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의 삶의 이야기가 본 글의 내용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남미, 미국 그리고 유럽

나는 어렸을 때(1974년) 부모님을 따라 멀리 남미 파라과이로 가서 이민자로서 살았다. 거기서 고등학교를 마쳤고 파라과이 아순시온국립대학교으로 진학하여 경영학을 수학했다. 그 후 이민을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학(M.Div.)을 공부하고, 1991년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파라과이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일을 시작하였다. 그 후 나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를 만나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교(ISEDET)에서 해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선교사로 지내면서 가끔은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 보고도 하고 친구 목사들을 비롯한 교계 관계자들과 모임을 갖고는 했다. 가끔은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어디서 학위를 했느냐는 질문을 하고는 했다. 이 질문에 나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공부를 했다고 답변을 한다.

그 후에 생각을 해 보니 나의 답변을 들은 사람들 반응이 이상했다. 사람들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답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지극히 짧다는 것이었다. "아, 네…" 그리고 그만이었다.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반응에 의아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고는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똑같은 질문에 이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했습니다"라는 답변에는 대다수 사람이 지대한 관심과 부러움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유학 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끈질기게 물어보기도 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십수 년 전의 나의 개인적인 경험은 당시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미국 혹은 유럽 사회를 동경하고 있으며, 그 나라들에 경도되어 있는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 많은 부분에서 미국과 유럽 사회를 향한 경도 현상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 전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해 한국의 새 정부가 이견을 보이는 것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격노"했다고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와 더불어 우려를 나타내는 우리들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미국 의존도, 미국에 대한 종속적 태도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미국제 한국교회?

미국에 대한 사회-정치-문화적 의존도는 한국 기독교 안에서 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신학, 목회, 신앙 양태는 미국 교회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 신학자 중 미국 유학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 어떤 나라보다 많다. 한국 목회자들은 미국 교회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다. 한국교회에서 유행하는 거의 모든 목회 모델은 미국 교회에서 온다.

'구도자 예배', '목적이 이끄는 삶', '야베스의 기도', '긍정의 힘', 그 이전에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 등은 한국교회를 휩쓸었던 목회 모델이었다. 지금도 미국 교회를 배우려는 열망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현재 목회 현실과 목회 사역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 교회 모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복음적 신학자인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은 그의 저서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원제: Made in America: the Shaping of Modern American Evangelicalism, 1996년, 2001년 김재영 번역, 나침반)에서 미국 교회 특징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1)

마이클 호튼의 지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복음이 미국 문화의 옷을 입으면서 실용주의(pragmatism)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용화의 옷을 입은 복음은 주관적, 감각적 그리고 물량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으며 그것은 지난 글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소비자 중심 목회 모델을 형성하게끔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호튼은 그의 저서에서 "예수는 상품이며, 죄인으로서 우리들은 소비자이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상품을 포장하고 판매하는 사람들로 변질된다. 따라서 소비자들인 우리는 더 이상 빚진 자들이 아니라 상품 구매자들로 나타난다"(영어 원본, 61쪽)라고 말하면서 미국 기독교의 실용화와 상품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미국 교회 영향에 의한 실용주의와 복음의 상품화 현상은 한국교회가 교회 성장과 번영신학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미덕1: 교회 성장

또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에 대한 미국 교회의 영향력은 캘리포니아의 풀러(Fuller)신학대학을 통하여 유입된 교회성장학에서 가장 강하게 발휘되었다. 교회성장학은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각 교회가 성장함으로써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올바르게 전도가 이루어졌다면 교회의 수적 성장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점차 교회 성장이 교회 사역의 목적인 것처럼 변질되게 만들었다.

따라서 교회의 수적 성장은 교회의 사역을 정당화하는 잣대로 작용하게 이른다. 결과적으로 교회 성장을 위한 여러 다양한 방법론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원리가 동질 집단의 원리이다. 동일한 성격을 가진 집단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원리다.

