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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묵시록

서보명   기사승인 2017.07.13  2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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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열차

'설국 열차'란 특이한 제목의 영화가 묵시록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그 영화가 개봉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알고 보니 그 영화의 원작은 이미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만화였고, 미국에선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기대하면서 기다리던 마니아가 많았었다. 다행히 동네 도서관에 영문 번역판이 있어서 빌려다 보았다. 그런 정성까지 들인 이유는 묵시록 장르의 소설이 한국에서 어떤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고, 또 서구 사상의 깊은 열망이 담긴 묵시록이 한국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호기심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최근 '부산행'이란 좀비 영화도 동일한 궁금증을 갖고 보았다. 비서구권에서 일본은 핵폭탄의 경험을 통해 묵시록의 영화가 일찍부터 등장했고, 대재난과 몰락의 서사는 일본의 대중문화 속에 중요한 일부로 남아 있다. '설국 열차'는 지구에서 생명이 끝날 때 멈추지 않는 기차에 올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고, '부산행'은 죽은 자가 깨어나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좀비 영화의 일종이다.

좀비 영화가 지속해서 유행하는 이유는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패러디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미 그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도 죽지 않고 좀비와도 같이 사람들을 파멸의 길로 끌어들이는 자본주의와 이를 피해 쫓겨 다녀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좀비는 바이러스를 통해 유지되고, 인류가 멸종하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는 묵시록의 의지로 무장해 있다. 두 영화에서 묵시록에 대한 한국적인 해석이라고 할 만한 부분을 찾기 힘들었던 건 그런 의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설국 열차'에서 한국인 주인공의 등장은 묵시록의 주제를 희석시키기도 하지만, 원작에서부터 드러나는 세상이 망한 이후에도 인간 사회의 갈등이 존재한다는 문제의식은 영화에서 그대로 남아 있다. '설국 열차'의 기차는 목적 없이 궤도를 돈다. 목적이 없는 게 아니라 엔진이 꺼지지 않고 끝없이 얼음과 눈 위의 궤도를 돌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기차 안에는 끝나는 세상을 피해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먼저 기차를 탄 사람들은 엔진이 있는 앞부분에 자리를 잡고 뒤편에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계급과 차별과 억압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곳에 종교가 없을 수 없다. 기차를 지키는 게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에, 기차는 종교였고 엔진은 신으로 섬김을 받는다. 속도가 떨어지는 기차의 엔진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원작의 줄거리다.

영화에선 기차가 멈추어도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미국의 포스트 묵시록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세상이 철저히 망해야만 가능하지만, 세상이 망하게 되는 과정이나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에 심판이나 재림은 없다. 대중문화 속의 묵시록이 세속화된 것을 보여 준다.

미국과 영화

활동사진의 기술을 우리가 아는 영화로 만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에게 영화는 기술이나 예술 또는 오락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영화에서 미국을 발견했고, 또 영화를 통해 미국을 생산해 냈다. 그 결과 우리의 상상 속의 미국과 영화는 분리될 수 없는 상태에서 미국은 영화로 또 영화는 미국으로 남아 있다.

20세기의 역사가 견딜 수 없는 악몽의 역사였다면, 실제와 가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미국이 현실 역사의 대안으로 혹은 역사 없는 초현실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아도르노(Adorno)는 영화와 미국이 하나가 되는 모호함을 자본주의 영화 산업 때문이라 파악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미국의 현실 도피적인 병리 현상이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보드리야르는 미국이라는 사건이 역사가 아니라 영상으로만 포착될 수 있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미국을 자신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실험장으로 삼았다.

미국의 사막과 고속도로에 주목한 것은 보드리야르만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서부 곧 미국 문명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사막과 그 문명의 상징인 대륙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그리고 그 둘이 만나 형성하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형상은 미국에 대한 상상에서 빠질 수 없다. 생명의 습함을 앗아가는 사막의 광활함은 역사가 비껴간 빈 공간으로 이해되었고, 그 위의 도로는 임의적인 두 장소를 이어 주는 길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형이상학의 기호를 연상시켰다. 사막의 형이상학은 프랑스 학자들 특유의 심오함이 아니어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사막은 극기와 수양과 초월의 의지를 시험하는 곳이었고, 이를 통해 접신을 꾀했던 공간이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꿈꾸던 청교도들이 상상했던 광야의 미국적인 원형이 사막이었다. 서부영화에서 사막은 선과 악이 벌이는 최후 결투의 장소였다. 그 장소는 문명의 타협과 계산이 통하지 않는 곳으로,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다만 지리적인 장소에 불과했다. 여기서 선과 악은 제도화되지 않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다.

