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업과 목회를 병행하는 서문원 목사. 사진 제공 서문원

"여러분은 왜 일을 하십니까.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이건 성경의 전제 조건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은 '복'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나른한 일요일 오후.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눈꺼풀이 무겁다. 안 그래도 졸린데 '일'과 '복'을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으니 집중력이 바닥을 쳤다. 예배당 분위기도 갈수록 가라앉는 듯했다. 설교는 계속됐다.

"여러분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내 일에 성실하면 '창조력'이 생깁니다. 고민하다 안 되면 현장에 가 보십시오. 기가 막힌 일이 떠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보통 이쯤 되면 '아멘' 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교인 수십 명은 잠잠했다. 교인들 앞에서 '현장', '성실', '창조력'을 언급하는 목사를 보니 내심 불안해졌다. '목사가 일을 주제로 저렇게 말해도 될까' 생각이 들었다. 괜한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목사는 일반 교인 못지않게 '현장'에서 일해 왔다. 중소기업 3년, 과일 장사 2년, 집짓기 17년. 오죽했으면 주위 목사들이 "제발 일하지 말고, 목회를 하소"라고 말렸을까. 전남 곡성에서 온 서문원 목사(소망의언덕수도원) 이야기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6월 18일, 서 목사는 하남시 덕풍교회(최헌영 목사) 6월 신앙 강좌 강사로 나섰다. 서 목사는 최헌영 목사와 호남신학대학원 동기다. 그는 이날 '왜 일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메시지는 셈법이 필요 없는 산수 문제처럼 쉽게 다가왔다. 왜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서 목사는 첫째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둘째 가정경제를 위해서, 셋째 이웃을 위해서라고 결론 내렸다. '죄짓는' 일이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하든 상관없다. 신앙인이라면 특히 '성실'해야 한다. 일이 안 풀리면 간구하면 된다. 하나님은 지혜와 창조력을 선물로 준다. 교역자도 직접 노동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교인의 '삶의 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가난은 곧 복이자 진리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 의지한다. 풍족하면 간절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멀리한다.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처음에 어색해하던 교인들은 중간중간 '아멘'을 외쳤다.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힘들 때 주님을 찾는 게 믿음의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말로 강의가 끝났다. 색다른 설교를 맛본 교인들은 서 목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교회를 벗어났다. 한 교인은 "목사님 설교 듣고 시험에 든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서 목사도 덩달아 웃었다.

강의가 끝난 뒤 덕풍교회 사무실에서 서문원 목사를 만났다. 목회를 해야 할 목사가 어쩌다 17년간 손에 흙을 묻히며 살아왔을까. 흙내 나는 삶을 들여다봤다.

전통 유교 집안 출신
기도원 생활하다 목사 꿈꿔
낡은 교회 부임하며 집짓기 사역

집짓기와 목회를 병행해 온 서문원 목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서 목사 고향은 산 좋고 물 좋은 전라도 곡성이다. 전통적인 유교 집안 장손으로 태어났다. 대학 졸업 때까지 교회 문턱을 넘어 본 일이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가 교회에 출석하며 집안에 신앙이 싹텄다. 서 목사도 친구 손에 이끌려 드문드문 교회에 나갔다. 유교 가정이 '믿는 가정'으로 바뀌었다. 서 목사는 "누나가 목사 아내가 됐는데 가족을 위해 기도를 열심히 했다. 그 기도가 쌓여서 변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도 출신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울에서 지냈다. 서 목사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중소기업에서 일했다. 아내는 과일 도매업을 했다. 벌이는 아내가 훨씬 좋았다. 서 목사는 3년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내를 도왔다. 다니던 교회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 서 목사 부부는 압구정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후 2년간 호황을 누렸다.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게에 물이 들이찼는데, 원인 불명이었다.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경기도 하락했다. 부부는 강북 미아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서 목사는 수유역 근처에 있는 한 구국기도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거기서 기도·예배·봉사에 집중했다. 기도원은 '은사', '은혜'를 강조했다.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아쉬움이 들었다. 마음 한편에는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기도 끝에 1999년 광주 호남신학대 신대원에 입학했다.

신대원 입학 후 1년 뒤 장성에 있는 행정교회에 부임했다. 재적 12명, 출석 교인 6~7명밖에 안 되는 시골 교회였다. 지역 목사들은 "여기는 거쳐 가는 곳이니까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 33년 된 교회에 목사 안수도 받기 전이었던 서 목사가 17번째 '담임'으로 부임했다. 그만큼 교회 상황은 열악했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여러 교회 후원으로 겨우 유지했다. 후원 교회들은 담임전도사로 부임한 서 목사에게, 매달 보고서를 제출하고 연말에는 '교회 자립 방안'을 강구하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후원은 얼마 가지 않았다.

서 목사와 집사들이 일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서문원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서 목사는 "필요한 물질은 하나님이 채워 주셨다"고 말했다. 문제는 낡은 예배당이었다. 마루는 썩어 있었고,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샜다. 그즈음 교인에게 기증받은 땅에 교회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조립식으로 짓자는 이야기가 한창 나올 때, 서 목사가 우연히 황토 집짓기 교육을 받으면서 계획이 변경됐다. 전국에 '황토 바람'이 불 때였다. 교인들과 4박 5일간 교육을 받은 서 목사는 바로 실전에 돌입했다.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 예배당 35평, 사택 25평 공사에 돌입했다. 뼈대를 세우고, 흙벽돌을 쌓고, 황토로 미장했다. 공사는 10개월 만에 마무리됐다. 시간과 품이 제법 들었지만, 막상 해 보니 된다는 사실에 서 목사와 교인들은 자부심을 느꼈다. 다 지은 예배당은 지역 '볼거리'가 됐다. 하루에 몇 팀씩 흙집 예배당을 보러 장성을 찾았다.

