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생애와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일군 역사적 영향력은 상상외로 다방면에 걸쳐 있고, 이에 따른 평가도 다양하고 다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은 그는 저항을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 저항은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바꾸는 '개김'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해 보자. 저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 질문은 16세기 개혁자들의 종교개혁 신학을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루터의 말을 빗대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1947년 감리교 신학자 필립 왓슨(Philip S. Watson)은 루터의 신학을 이렇게 정리했다. "Let God Be God!" 루터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바꾸어 보자. 루터의 글에 아주 빈번히 출현하는 용어인데, "Gottes Gottheit", 직역하면 "하나님의 신성"이다. 

무슨 말일까? 풀어 말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바꾸면, '복음'이다. 반대말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 해야 할 일, 이건 '율법'이다. 물론 이 차원에서 여러 각도의 설명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정신에만 국한해 말하면, "개혁을 가능케 하는 저항의 궁극적인 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나온다"는 뜻이 된다.

루터의 <95개조 논제>. 이 문서는 루터의 예상과 달리 종교개혁 단초가 되었다. 

루터에게 인간은 고전적인 용어대로 '죄인'이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며 그 권좌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고 행동하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인간은 신실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Promissio)을 받고 이를 소유하는, 완전한 의인이 된다. 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중간기다. 그렇기에 세례받은 인간은 '완전한 의인인 동시에 완전한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다.

이 인간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세상 악에 대항하는 책임적 존재가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중세 사회가 가르치던 계급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루터는 항상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죄인의 계급은 불필요하다. 다시 말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 우린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다."

단,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여전히 세계 공동체, 교회 공동체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혼합체(Corpus mixtum)라는 사실도 간과하지 않는다. 의인에 속하는 자의 특징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소교리문답, 십계명 1조 해설).

종종 종교개혁 신학을 요약할 때, "sola scriptura"라는 슬로건을 잘 사용하는데, 16세기 루터파 교인들에게만 국한해서 말한다면, 이 구호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Verbum Domini Manet in Aeternum)"에 있다. 이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시 루터파 교인들은 자기 옷과 가재도구에도 VDMA라는 알파벳을 새겨 넣고 매순간 개신교인임을 상기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그 어떤 권위도 용인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으로 루터파 교인들은 교황 제도의 권위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저항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논제>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시대적 요구가 루터를 그곳으로 밀어붙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2세대 개혁자 칼뱅과 달리 루터는 종교개혁자가 되려고 일어선 인물이 아니다. 내 표현대로 하자면,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게 된 것뿐이다." 보통 1517년(95개조 논제)부터 1530(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년까지를 종교개혁 전성기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 루터의 논조를 추적해 보면 이런 결론은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 시절, 시편·로마서·갈라디아서·창세기 강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에 대한 이해가 생겼고, 성서에 대한 이해와 교회 현실의 상황이 합치되지 않자 신학교수 루터는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대학 게시판 격이던 성곽 교회 정문에 게시했다. 목적은 '토론'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등장한 흑사병, 르네상스, 인문주의, 대학 개혁운동,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독일의 피폐한 상황과 맞물려 이 문서는 개혁의 물꼬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도 로마 교황청은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독일 수도사 한 명만 처리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로 여겼다. 그 후 루터는 1518년 아우구스부르크 청문회를 거쳐, 이듬해 여름 요하네스 엑크와 라이프찌히 논쟁을 한다. 여기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이단'으로 낙인찍히고, 결국 1520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예비 파문장>을 받는다.

1520년, 이 시기가 중요하다. 라틴어로 작성된 파문장을 비텐베르크 시민들 앞에서 독일어로 번역해 읽어주며 불태워 버린 뒤, 루터는 자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해 나온 중요한 세 권의 문서가 종교개혁 3대 논문으로 알려진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다. 이 세 권은 각각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권위에 대한 저항,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이라는 흐름이 흐른다. 앞서 언급했던 '권위에 대한 믿음에서 믿음에 대한 권위로'라는 주제다.

이 세 권은 금속 활자 인쇄술과 시각언어 매체인 예술의 힘입어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그 중 <독일 귀족에게 고함>은 루터 저작 가운데 <독일어 성서> 다음으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초판 인쇄 4,000부가 한 달 만에 매진됐고, 그 후로도 루터가 살아생전 15판을 더 인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여기엔 교회가 스스로 쌓아 올린 세 가지 벽이 언급된다. 첫째, 사제와 비사제의 벽. 둘째, 성서해석의 벽. 셋째, 공의회를 통한 교황의 폐위와 새로운 교회 기구 제안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듬해인 1521년 루터는 제국 의회가 열린 보름스(Worms)에서 제국 추방령이 선고된다. 이는 곧 사형선고였다. 그러나 비텐베르크 선제후의 도움으로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으로 피신한 루터는 거기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다.

