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많이들 그런다.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것이라고. 일에 몰두해 잊어 보라고. 고마운 위로의 말이긴 하지만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자식 대신 나를 가게 해 달라고 울부짖어 보지 않은 사람, 자식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아픔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첫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지명한 김동연 후보자가 세월호 참사 직후 언론에 쓴 칼럼입니다. 김 후보자는 백혈병에 걸린 아들(28)을 2013년 떠나보냈습니다.

김지민 씨(가명·51)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해 7월, 막내아들 이준후 씨(가명·21)를 잃었습니다. 군에 입대한 지 3개월도 안 됐을 때입니다. 누구보다 밝고 착했던 아들은 자대 배치 이후 말을 잃었고, 원인 모를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자해·타해할 위험이 크다는 군병원 소견에도, 소속 지휘관들은 제대로 된 조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씨는 부대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3년이 되어 가는 지금도 엄마 김 씨는 "매일매일 지옥을 산다"며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눈만 뜨면 아들과 함께했던 추억이 필름 돌아가듯 떠오릅니다. 왜 그때 아들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자책하고 스스로를 비난합니다.

최근 10년간 신앙생활을 했지만, 아들이 죽은 후 김 씨는 어떤 위로나 평안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경기도 한 지역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그를 5월 22일 만났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감히 헤아리기 어려웠습니다. - 기자 주

3년 전 아들을 떠나보낸 엄마는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김지민 씨는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그에게는 작은 꿈이 있었다. 자식을 낳으면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들을 해 주고 싶었다. 1990년 첫째아들을, 3년 뒤 막내아들을 낳았다. 가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았다. 입고 먹고 배우는 모든 과정에 드는 비용을 아낌없이 내어 줬다. 병치레 없이 자란 두 아들은 김 씨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자 보물이었다.

시원시원하고 제 할 말 다하는 첫째에 비해 막내는 유순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다. 김 씨는 첫째가 외박을 해도, 막내는 못 하게 했다. 그런 막내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엄마 말을 잘 따랐다. 막내의 꿈은 '피아노 조율사'였다. 음대에 진학한 뒤 용돈은 자신이 벌어 쓸 정도로 부지런했다. 경기도 한 지역에 있는 대형 음료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하루는 막내 이 씨가 엄마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여기는 밥도 주고, 차로 출·퇴근시켜 주고, 체력도 기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이 씨와 함께 일한 동료들은 "준후가 일을 잘해서 군대에 가면 사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아들, 군 입대 후 우울증
유서·통화 없이 목숨 끊어
"힘없는 부모 만나서…"

막내아들의 군대 주특기는 보병 소총수였다.

세월호 참사로 나라가 침체된 2014년 5월경. 막내는 활짝 웃으며 논산훈련소에 입대했다. 기본 훈련을 마치고, 백골부대로 불리는 강원도 철원 3사단에 배치됐다. 주특기는 보병 소총수였다. 주말이 되면 김 씨 부부는 막내 얼굴을 보기 위해 3시간 반을 달려 철원으로 향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갈비, 김, 계란 등도 준비해 갔다.

면회할 때 본 이 씨 표정은 입대할 때와 달리 어두웠다. 밝고 쾌활했던 모습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갈비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몸은 경직돼 있었고, 이따금씩 손톱을 물어뜯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 있냐고 묻자 "가슴이 답답하다", "선임들이 마음을 잘 몰라주는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면회를 갈 때마다 이 씨는 같은 증상을 보였다.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김 씨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중대장에게 민간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겠다며 청원 휴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적응 기간이니 곧 괜찮아질 것"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행정보급관에게도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 씨는 일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엄마에게 늘 전화를 걸었다. 종교 행사(그는 교회에 출석했다)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 왔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한 그날 전화는 없었다. 김 씨가 직접 부대에 전화를 걸어 바꿔 달라고 했다. 저녁 8시경이었다. 부대에 있을 시간인데, 통화가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 시간 뒤 중대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준후가 화장실에서 쓰러졌습니다. 지금 일동국군병원으로 이동 중입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왔다. 맥박이 뛰지 않아서, 급히 헬기로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이동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번 멈춘 막내의 심장은 두 번 다시 뛰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부대 간부들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머리를 숙였다. 대대장은 "차라리 군종을 시켰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했다. 연대는 지휘 책임을 물어, 소대장·중대장·행정보급관에게 '경고' 처분을 내렸다. 김 씨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관리 책임자들은 경고를 받고 끝났기 때문이다.

