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치는 팽목항. 뉴스앤조이 박요셉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단원고 희생자 문지성 양(2학년 1반)의 아빠 문종택 씨를 처음 본 건 3년 전 팽목항에서다. 당시 팽목항 구세군 급식 천막에서는 매일 저녁 7시에 개신교 예배가 열렸다. 참석자는 대부분 자원봉사자, 언론사 직원이었다. 문종택 씨는 가끔 예배에 참석했다. 맨 뒷자리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렸다. 예배가 끝나면 바로 자리를 떴다.

몇 달 뒤, 광화문광장에서 문종택 씨를 다시 봤다. 검은 머리는 허옇게 셌고, 얼굴은 전보다 더 말라 있었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느냐는 질문에 문 씨는 "학살(그는 참사 대신 '학살'이고 표현했다) 이후 8kg이 빠졌다. 살찌는 게 더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손에는 방송용 비디오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 방송 '416TV' 카메라였다.

그는 국회, 광화문, 팽목항, 동거차도, 목포신항 등 세월호 가족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카메라를 들었다. 촬영이 끝나면 안산 합동 분향소 앞에 있는 416TV 컨테이너로 돌아와 밤새 영상을 편집해 인터넷에 게시했다.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세월호를 알리고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416TV 사무실 내부. 문종택 씨는 이곳에서 자신이 찍은 영상을 편집한 뒤 인터넷에 올린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세월호 참사 원인 
밝히려고 든 카메라
팽목항서 본 언론의 민낯

문종택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6월 16일 안산 합동 분향소 416TV 컨테이너를 찾았다. 문 씨는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그는 "잠을 얼마 못 잤어요. 어제 목포신항에 다녀왔는데 새벽 1시쯤 집에 왔어요. 내일은 고 김관홍 잠수사 추모 문화제에 가요"라고 말했다.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는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지난 2주 동안만 해도 목포, 광주, 전주, 수원, 안양 등을 다녀왔다.

문 씨는 2014년 8월 8일 처음 카메라를 들었다. 세월호 가족들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을 시작할 때였다. "당시 여당(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가족들을 외면했어요. 그런데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싸늘한 표정이 싹 바뀌더라고요. 그렇게 부드러운 모습이 없었어요." 문 씨는 새삼 미디어가 가진 힘을 깨달았다.

"가족들에게는 우리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고 진실을 알리는 매체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416TV가 만들어졌죠. 나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이 왜 그렇게 떠났는지 밝히겠다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어요."

문 씨는 세월호 관련 행사가 있으면 어디든 찾아갔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면서 일에 매달렸다. 카메라·방송에 문외한이었을 뿐더러, 컴퓨터도 잘 다루지 못하는 그였다. 독립 매체 기자들에게 카메라 작동법과 편집 기술을 배워 가며 일을 시작했다. 지금도 컨테이너 벽에는 컴퓨터 프로그램 단축키와 전산 업체 연락처가 적혀 있다.

지성 아빠 문종택 씨는 지성이 사진을 보여 주겠다며 컴퓨터를 켰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참사 초기, 언론은 세월호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고 사고 해역 구조 상황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언론에 등을 올렸다. 문 씨는 방송이 현장을 그대로 담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고 당일에는 뉴스가 제대로 나갔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왔다 가면서 방송이 꺾이는 거예요. 가족들 말은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정부 측 입장만 대변했어요. 화가 났죠. 한 방송사 중계차에 찾아가 항의했어요. 현장 상황을 눈으로 직접 지켜보지 않았느냐, 왜 이렇게 방송이 편파적이냐고 따져 물었죠. 그러자 팀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아버님, 죄송합니다. 잘 아시잖아요. 저희들도 위쪽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기가 막혔죠. 기자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어요. 팽목항에 있는 가족들, 잠수부, 어부들이 아무리 바른말을 해도, 기자가 하는 말 한마디보다 못하잖아요. 국민들은 뉴스로만 현장 상황을 접하니까요."

기자들은 참사 직후 촬영 현장에서도 문종택 씨에게 상처를 줬다. 그는 촬영할 때 노란 옷을 입지 않았다. 기자들은 문 씨가 세월호 가족이란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오늘은 다투지 않네. 그림이 안 나오는데 어쩌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문 씨는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나 가족들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기사가 될 만한 장면·상황만 찾는 언론이 미웠다.

문종택 씨는 세월호 참사 진실을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매일 카메라를 든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40년 신앙생활의 모순 
세월호 참사로 직면
밤새 울면서 영상 편집 
416TV 사무실서 기도

세월호 참사로 깨달은 건 언론사 생리만이 아니었다. 참사 직후 목사들은 세월호 참사를 놓고 막말을 쏟아 냈다. 일부 교인들은 소셜미디어로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 문 씨는 40년간 이어 온 신앙생활의 모순과 한국교회 민낯을 직면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교회에 속았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목사와 교회를 믿고 살았던 거죠. 주님을 닮아 가는 삶을 좇아야 하는데, 목사와 교회를 위해서만 살았어요. 교회 밖에서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만 생활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착각했어요. 40년을 그렇게 살았죠.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이 지성이에요.