사막은 미국 서부의 끝이고, 한때 서구 문명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 끝에서 역사의 끝, 곧 묵시록의 사건을 상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사막의 토양 위에 할리우드라는 환상과 자본의 산업이 탄생해 미국 그 자체를 재생산해 온 것이다.

미국 역사에서 사막이 묵시록의 무대였다는 사실은 영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사막은 과거 핵실험의 주 무대였고, 지금도 종말의 핵무기들이 대기 중인 곳이다. 무수한 외계인과 UFO에 관한 음모와 소문의 진원지이다. 네바다 사막의 'Area51'이란 곳이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거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군사기지라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막의 묵시록은 당연히 영화를 통해 완성됐다. '매드맥스' 영화 시리즈가 사막에서 벌어지는 종말의 전투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지만, 사막이 핵전쟁으로 생명이 사라진 세상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막의 묵시록을 다루는 영화는 많다.

묵시록이 최근 종교가 아니라 영화의 장르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건 아니다. 묵시록에서 종말은 언제나 세상의 종말이고, 그 종말이 누구의 행위 때문에 시작되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종말의 사건들이 묵시록이란 예언이 변하는 방식이 중요하고 그 방식은 대중문화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묵시록의 영화는 미국의 영화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단지 그런 영화들이 흥행성 때문이 아니라 미국 역사의 묵시록을 이어받아 그 이념을 지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역사의 시작부터 세상의 종말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 산업이 출범하던 시기가 서구 문명의 몰락을 고했던 1차 세계대전과 겹치는 이유도 있었고,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보여 주는 매체로 영화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장 잘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것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것이었고, 전쟁만큼 실제의 극치는 없었다. 20세기 첨단의 무기는 인명 살상만이 아니라 세상의 파괴를 가능케 했고, 그 파괴된 세상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영화화해 낸 측면이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세속의 묵시록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상이다. 세상을 한순간에 끝낼 수 있는 핵무기의 등장이 가져다준 정신적인 분열과 충격은 이루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세상의 종말만큼이나 창의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1950년대 이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 낸 수많은 묵시록의 영화는 다양한 종말의 사건과 그 결과를 예측해 주었다. 영화에서 보여 준 것은 파괴된 세상의 종말론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에 슈퍼맨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구하는 서사는 할리우드 영화가 완성한 묵시록의 구조였다.

최근의 묵시록이나 디스토피아 영화에선 구원자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해피 엔딩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의 사건들을 반복되는 영화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건 세상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암묵적 합의가 공동체 내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할 에덴동산도 없고, 꿈꿀 유토피아도 없는 세상은 이루어진 묵시록 또는 디스토피아의 세상을 말한다.

공룡의 상상력

1950년대 미국에 고속도로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시카고에서 제일 중요한 도로는 미시간호를 옆에 끼고 도심을 남북으로 가르는 레이크쇼어라는 길이었다. 1990년대 재공사를 하기 전까지, 그 도로를 타고 도심을 지날 때면 한 박물관을 정면으로 보고 달리다 그 건물을 우회해서 지나가게 돼 있었다. 마치 그 웅장하고 고전적인 건물을 바라보면서 경의를 표하고 그 상징적인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받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건물은 자연사박물관이었다.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란 개념이 등장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도 매우 흥미롭지만, 미국에 있는 크고 작은 수백 개의 자연사박물관에서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기울이는 투자와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드뮤지움이라 불리는 시카고의 자연사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전시물은 단연코 '수'(Sue)란 이름의 공룡이다. 13m의 길이에 현재까지 발견된 공룡 가운데 가장 크고 많은 뼈가 남아 있는 T-Rex(티라노사우루스)라 한다. 인기가 많아 다른 나라에 대여되기도 한다.

몇 천 만 년 전에 살았다는 동물에 대해 현대인들이 갖는 관심은 합리적이라 하기엔 너무 과하다. 화석이 된 공룡의 뼛조각을 근거로 생겨난 공룡 산업은 영화에서 박물관 그리고 관광 상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규모가 크다. 미국의 여러 주는 그 주의 공식 공룡까지 지정해 놓고 있고, 모든 주들은 공식 화석을 갖고 있다. 일례로 일리노이주는 털리몬스터(Tully Monster)라는 3,000만 년 전에 살았다는 해조류 동물의 화석을 갖고 있다.

