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안 해?!", '철썩!'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였다. 청소년부 여름 집회에서 꽤 유명한 대형 교회 Y 목사가 여학생들을 불러 세운 뒤 한 명의 뺨을 때렸다.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남편한테 매를 맞더라도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생각하며 참아야 합니다. 매를 맞을 때 주님의 죽음을 묵상할 수 있고 육신의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시절, 대형 교회 L 목사가 설교 시간에 자주 했던 말이다. 그들은 공식 석상에서 여성에게 폭력을 가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최근 한 대형 교회 목사의 성 추문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제보된 S교회 K 목사의 성 추문과 세습, 부정 축재 등이 SBS '그것이알고싶다'에 방영되어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하나같이 저항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여성들은 왜 저항하지 못했을까. 이는 피해 여성 개인에게 던질 만한 질문이 아니다. 대신에 그 원인을 한국교회의 권력 중독과 약자 혐오의 집단 무의식에서 찾아보려 한다.

힘의 종교

외국인 함대를 이끌고 나타난 미국 선교사들이 식민지 조선 땅에 전한 개신교는 미국의 종교, 힘의 종교였다. 조선 민중들에게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는 식민지와 전쟁 상황에서 도피처이자 '치외법권 지역'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보호와 지원을 받던 그 당시 조선 민중은 하나님이 예수를 잘 믿는 미국을 축복하셔서 미국이 물질적 부와 문명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도 잘살고 부강해지려면 오로지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는 복음 전도가 새로운 인쇄 매체와 교육을 통해 전해졌고, 급기야는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권세 있는 자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통하여 '의식의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해방 후의 미군정 개입, 적산 불하, 개신교인 대통령 취임 등, 개신교는 국가권력의 큰 축으로 작용했고, 국가의 법과 제도적 특혜 아래 성장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6‧25, 분단, 독재,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때문에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교회로 향했다. 그리고 대형 집회와 매스컴 등을 통해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폭발적인 교회 성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목사는 유명인이 되었고, 그들의 신적 권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대형 교회들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개신교 권력화'가 진행되었다.

'전능한 하나님' 신화와
목사 숭배

교회 성장의 핵심에 '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신화가 자리 잡으면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과도한 이상화'와 '과도한 증오(혐오)'라는 양가감정을 갖게 되었다. 이 신화는 교인들로 하여금 과대망상에 빠지게 하고, 개인의 내면에 실질적으로 접촉할 길을 잃어버리게 함으로써 통합적인 영성 발달을 저해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앙의 주체가 되려는 여정에서 길을 잃은 교인들은 목사에게 신앙의 자유와 책임을 양도하기 시작했다.

목사의 권력은 복종하는 자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교인들은 전능적인 환상을 목사에게 투사하고, 목사는 '권력을 향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교인들의 숭배를 받아들여 신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나르시시즘적 '대중 독재'를 행하게 된다. '전능한 하나님'은 목사에게서 화육하며 교인들은 그의 확신에 찬 모습에 열광하고 '절대적 의존'에 빠져 '마술적 구원'을 바란다. 이제 목사는 '주의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체물이 되어 '금송아지 신드롬', 목사 숭배의 우상이 된다.

목사와 교인의 관계 속에 지속되는 전능성의 판타즘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마술적 사고의 폐쇄적 공간에 공동체를 가두어 교회를 '소통 불가능한 집단'으로 만들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생각 없는 상태로의 회피와 반-이해 추구를 통해 신앙은 '광증(狂症)'이 되어 버렸다.

권력 중독과 약자 혐오의
집단 무의식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대형 교회 목사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자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불안정한 한국 사회 속에서 실패했던 무기력한 아버지들에 대한 분노 위에서 그들의 인기는 높아져 갔다. 그러고 보면, 그들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교인들 모습과 개신교 유입 초기 미국 선교사들을 선망하면서 따르던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모습이 얼핏 비슷해 보인다.

한국교회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피식민자로서 받았던 무시·능욕·경멸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에 대한 방어로,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짓밟히지 않으려면 약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약함은 혐오스런 것이다. 오로지 강해져야만 한다'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실현하고 보여 주는 권력 중독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마땅히 보여야 할 섬김의 본을 보이지 않고 권력을 향해 질주했던 대형 교회 목사들이다.

분열된 인격의 요소는 투사되기 마련이고, 억압된 것은 증상으로 나타난다. 한국교회로부터 시작된 '약자 혐오증'이 온 사회를 혐오로 물들이는 가운데, 최근 드러나는 대형 교회 목사들 행적을 보면, 권력자의 자비로운 가면 뒤에 자기 존재를 영속화하고 타자를 처참하게 짓밟는 '벌거벗은 폭력'의 무자비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부정 축재로, 세습으로, 성폭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한국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책임, 사랑을 복종으로 바꾼 책임, 스스로를 권력의 노예로 만든 책임. 한편으로는 우리도 권력 중독자들이다.

권력 중독은 약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권력 중독자들에게 여성이 성폭력 대상이 되는 것은 단지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을 폭력의 대상으로, 성적 대상으로 사물화하는 교회에 만연한 성폭력에 의문을 제기해 본 적 있는가.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면, '권력 중독'이라고 진단 내릴 수 있다.

성별에 상관없이 약자를 성폭력으로 지배하는 일은 군대나 학교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교회 성폭력을 이대로 방치하면 곧 남성도 성폭력 피해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성폭력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권력 중독과 약자 혐오의 집단 무의식에서 깨어나야 한다.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은 어디에도 없다.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권력에 중독된 언어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명분을 성서 문자 속에서 찾는다면 언젠가 '말씀'이 당신을 배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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