교회성장학에 큰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목회의 성공 여부를 수적 잣대로 가늠하게 되었고, 초대형 교회를 이룬 목회자가 믿음과 영성의 최고봉에 서 있는 사람들로 간주되어졌다. 이렇게 교회 성장과 번영신학이 한국교회를 사로잡고 말았다. 미국 교회의 완벽한 복사판으로 한국교회가 탄생했다고 지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목회적-신학적으로 미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마이클 호튼은 위에서 언급한 저서에서 "이제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 온유한 자들, 절망하고 짓밟힌 자들과 억압받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부유한 자들, 거만한 자들, 성취자들, 권력 있는 자들, 성공한 자들 혹은 유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종교가 되었다. (중략) 번영의 복음은 미국에서 폭넓은 관객을 확보하였다. 많은 전도자가 이 물질주의적 복음을 장려하고 있다. (중략) 복음주의 신앙의 미국화(美國化, americanization of evangelical faith)가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중심주의, 시민 종교, 실용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자아도취, 쾌락주의, 물질주의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마법적 종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영어 원문, 85~86쪽)라고 지적한다.

호튼의 지적이 비록 20년 전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오늘 한국교회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 하락은 이 같은 기독교 복음의 변질된 전파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최고의 미덕2: 번영신학

한때 삼박자 구원으로 비롯한 기복신앙이 한국교회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삼박자 구원은 요한삼서 1장 2절을 바탕으로 구원 개념을 이해하는 것인데, 삼박자 구원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혼의 구원과 생활의 복과 건강의 복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으면 몸이 건강해지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온전한 개념이라고 이해했다.

삼박자 구원만큼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영향을 준 이론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질적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물질적 번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이 내시는 것이다"라는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는 했던 것이 한국 교인들 모습이기도 하다. 기복신앙이다.

그런데 얼마 후 기복신앙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삼박자 구원으로 대변되는 기복신앙은 점차 그 힘을 잃는다. 샤머니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마치 무당에게 복채를 바치고 복을 빌어달라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과 삼박자 구원이 다를 것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기복신앙이라는 단어는 샤머니즘적이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단어로 간주되어 기독교 내에서 점차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기복신앙은 얼마 후 또 다른 미국적 표현인 '번영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번영신학'은 미국의 유명 작가들 작품을 통하여 세련된 모습으로 한국교회에 침투했다. 특히 2000년도에 미국에서 출간되어 3개월 만에 410만부 이상이 팔려 <USA투데이>,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던 애틀랜타의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 축복받은 삶으로 나아가기>(The Prayer of Jabez: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는 한국교회에 번영신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한국교회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거의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 조엘 오스틴(Joel Osteen, 1963년 3월 5일~)이다. 그는 오늘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목사이며, 레이크우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 중이다. 한국에서 그의 책 <긍정의 힘>, <잘되는 나> 등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물질적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최고 목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윌킨슨과 조엘 오스틴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번영신학'은 한국교회가 물질적 풍요를 따르게 하였으며, 예수의 십자가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생명의 길을 벗어나 물질적 번영을 믿음의 표징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성공(?)한 목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러지 못한 목사는 게으름과 불신앙의 결과로서 목회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 실용주의 모델과 '번영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특히 실용주의는 한국교회를 심각하게 오염한 주범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번영신학은 실용주의의 실질적 열매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정당한 것은 우리 목적을 달성케 해 주는 실용적 방법론이다. 방법의 정당성은 방법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가 택한 방법이 우리가 바라는 바를 달성케 해 줄 수 있느냐'라는 것에 있다. 결과가 방법의 정당성을 가늠하는 잣대이다. 결과가 방법의 정당성을 결정짓는다. 이는 목회의 마키아벨리 현상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초대형 교회로 성장한 목회자는 모든 면에서 정당하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놀라운 성장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이해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성공한 그에 대하여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성과와 결과는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기에 그의 자녀를 통하여 지속되어져야 한다고 이해한다. 이처럼, 모든 것은 그가 이룩한 결과로 정당화된다.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에게서 전수받은 마키아벨리적 실용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세련된 '번영신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와 번영의 복음을 비롯한 긍정적 사고방식의 물질적 풍요를 쫓을 것이 아니라 다시금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예수의 길을 따라나서야 한다. 진정한 교회 해방은 미국으로 대변되는 '실용주의'와 '번영신학'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한국교회여, 미국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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