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제269조(낙태) ①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우리나라 법은 임신중절을 처벌합니다(형법상 낙태의 죄). 이 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지금 페미니즘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관한 (1)이제까지 역사를 돌아보고 (2)각 진영 논리를 고찰한 다음 (3)낙태죄 폐지 운동의 미래를 내다보고자 합니다. - 글쓴이

'강남역 이후'의 페미니즘

2016년 5월 강남역 어떤 노래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이 사건은 수많은 여성의 애도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여성의 죽음은 단지 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처지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며 겪었던 일상적인 공포, 분노, 모멸감 등이 강남역 사건을 통해 한곳에 뭉쳤고, 뭉쳐서 큰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강남역 사건'은 일상에서 여성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단지 개인의 예민함 때문이 아니며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여성이 '강남역 이후' 자기 삶에 일어난 변화를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강남역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강남역 사건은 1987년 한국여성민우회 설립 이후 우리 사회 면면한 흐름이었던 '페미니즘'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냈습니다.

페미니즘 2017

지난해 페미니즘은 여러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강남역의 희생을 기억하려는 싸움과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와의 싸움, 우리 사회 낡은 여성관을 고치려는 싸움, 낡은 의식과 법 제도를 고치려는 싸움 등입니다. 갖가지 주제가 페미니스트들의 전선이 되었습니다.

'소라넷 폐쇄'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페미니즘을 소개하는 책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했습니다. 최근 다시금 불어난 페미니즘 운동은 강남역에서의 경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큰 흐름이 되었습니다. 아직 페미니즘에 반대할 수 있지만, 적어도 아무도 페미니즘을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낙태죄 폐지 운동

낙태죄 폐지 운동은 2017년 페미니즘이 애쓰는 이슈입니다. 사실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어 왔으며 결코 새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강남역 사건 이후 생겨난 여성 단체가 이를 다시 불러냈습니다.

2016년 9월 보건복지부에서 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법 개정안을 내었습니다. 이에 반발하는 여성들은 검은 옷을 입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2016년 10월의 '검은 시위'를 시작으로, 이 단체들은 지금까지도 운동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현행법은 임신중절수술을 '비윤리적 의료 행위'로 정하고 시술한 의사와 시술받은 환자를 처벌합니다. 이 법(형법상 낙태의 죄)을 폐지하자는 주장입니다. 지난 대선에서도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와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낙태죄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고 새 정권이 출범한 지금까지, 별다른 변화는 관측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낙태죄 문제는 아직까지도 매듭지어지지 않은 문제이며, 우리 사회 여러 부분이 수술대에 오른 지금, 언제든 다시 등장할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까지의 낙태죄 논쟁:
헌법 소원 그리고 합헌 판결

낙태죄는 과연 폐지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답하려면 이제까지의 낙태죄 논쟁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미 2012년,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의 죄가 위헌이라는 헌법 소원 심판에 대해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2010헌바402). 임신중절수술은 범죄가 맞다고 확인한 셈입니다. 따라서 이 판결의 논리를 넘어서야만 낙태죄가 폐지될 수 있고, 지금의 낙태죄 폐지 운동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낙태죄 합헌 판결의 논리

판결문은 임신중절수술이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합니다. 흔히 임신중절에 관한 논쟁은 'pro-life(생명 우선) vs. pro-choice(선택권 우선)' 구도를 취합니다. 우리 헌법재판소 판결도 이 구도를 따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낙태죄로 말미암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침해되는 것이 사실이나, 태아의 생명권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보다 앞서기 때문에 낙태죄를 폐지하면 안 된다는 것이 판결 요지입니다.

우선 헌법 소원을 청구한 사람은 낙태죄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임부의 자기 낙태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이하 '자기 낙태죄 조항'이라 한다)은 출산을 원하지 않는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는 것이어서, (중략) 임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등 기본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다."

"개인의 인격권·행복추구권에는 개인의 자기 운명 결정권이 전제되는 것이고, 이 자기 운명 결정권에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 즉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 내재하는 특별한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태아의 생명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이러한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하며, 태아가 독자적 생존 능력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그에 대한 낙태 허용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리고 청구인이 주장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기 낙태죄 조항으로 말미암아 임부의 자기 결정권이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제한의 정도가 자기 낙태죄 조항을 통하여 달성하려는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다."

판결문은 태아도 사람처럼 생명권을 가진다고 판단합니다. 태아가 생명권을 가진다면, 임신중절수술은 곧 생명을 해치는 행위이므로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훼손하더라도 유지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한마디가 판결 논리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판결문 나머지 부분은 태아가 왜, 언제부터 생명권을 가지게 되는지를 길게 쓰고 있습니다.

"헌법이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으로 될 예정인 생명체라는 이유 때문이지, 그것이 독립하여 생존할 능력이 있다거나 사고 능력, 자아 인식 등 정신적 능력이 있는 생명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것은 수정 후 14일경에 이루어지고, 그 이후부터 태아는 낙태죄의 객체로 되는데, (하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헌 판결의 틈새

요약하자면,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순간(수정 후 14일경)부터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며 생명권이 인정됩니다. 그러나 착상된 수정란의 '생명권'은 좀 애매합니다. 우리나라 법은 또 한편으로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경우' 24주 이내에 임신중절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도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모자보건법 제14조). 불가피한 사정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① 의사는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본인과 배우자(사실상의 혼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의 동의를 받아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소중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태아의 생명은 약간 다릅니다. 위의 모자보건법 제14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불가피한 사정'이 인간의 생명에는 적용되지 않고 오로지 태아의 생명에만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반전의 여지가 있습니다. 합헌 판결의 핵심인 '태아의 생명권'이 인간의 생명과 똑같이 절대적 권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권'에 기반한 낙태죄 합헌 판결에도 약간의 틈이 있는 셈입니다. 지금 시도되는 낙태죄 폐지 운동이 바로 이 틈을 겨냥하고 있습니다.(계속)

박지연 / 아주 보통의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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