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약 10일간 CBS 방송국 종교개혁 3부작 다큐멘터리 '다시 쓰는 루터로드' 제작 때문에 독일에 있는 종교개혁 관련 주요 도시를 탐방한 일이 있었다. 다큐멘터리는 올해 10월 방송 예정인데,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했던 다니엘 린데만, 한국기독청년연합회 남기평 총무, 싱어송라이터 제이미스톤즈, 그리고 목사인 나, 이렇게 넷이 등장한다. 단순한 여행 프로그램은 아니다. 중요한 종교개혁지를 찾아 그곳의 역사와 신학을 설명하고, 한국교회 상황과 오버랩하며 비판적으로 숙고하고, 네 사람의 여정을 통해 여행의 묘미를 가미했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내 느낌에 아마 'BBC 다큐멘터리 + 꽃보다 청춘'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이전에 내가 직접 가 본 도시라고는 비텐베르크 정도밖에 없고, 나머지 도시들은 모두 책으로 봤다. 따라서 나는 한국에서 종교개혁 역사와 신학을 가르치면서 내내 2%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출장을 준비하면서 머릿속에 있는 도시를 눈으로 확인하고 이전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자료를 사진으로 담아 오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예상했던 대로 이번 탐방으로 머릿속에 질서 없이 흩어져 있던 퍼즐이 가지런히 정리되는 감동과 기쁨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림과 조각의 크기, 거리·조명·분위기 등은 실제 그 장소에 가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다. 이것들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동료들과 이래저래 소소한 깨달음을 나눈 좋은 기회였다.

여담이긴 하지만 영상으로 나오는 장면 외에 총 12명의 스텝과 함께 먹고 자고 움직이면서 나눈 보석같은 이야기가 많다. 그중 몇 사람은 종교개혁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어지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기에 이번 여정이 '개신교 신학 힐링 캠프'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거의 인솔자 역할로 갔지만, 실은 거의 모두 책으로 봤던 터라 어느 장소로 이동하든지 구술시험을 보듯 조마조마했다. 지금은 다 끝났으니 속이 시원하나 돌아보면 몸으로 배우고 새롭게 새긴 개신교 신학이 상당했다.

여러 장소 가운데 예상치 못한 감동을 맛본 도시가 토르가우(Torgau)다.

종교개혁을 논할 때마다 등장하는 도시는 비텐베르크지만, 이번에는 토르가우 교회를 다루어 보려 한다. 비텐베르크가 '종교개혁의 어머니'(Mutter der Reformation)라고 불린다면, 토르가우는 '종교개혁의 유모'(Amme der Reformation)라고 불린다. 두 도시는 여러모로 닮았다. 비슷한 크기뿐 아니라 도시 안에 이름이 같은 두 교회가 있다. '마리아교회'라고도 불리는 시(市) 교회와 성 안에 있는 성채교회(Schloßkirche)가 그것이다. 종교개혁 신학의 산파 역할을 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루터파 신앙고백 문서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1530년)인데, 이 문서의 기초가 토르가우에서 만들어졌다. 루터, 멜란히톤, 부겐하겐, 요나스가 함께 모여 작성한 것이 토르가우 신조(1530년 3월)였다.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가 임종(1552년 12월 20일)했다는 이유로도 이 도시는 중요하게 다뤄진다.1) 토르가우는 이외에도 비텐베르크와 비견할 만한 요소가 많지만, 무엇보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당이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단순히 최초의 교회이기 때문에 유명한 것은 아니다. 이 교회당 설계 초기부터 루터가 직접 관여했고, 그 때문에 이 교회당 위치·구조·장식물에는 종교개혁 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교회당이 1544년 10월 5일 봉헌될 당시 루터가 직접 설교했는데, 이때 했던 설교가 개신교 예배론 가장 중요한 골자가 됐다.

비텐베르크 시 교회 종교개혁 제단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예술 작품은 장식용이 아니었다. 신학이 담긴 신앙고백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토르가우 성채교회 역시 동일하다. 토르가우 성의 정식 명칭은 하르텐펠스(Hartenfels)성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견고한 성'이 된다. 어쩌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구절에 등장하는 그런 성일 가능성도 있다.

CBS 드론 촬영. 사진 출처 CBS

성 입구로 들어갈 때면 특이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성 주위 깊게 판 해자에서 불곰 세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동물원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실은 영주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설치한 것으로 꽤 오랜 역사가 있다고 한다. 어쨌거나 최초의 개신교회를 확인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입구 안쪽으로 들어서면 먼저 성벽에 둘러싸인 너른 광장을 만나게 된다.