아이들이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남겼어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도처에 널려 있는 문제를 알게 해 줬어요. 안타까운 얘기지만 그렇게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한국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면, 제대로 고칠 수 있다면… 부모들은 전부 같은 바람이에요."

문 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주 주일학교 전도사가 주는 건빵을 먹기 위해 교회에 간 게 계기였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신앙에 불이 붙었다. "하나님을 뜨겁게 경험했어요. 학생회장도 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죠. 지금도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해요"고 말했다.

젊을 때 일이 바빠 한동안 교회에 안 나간 적도 있지만, 그는 교회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청소, 설거지, 차량 운전 등 안 해 본 게 없다. 문 씨는 10년 동안 성가대 지휘, 찬양 인도를 맡았다. 부부가 똑같았다. 아내 안명미 씨는 10년 동안 여전도회 회장이었다. 지금까지 꼬박 새벽 예배에 나가고 있다.

세월호 가족들 중에는 참사 이후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거나 옮긴 이가 많다. 하지만 문 씨는 지금도 참사 이전에 다녔던 교회에 계속 출석하고 있다.

"안산에 있는 한 대형 교회에 나가고 있어요. 힘든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교인들에게 보상금 얼마 받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최근에는 416안전공원을 놓고 갈등을 겪었고요. 교인들이 잘못 알고 있더라고요. 여러 번 해명해야 했어요. 그래도 같은 교회 교인이니까 어느 정도 대화가 돼요.

교회를 계속 다니는 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싶지 않아서예요. 이해가 될지 모르겠어요. 교회 자체를 버리고 싶은 생각은 많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저버릴 수는 없더라고요.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는데, 제가 먼저 하나님을 놓을 수 없잖아요.

답답하고 힘들 때면 416TV 사무실에서 문 잠그고 기도해요. 보통 밤늦게 영상 작업할 때 그래요. 가슴 아프고 눈물 나는 장면이 많은데, 그걸 계속 보고 편집해야 하니까. 거의 내내 울면서 작업해요. 그러면 마음도 답답해지고 기가 막히니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대화하듯 기도하는 거죠.

'하나님, 나예요… 내가 밉죠? 나도 아버지 싫어요… 정말 창조주 맞아요?'"

인터뷰 내내 담담했던 문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이 빨갛게 젖었다. 침묵이 잠깐 흐르고 문 씨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하나님은 내 아버지니깐. 저도 자식 못 이기거든요. 자식이 제게 대들어도 여전히 사랑스러워요. 그러니깐 저도 하나님 앞에서 막 대드는 거예요. 제 아버지니까. 당신께서 손수 빚은 자녀니깐. 저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거예요."

문 씨는 매일 딸의 학생증을 패용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세월호 참사 당시 문종택 씨는 친형과 사위와 함께 팽목항을 찾았다. 그리고 5일 만에 문 씨는 혼자 안산으로 올라왔다. 겨울옷을 챙기기 위해서다. 그는 딸이 살아 있을 확률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습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진도에서 올라온 문 씨는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교회를 먼저 찾았다. 기도가 하고 싶었다. 어떤 기도를 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딸이 살아 있을 확률이 없다는 생각에 올라왔지만 막상 기도하니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니까,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했던 기도가 떠올랐어요. '아바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 주님의 아픔이 저보다 크겠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알 거 같았어요.

'주님, 주님의 아픈 그 모습이 지금 제 모습입니다. 지금 제가 아픕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상황을 제게서 지나가게 해 주세요.'"

기도를 마친 문 씨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지성이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지성이가 살아 있기를 바라지만 아무래도 힘들 거 같구나. 아빠가 너희에게 약속하마. 지성이를 꼭 찾아오겠다고. 하지만 언제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성이를 찾을 때까지는 집에 안 올 생각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엄마를 잘 모시고 집을 잘 지켜 줬으면 한다."

지성이는 2014년 5월 1일 바다에서 발견됐다.

선체에서 발견된 문지성 양의 지갑. 뉴스앤조이 박요셉

세월호 진상 규명
더 긴 싸움 될 거 같아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제2기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참사 진상을 밝히겠다고 말해 왔다. 문종택 씨는 "가족들이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진상 규명이나 적폐 청산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5·18광주민주화운동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긴 싸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이에요. 세월호 참사로 한국 사회 안에 여러 적폐가 드러났잖아요. 언론, 검찰, 해경 등 세월호를 관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도 개혁되어야 해요.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바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세월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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