아들은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자식을 떠나보낸 김 씨는 힘없는 부모를 만난 자식만 불쌍하다고 말했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던 김 씨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세상에 어떻게 우리 아들한테 이럴 수가 있는 겨. 죽고 싶은 마음뿐이야. 힘 가진 부모 만났다면 그런 일 당했을까. 생활기록부에 막내가 부모 직업을 '대리운전'이라고 적었어. 대리는 잠깐 한 건데. 간부들이 그래서 내 말 무시한 게 아닐까 싶어. 눈치도 못 채고 (아들을) 먼 길로 보내 버린 거야.

영리하지 못해도 마음씨 착한 우리 아들. 내가 왜 나쁜 짓 못하게 하고, 폭력물도 못 보게 했을까 후회돼.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힘을 키웠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야. 나 바보짓한 것 같아. 심성이 착한 아이를 바르게만 자라게 했던 거야. (아들이) 거칠게 대응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야."

김지민 씨가 아들 사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김 씨는 핸드폰에 저장된 막내 사진을 한동안 들여다보면서 어루만졌다. 액정 속 이 씨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얼굴 봐 봐. 너무 해맑아. 학교 다닐 때도 선배들한테 엄청 사랑받았어. 예쁜 짓하니까. 마음도 예쁘고. 책임감도 강하고. 그런데 쓰레기 집단 보내고 나서, 우리 아들…"

이 씨는 생을 마감하기 전 국군병원을 오갔다. 나중에 병원으로부터 의무기록지를 넘겨받은 김 씨는 또다시 오열했다. "급성우울증 위험 단계로 자해·타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사 진단이 적혀 있었다. 사고 전, 중대장·행정보급관과 수차례 통화했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김 씨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힘 있는 부모였으면 바로 알려 줬겠지. 근데 감쪽같이 숨겼잖아. 청원 휴가도 안 받아 주고. 힘없는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한 내 잘못이지."

막내가 떠난 뒤로 김 씨 부부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바쁘게 살면 나아지지 않겠냐"는 남편 제안에 따라 식당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전보다 바빠졌지만, 아들을 잃은 마음은 회복되지 않았다. 아들 기일이 다가올 때면 무기력증에 걸린다.

"육신만 숨 쉬고, 영혼은 없는 거야. 난 그날 죽었어. 아들 없으면 못 살아. 부모만 잘 만났어도 안 갔지. 손톱 물어뜯으면서 '엄마 나 아무것도 하기 싫어'라고 한 아들한테 왜 참고 적응하라고 했을까. 너무 한스러워… 나도 내공 탄탄한 사람이야.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는데, 아들 보내고 나니까 죄책감에 못 살겠어. 아무것도 못하겠어."

신앙생활 10년
아들 마음 못 잡아 준 하나님 원망

김 씨는 최근 10년간 교회에 출석했다. 나가기 싫어하는 남편도 꾸역꾸역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막내 일을 겪은 뒤 발길을 끊었다. 그 시기를 전후로 교회에서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봤다. 교회가 건축에만 매달리고, 담임목사가 이웃 종교 지도자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등을 돌렸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도 있었다.

"(막내가) 교회에서 반주까지 했는데, 왜 하나님은 (목숨을 끊으려는) 마음을 못 잡아 줬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이 무너졌어. 아, 신은 없다, 신은 없다고 생각했지. 교회 여기저기 다녀 봤는데, 말씀대로 사는 이도 못 봤어. 하나님 말씀이 진리면 그렇게 살면 안 되지. 평신도보다 못한 목사를 보면서 불신이 생겼어.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지었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 눈뜨면 저절로 막내 얼굴이 떠올라. 우울해하던 그 모습까지도. 그때 내가 왜 심각한지 못 알아봤을까. 사람이 살 수가 없어. 간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 떠올라. 이런 지옥이 어딨나…."

이 씨는 사망 3개월 뒤 순직 처리됐다. 매달 가족 앞으로 소정의 보상금이 나온다. 김 씨는 "돈은 필요 없으니, 아들 죽음을 방관한 자들을 제대로 처벌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군대 내 사망 유형 중 '자살' 수치가 가장 높다. 지난해 9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 5년간 군대 내 자살자는 311명으로 전체 476명 중 65.3%를 차지했다. 가정불화, 부적응, 구타 및 가혹 행위 등이 자살 요인으로 꼽힌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병들의 엄마들이 뭐라도 해 보자는 심정으로 뭉쳤다.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한 치유 연극 '이등병의 엄마'가 서울 대학로 '예술공간 오르다'에서 열리고 있다. 유족 9명이 직접 연기에 참여한다.

연극은 5월 28일까지 진행한다. 시간은 월~금 저녁 7시 30분, 토요일 15시, 19시, 수·일요일 15시이며, 예스24나 인터파크에서 표를 구매할 수 있다.

'이등병의 엄마'는 '군(軍)사망사고유족과함께하는사람들'이 주관한다. 인권운동가 고상만 씨가 작품을 쓰고 제작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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