예배당 건축 이후 건축 의뢰
매년 평균 2채씩 지어
돈 못 받아 빚지기도

공사를 마치고 목회에 집중하려 할 때, 집을 지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5평짜리를 지어 주고 나니, 60평짜리 단독주택을 세워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뜻밖의 요청과 함께 서 목사는 목회와 집짓기를 병행했다. 매년 평균 2채씩 집을 지었다. 다른 교회 예배당을 무상으로 지어 주기도 했다.

목회만 했다면 겪지 못했을 별의별 일도 다 겪었다. 공사가 끝났는데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생트집을 잡는 집주인을 만났다. 구두계약을 맺어 놓고 다른 업체와 공사를 진행한 교회도 있었다.

"한번은 거래 업체에 목재값을 줘야 하는데, 이상한 이유로 트집을 잡으며 돈을 안 주더라. 목사가 가서 돈 달라며 드러누울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같이 일한 집사님들도 마음 아파했다. 이 공사 때문에 빚을 졌고, 지금도 갚고 있다.(웃음) 인건비조차 못 받을 때도 있었는데, 같이 작업한 사람이 나를 신고해 노동청에 다녀오기도 했다."

애당초 '계약서'를 썼더라면 크고 작은 문제가 덜 했을지 모른다. 서 목사는 줄곧 계약서를 쓰지 않고 공사를 해 왔다. '믿는 사람'은 다르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집주인에게 목사 신분을 밝히고, 공사비를 떼먹거나 도망갈 일 없으니 걱정 말라고 당부했다. 인건비를 제외한 재료비는 나중에 달라고 했다. 작업에도 충실했다. 인건비가 더 나오는 것도 아닌데 연장 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함께 일한 집사님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서 목사는 말했다. 작업을 중단하고 도망간 다른 업자를 대신해 가서 일을 마무리해 준 적도 많다.

수십 년간 해 온 집 짓기는 '해외 건축 사역'으로 이어졌다. 서 목사는 집사들과 함께 2009년 '미션빌더스선교회'를 조직했다. 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을 5차례 다녀오며 기독 학교, 유치원, 사택 등을 지어 줬다. 적잖은 예산을 쏟아 붓고, 상당한 시간이 투입됐다. 한국에서 하는 작업보다 훨씬 힘이 들지만, 앞으로 해외 건축 사역은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집짓기와 별개로 서 목사는 2000~2014년까지 개인 작업을 해 왔다. 곡성 죽곡면 화양리 1,800평 부지를 평당 1만 원에 사들였다. 이곳에 돌과 흙으로 만든 작은 건물 7채와 예배당을 세웠다. 서 목사는 이곳을 '소망의언덕수도원'이라고 불렀다. 산속에 위치한 수도원에서는 마을 아래로 흐르는 보성강이 보인다. 면 소재지까지 차로 2~3분밖에 안 걸려, 입지 조건도 좋다.

아내 김명희 목사의 뜻이 적극 반영된 수도원에서는 성경 통독과 기도 훈련 등 영성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올해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수도원을 운영한다. 이미 호남신대·한일장신대 등 신학대에서 수도원을 사용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이중직이 필요한 이유
"교인들 삶 들여다보고
지혜, 경험 얻을 수 있어"

전남 곡성에 있는 소망의언덕수도원. 사진 제공 서문원

서 목사는 올해 3월 광주 북구에 소망의언덕수도원 처소 개념으로 소망의언덕교회를 개척했다. 지금까지 담임해 온 행정교회에는 다른 목사가 부임했다. 현재 소망의언덕교회에는 12명이 출석하고 있다. 서 목사는 당분간 건축 대신 목회와 수도원 운영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17년의 삶을 되돌아본 서 목사는 "어중간한 이중직을 해 온 셈"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무조건 이중직이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니 전적으로 목회에 헌신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목회자라면 '일'을 해 보는 게 꼭 필요하다고 했다.

"이중직은 교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매우 필요하다. 과거 어른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힘들다고 찾아오면 '기도하면 된다'고 말했다. 집세 못 내고, 일자리 없는 교인들에게 '기도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목회자가 직접 경험해 보면 저런 소리 못 한다. 그래서 나는 많은 목회자, 목사 후보생이 노동을 경험했으면 한다. 1~2년 만이라도.

일을 하게 되면 교인의 삶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 사이의 갈등도 알게 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조언할 수 있을지 지혜도 얻을 수 있다. 말씀을 전할 때는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교회 안 다니는 어떤 분은 내게 '하늘 구름 잡는 소리 안 해서 좋다'고 하더라. 교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일)이 꼭 필요하다."

곡성 수도원에 있는 건물 내부 모습. 사진 제공 서문원
서 목사(사진 맨 오른쪽 )는 2009년부터 해외 건축 사역을 해 오고 있다. 사진 제공 서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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