루터가 사라진 비텐베르크와 그를 따르던 지역은 혼돈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비텐베르크 의회는 루터를 소환하여 혼돈을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급진적 개혁으로 방향을 잡은 사람들을 돌려 세우기엔 역부족이었고, 급진적 개혁 세력들은 농민들과 힘을 합해 제국 전체를 개혁하려고 했다. 급진세력의 대표 인물은 루터의 동료였던 칼슈타트(Karlstadt),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같은 이들을 들 수 있다.

1521, 보름스 회의 모습. 이 회의에서 루터는 제국 추방령이 선고됐다.

문제는 1525년이다. 농민 전쟁에서 보여준 루터의 태도는 신학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루터가 당시 현실에 대한 냉철할 판단이 옳았는지는,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의문스럽다. 어찌 됐건, 농민 전쟁이 일단락된 후 루터는 독일에서 인기가 급감했다. 하지만 이는 종교개혁사라는 큰 틀에서 보면 상당한 이득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후 루터는 개신교 진영 내부 일에 힘을 쏟게 되기 때문이다. 1525년 이래 루터는 부패하고 게으른 목회자들을 교육하고 징계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동시에 귀족들을 압박하여 학교를 세울 것과 부녀자들의 교육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상징하는 열매가 1525년 시행된 내부 개혁 프로그램인 '시찰단'과 1529년 <대/소교리문답>이다.

이 저작은 루터 스스로 자기 신학을 가장 잘 요약하고 반영한 것으로 꼽는데, <소교리문답>는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고 암송시키는 일종의 가정 교육서고, <대교리문답>은 교육받지 못한 교사와 목회자를 위한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신교인이 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일종의 안경이고, 개신교 신학의 결정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십계명·사도신조·주의 기도·세례·성만찬이라고 하는 다섯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고,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도 기독교 전체 교리를 조망하도록 쉬운 언어로 작성됐다. 이것은 개신교 최초의 교리문답서며, 후에 칼뱅의 <기독교강요> 초판의 기본이 된다.

<대교리문답>의 특징은, 문체가 '시장통 언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주 쉽다. 여기서 루터의 번역 원칙을 볼 수 있는데, 청중의 눈높이로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성서의 언어란 언제나 '어머니가 아이에게 사용하는 언어'가 되어야 하며, 교육받지 못한 평민들의 언어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쉬운 언어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풀어놓은 대표 저작이 바로 <대교리문답>이다. 한국에도 번역돼 나왔으니 종교개혁자의 거친 숨결이 어떤 것인지 한번 집어 읽어 볼 만할 것이다. 

1525년부터 1529년까지 시기가 내부 기틀을 다지는 기간이었다면, 1530년은 개신교회가 제국 안에서 공인받는 역사적 전기가 된다. 아우구스부르크 제국 의회에서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은 루터의 신학을 요약하여 제후들과 함께 황제 앞에서 <신앙고백서(Cofessio Augustana)>를 낭독하는데, 이로써 개신교회는 역사 안에서 공식적 출발을 선언한다.

1530년 이후 죽음 직전까지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갈라디아서와 창세기 강의를 도맡는다. 그는 교회 설교가로 삶을 마감한다. 죽기 3일 전까지 루터는 설교를 끊임없이 했다. 3,000편의 설교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남은 것은 1,500여 편 정도다. 고향 아이스레벤은 루터의 마지막 설교 장소였고, 동시에 잠드는 장소가 되었다. 루터 사후에도 개혁을 위한 소통과 저항의 움직임은 역사 안에서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신은 개신교회가 세워지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계속 열매를 맺어갔고, 맺어갈 것이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뉴스앤조이 김은석

종교개혁은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에 대한 권위로 바꾸는 저항'이다. 이를 위해 구습에 대해 질문하며, 소통하고, 저항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약속) 안에서 나온다.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다(VDMA)." 이 신앙고백의 삶이 구부러진 세상을 변혁한다. 이 정신은 오늘 한국 땅에서도 여전히, 그리고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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