 

토르가우 하르텐펠스성 정원. 파노라마 촬영(클릭하면 확대)

그런데 교회당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보통 교회라고 하면 높은 첨탑이 연상된다. 또는 십자가가 보여야 하고, 최소한 교회 단독 건물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입구에서 보면, 여러 개의 문이 보인다. 어떤 문은 화장실, 어떤 문은 도서관, 어떤 문은 성 본관 등 특정한 장소로 통하는 여러 문이 거의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떤 문이 교회당으로 통하는지 알아채기 힘들다. 교회 찾는 일이 '월리 찾기' 같다.

잘 살펴보면 교회 입구에는 다른 문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문 옆에 아치형 대리석 부조와 그 위에 조그마한 사각형 부조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개신교 최초의 교회인 토르가우 성채교회로 통하는 문이다.

여기 새겨진 아치형 부조들을 보라. 잘 살펴보면 십자가, 신포도주로 적신 해면, 가시면류관, 못 세 개, 돈주머니, 채찍, 횃불, 닭 등이 새겨져 있다. 모두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단출한 형태의 내부가 보인다. 이 단출함이 기존 교회와 달리, 개신교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있다.

여기서 생각할 거리 하나가 있다.

왜 하필 최초의 개신교회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게 공공건물 속에 숨겨 놓았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기가 막힌 이유가 있다. 이 교회당을 지을 때 루터가 직접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루터가 성서에서 발견한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 모일 장소로서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고 루터는 말한다. 말씀과 성례전,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함께 나누기 위해 필요한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신자들 모임은 세상과 구별된 곳에 안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교회라고 가르친다. 그 때문에 이 토르가우 교회는 별다른 외형적 특징 없이 공공건물 안에 의도적으로 숨어 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것이다. 특별히 멋진 장식이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한없이 '거룩한 것'으로 치장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어울려 사는 게 신자의 공동체이고 교회다.

이런 생각은 당시 중세 교회에 비교하면 혁명적이었다. 이전에는 교회라고 하면 특별한 건물을 말했다. 구별된 장식, 구별된 공간 속에서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믿음의 일상이 거룩하다'라는 것이다. 일상 속 거룩함을 가르친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과 구별되는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교회 입구에 있던 십자가 수난의 조각을 떠 올려 보면 쉽게 의미를 건질 수 있다. 교회 공동체가 되는 삶이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는 삶과 같다는 뜻이다. 루터 말대로 하자면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과해 들어갈 때 비로소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생명의 신비를 함께 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다.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평생 교회 안에서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감격을 안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그 나온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다. 그 속에서 모든 신자는 각자 이웃을 위한 제사장으로,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로 살아야 할 책임을 갖게 된다. 이것이 '만인사제직'이자 '직업소명론'의 골자이며, 최근 한국에서 주목받는 디아코니아 사역의 근거다.

독일로 종교개혁지 탐방을 하는 분들 가운데 개신교회라고 해서 들어갔다가 의아해하는 분이 많다. 가톨릭교회당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 가운데 한 가지 꼽을 수 있는 것은 '아디아포라'(adiapora) 신학이다. 무엇이든 신앙에 도움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고, 언제든 수정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다. 이것을 약간 비틀어 말하면, 개신교회라고 해서 '옛것을 무조건 때려 부수지 않는다'라는 말이 된다. 이전부터 교회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루터에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항상 문제였기 때문에 옛 건물은 그 모습 그대로 모임 장소로 사용해도 무방했다.

그럼에도 루터는 개혁적 정신이 녹아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당이 있기를 소망했다. 앞서 교회당 입구에 대해 짧게 설명했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더욱 강렬한 개신교 색채를 느낄 수 있다.