동물의 화석에 대한 환상적인 애착, 그 긴 시간의 거리를 애써 무시하고 인간과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어떻게 설명할까. 지구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탐구 정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문명의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생각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관점에선 화석화된 동물에 대한 애착과 그 속에서 인간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를 '멸종'에 대한 관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공룡에 대한 관심은 공룡이 멸종했다는 데에서 출발했고, 더 나아가 멸종한 공룡의 뼈를 발굴해 전시하고 또 찾아가 이를 확인하고 증언하고자 하는 현상을 종교적 종말론의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사상사에서 화석의 의미는 매우 흥미롭다. 어떤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보다 기독교 세계관에 더 큰 충격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7세기 천문학은 우주의 찬란함을 연구해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영광을 돌린다는 의도의 자연과학 발전을 초래했고, 화석의 발견은 지구과학 발전의 동기가 됐다. 하지만 화석의 발견은 성경을 역사책으로 보던 시각에 큰 도전을 의미했고 인간이란 존재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코페르니쿠스보다 다윈이 서구 역사에서 더 큰 논란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화석의 의미는 그 동물이 멸종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멸종이란 개념은 18세기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멸종이 인간의 세상 인식에 등장하면서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에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에 살았던 동물 중에 지금은 멸망해서 사라진 동물의 종이 있다는 사실은 신의 계획에 따라 창조된 세상에 대한 믿음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신이 의도를 갖고 세상을 창조했다면 그 세상의 일부인 동물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주장이었다.

창조질서에 대한 믿음도 문제였지만 멸종이 가져다준 또 다른 문제는 종말에 대한 이해에 있었다. 기존의 종말론은 신의 뜻 안에서 역사가 끝나면서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이었으나, 멸종으로 종말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끝이 한 번만 있는 게 아닐 수 있다는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종말론을 뜻하는 것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세상에 존재했던 동식물 중 절대 다수가 이미 멸종했다는 연구 결과는 신과 창조물의 관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였다. 인간의 끝을 멸종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고 인간의 본질을 새로운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멸종을 설명하는 일은 이후 많은 학자들이 풀려고 했던 오랜 숙제였지만 그 의미는 지구역사의 이해나 지질학의 범주를 넘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이유가 있었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서 인간이 갖는 의미를 찾는 관심이 반영된 것이었다. 멸종에 대한 근거를 처음 제시한 조루즈 퀴비에(Georges Cuvier, 1769~1832)는 멸종의 이유로 홍수를 포함한 어떤 커다란 재난이 지구를 덮쳤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윈의 진화론도 멸종의 원인을 제공하는 이론이었다.

퀴비어의 재난설을 거부한 다윈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 등의 논리로 적응력이 떨어지는 종이 자연적으로 도태된다는 설명을 했다. 특히 다윈은 멸종하지 않은 동물도 진화를 통해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 간다는 이론을 펼치면서 인간의 존재 역시도 상대적이고 우연적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가능성을 제기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의 충격은 기독교 신앙에만 가해진 게 아니었다. 멸종과 멸망이 신의 주권과 권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라는 행성의 내적인 구성 논리에 의한 것이란 인식은 재난 묵시록의 보편화로 나타났다. 종말의 묵시록이 종교인들만의 세계관이 아니라 소설과 영화와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적인 세상 이해가 된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멸종의 가능성이 신의 불완전함을 의미하고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그 논리를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멸종에 대한 언급 없이 창조의 목적설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고, 멸종이라는 게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공룡과 인간이 공존했던 시대가 있었다는 논리도 등장했고, 멸종되어 사라진 동물들이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란 입장을 펼친 사람도 있었다. 멸종을 설명한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 미국에서 무신론의 원형으로 또 사탄의 이론으로 비판받고 근본주의가 형성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지금도 멸종과 창조질서가 병행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이런 논의들의 실제적인 주제는 종말론이다. 성서적이라는 종말론과 다른 종말의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충돌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드러나는 건 서구 사상사에서 종말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 중요성은 오늘날 화석이 된 공룡의 뼈를 발굴해 모셔 놓고 또 설치된 뼈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현상은 생명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집념을 드러낸다. 최근 멸종된 동물에서 DNA를 채취해 다시 탄생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공상 과학의 논의는 멸종을 번복할 수도 있다는 종말론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서보명 / 시카고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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