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법무부는 2016년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은 외국인 노동자, 결혼 이주민, 외국인 유학생 등 증가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30년에는 국내 외국인 수가 500만에 도달한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한국교회는 국내에 모여드는 이주민에 주목했다. 이들이 모여 사는 도시 근교, 공단 등을 찾아가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다. 노동문제·인권침해 등으로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상담하고, 임금을 적게 받거나 밀린 돈을 대신 받아 주며, 추방 위기에 처한 이들을 도왔다. 몇몇 이주민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신교로 개종했다. 신학을 배워 목사가 된 이도 있다.

국제이주자선교포럼(유종만 이사장)은 5월 29일 제10회 이주민 선교 포럼을 열어, 이주민 사역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해마다 열리는 포럼이지만, 이번 포럼에는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가 목회자가 된 이주민 교회 목사들이다.

수베디 여거라즈 목사(이주민선교교회), 바야르마 목사(몽골제자교회), 김명철 목사(중화이레교회)는 각각 네팔, 몽골, 중국에서 왔다. 이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동포들이 다시 겪게 되는 것을 막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이주민 교회를 세웠다.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세 목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주민 사역, 
노동자 현실 이해 필요

수베디 여거라즈 목사는 1996년 6월,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산업 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작은 비닐 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국 경제를 강타한 외환 위기로 공장이 문을 닫자, 수베디는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교회에서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힌두교였던 수베디는 교회가 보여 준 사랑에 감동해 개신교인이 되었다.

수베디는 목회자를 꿈꿨다. 대전에 있는 한 대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배웠다. 처음에는 네팔로 돌아가 가족·친구들을 전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을 직접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이들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주 노동자가 많다고 알려진 경남 김해로 내려가 이주민선교교회를 세웠다.

네팔에서 온 수베디 여거라즈. 뉴스앤조이 박요셉

매주 일요일이 되면 네팔인 40여 명이 교회를 찾는다. 이 중 절반은 기독교인이고 절반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쉬는 날이 되면 같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교회는 이들이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공간을 개방하고, 의료·통역·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수베디는 말했다.

"이주민 사역은 모든 이주민을 한 장소에 모아 놓고 말씀을 전하는 게 다가 아니다. 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에서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을까', '여기 앉아도 될까', '이거 만져도 될까' 하고 눈치를 보거나 불편을 느끼게 하면 안 된다. 교회를 집이나 고향처럼 느낄 수 있도록 편안하게 자유롭게 해 줘야 한다."

수베디는 평일, 공장에 나가 일을 한다. 생활비를 벌 목적도 있지만, 공장 일은 교회를 방문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는 "많은 교회가 이주민 선교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교회 안에 외국인 선교부, 상담소, 한글학교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이주민들의 생활, 노동환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주민들의 현실과 배경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주 여성인들의 수다방 된 교회

바야르마 목사(여)는 한국에 오기 전까지 예수가 누군지 알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도 수베디처럼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공장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으면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경남 마산에 있는 한 시골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잘해 주는 기독교인들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바야르마는 이후 서울에 있는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공장에 찾아온 한 전도사의 소개로 서울 역삼동에 있는 대형 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에는 몽골인 예배가 있었다. 그는 교회에 꾸준히 나가고 성경 공부를 하며 신앙을 키워 나갔다. 사역자가 되겠다는 마음도 품었다. 2002년, 신학을 배우기 위해 몽골에 돌아갔다.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다. 돈 벌러 한국에 가더니 이상한 종교에 빠져 돌아왔다며 바야르마를 나무랐다. 입학원서를 내는 당일 아침까지도 신학을 배울지 다른 일을 할지 바야르마는 고민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며 기도해 준 동역자들에게 힘을 얻어 신학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바야르마는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서 외국인 선교부 사역자가 되었다. 거기서 그는 몽골인 교회 개척을 준비했다. 2008년, 서울 면목동 작은 사무실을 임대해 몽골제자교회를 개척했다.

몽골에서 온 바야르마 목사(사진 왼쪽)가 강의를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교제하고 활동할 수 있는 별도 공간은 이주 노동자에게 큰 안정감을 준다. 바야르마는 "모든 이주 노동자가 똑같다. 같은 나라에서 온 동료들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어울려 얘기하고 모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들에게 쉼터 역할을 한다. 밤 늦게까지 수다 떨다 헤어져도 되고, 당장 지낼 곳이 없으면 잠시 머물러도 된다"고 말했다.

바야르마는 평일에는 몽골 이주 여성 모임을 연다. 몽골 여성들 중에는 결혼 실패로 상처입은 이들이 많았다. 바야르마 역시 한국에서 예수를 믿기 전 비슷한 아픔이 있었다. 그는 "몽골 이주 여성들에게는 어려운 마음을 들어 줄 여사역자가 필역하다. 하나님은 내게 그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모임에는 비기독교인도 찾아온다. 단순히 수다를 떠는 것 같지만 속에 있는 얘기를 꺼내며 이들이 치유를 얻는다"고 말했다.

보이차 함께 마시며 상담 
힘든 타국 생활 극복

김명철 목사는 10년 넘게 미등록 외국인(불법체류자)으로 살았다.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골목으로만 다녔다. 서울 동대문구 뒷골목은 지금도 눈을 감고 다닐 수 있을 정도다. 중국 하얼빈 출신인 그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녔다.

막상 신학을 배웠지만, 그에게는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학업을 계속할지 고민하던 중 중국에 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 목사는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중국인 선교 사역자가 되어 서울 여러 교회를 전전했다.

김 목사는 말을 재밌게 하는 능력이 있다. 교인들은 그의 설교를 좋아했고, 동료 목사들도 그를 인정했다. 가는 곳마다 중국인 예배가 부흥하고, 교회가 성장했다. 하지만 김 목사는 기쁘지 않았다. 소명 없이 사역을 계속해야 할지 회의감에 젖을 때가 늘어 갔다.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한 채 중국과 한국을 여러 차례 오가던 김 목사. 그는 사역을 모두 접고 2013년 경북 경주로 내려왔다. 조선소에서 용접 일을 시작했다. 경주 지역에는 중국인 1만여 명이 산다. 일을 하면서 김 목사 눈에 이들이 들어왔다. 고향을 떠난 이들은 공장에서,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살고 있었다. 이들을 위해 목회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중국에서 온 김명철 목사는 경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김 목사는 중화이레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가정 예배를 하며 시작했는데, 사람이 늘어나면서 사무실을 빌려 모임을 하고 있다. 평균 30여 명이 예배에 참석한다. 김 목사 역시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 교인들의 헌금은 교회 운영비와 행사비로만 사용하고 있다.

김 목사는 최근 대만 홍차, 밀크티, 중국 보이차, 아이스크림 등을 판매하는 찻집을 개업했다. 경주 지역에서 유일한 중국식 찻집이라 중국인 노동자와 유학생에게 인기가 좋다. 김 목사는 사람들에게 차를 따라 주며 상담을 한다고 했다.

"이주민 노동자들 저마다 상황이 다르다. 다들 자존심도 세고 독립심도 강해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잘 나오지 않는다. 찻집은 이들이 편하게 와서 대화를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다. 웬만하면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 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그냥 그대로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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