해석했다. 해석을 먼저 정하고 성경 본문을 거기에 맞춘 전형적인 자의적 해석(eisgesis)이다.

1:26-27에 나타난 동성애 혐오를 약화하려는 목적으로 바울은 이성애도 혐오했고, 동성애는 당시 귀족 계급의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바울은 그러한 귀족계급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동성애를 말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심각한 왜곡이다. 하지만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문맥과 상관없이 이 두 구절만 잘라서 동성애를 비난하면서 1:29-31에 나타난 죄들을 동성애만큼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는 것 역시 심각한 왜곡이다. 본문에서 진리를 왜곡하고 가로막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으니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성경 구절을 부분적으로 잘라 내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파하고 가르친다면, 아무리 정통 보수라고 떠들어도 1:18에 나온 하나님의 진리를 깔고 앉아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는 자이고 2:9에 나온 환난과 곤고가 있을 악인이다. 동성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만 잘못된 해석이 아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핏대를 세우며 그 다음에 나타난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한다면, 이는 동성애보다 더 작은 죄라고 말할 수 없는 심각한 왜곡이다.

안정섭 / 미시시피한인침례교회 담임목사, 뉴올리언스침례신학교(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Ph.D(NT & Greek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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