내부로 들어가 이전 중세 교회 외형과 구별되는 특징을 몇 가지 추려 보자. 우선 교회 장식이 매우 단출해졌다. 성화나 조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부에서는 설교단과 성찬대가 가장 눈에 들어온다. 오르간이 앞쪽에 있다. 그리고 교회 내에 묘지가 없다. 참고로 16세기 토르가우 교회 내부와 달라진 게 하나 있다. 지금은 의자가 비치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의자가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모여 설교대 앞에서 설교를 듣고, 곧이어 성찬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성찬을 나누었다. 루터파 교회관이 '말씀과 성례전이 있는 신자의 모임'(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7항)이기 떄문에 본질에 집중하기 위한 구조로 돼 있다. 게다가 루터의 <대·소교리문답> 십계명 제1항에서 강조하듯 '형상 금지' 조항에 대한 생각도 이곳을 단출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핵심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통상 오래된 교회 건물은 제대 방향을 동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해가 뜨는 동쪽을 빛이신 그리스도의 방향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의 경우, 성채교회와 시 교회 모두 이 원리를 따라 지었다. 우리로 따지면 일종의 풍수지리라고 할 수 있다. 토르가우 교회당은 이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 성찬대 방향은 방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교회당의 기능에만 집중하고 있다.

파이프오르간이 제단 전면에 있다는 사실 역시 특이하다.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오르간을 뒤편에 설치하든지, 아니면 앞쪽에 위치할 경우 가능하면 보이지 않도록 제단화로 가려 놓는다. 그러나 토르가우 교회는 이런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린다. 음악에 대한 루터의 이해 때문이다. 개혁자 츠빙글리와 칼뱅이 음악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루터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지했다. 청아한 테너톤 목소리를 가졌기에 아이제나흐 학창 시절 게오르그교회에서 합창단을 했다. 류트라고 불리던 기타 비슷한 악기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도 있다. 후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루터의 학창 도시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루터처럼 어린이합창단에 참가해 게오르그교회(Georgenkirche)가 더 유명해졌다. 확실한 사실은 루터가 아니었다면 개신교 교회 음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음악과 관련한 루터의 명언이다.

"나는 음악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열광주의자들의 빌어먹을 그런 음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음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릴 기쁘게 만듭니다. 셋째로 그 음악이 악마를 사냥합니다. 넷째로 음악은 순전한 평안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분노, 욕망, 교만이 사라집니다. 다윗과 예언자들 모두 시와 노래를 즐겼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학 다음 자리를 음악에게 기꺼이 내어 줍니다. 다섯째로 음악은 평화의 시간을 통치합니다."2)

루터에게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악마를 사냥하는 도구이다. 그러니 이런 신성한 도구를 교회 건물 속에 숨겨 놓지 않고 전면에 배치한 것은 당연하다.

다음 이야깃거리는 파이프오르간 밑에 있는 성찬대다. 가톨릭교회 제대와 비교했을 때 아주 작고 보잘것없다. 폼이 나거나 큰 것도 아니고, 장식도 화려하지 않다. 성찬대 주변은 개방형으로 되어 있다. 누구나 주위를 둘러 지나갈 수 있게 했다. 원래 이곳에 의자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설교가 끝난 다음 회중들은 어떤 형식도 없이 자연스럽게 성찬대 주변에 모여 떡과 잔을 나누었을 것이다. 루터는 신학적으로 바로 이 지점을 중요하게 여겼다. '보이는 말씀인 떡과 잔을 자연스럽게 나눔'이다. 어떤 규율이나 형식의 매임 없이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배 의식이 있는 전례 교회를 일반 개신교 신자가 꺼리는 이유 하나는 '예배가 딱딱하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예배 의식의 의미와 본질을 잃어버리고, 그저 '옛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형식화했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딱딱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예배 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전례 예배는 교회의 신학을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그릇이 된다. '형식이 있으나 자유로운 것', 그건 좋은 전례 예배를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 맛볼 수 있는 예배의 신비다.

다시 돌아가자. 성찬대 주위를 돌아보면 기존 중세 교회와 다른 것 하나를 또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무덤이 없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유럽의 '장묘 문화' 한 대목을 이야기하자. 유럽에 가면 낯선 것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장묘 문화다. 우리는 공동묘지라고 하면, 마을에서 떨어진 음습한 산속을 떠올린다. 구미호가 나올 것 같은 곳을 떠올리지만, 유럽은 시내 한가운데 공동묘지가 자리 잡고 있다. 오래된 교회는 여지없이 교회 내부에 묘가 그득하다. 아니면 교회 마당이 공동묘지인 경우도 다반사다.

왜 이렇게 했을까. 누차 강조했지만, 중세는 완벽에 가까운 종교 세계였다. 인간의 죽음과 삶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안방에서 건너 방 가듯'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다만 그 중간 역할을 교회가 했다는 점에서 현대와 차별된다. 유럽 사회도 고대에는 시신을 주거지에서 먼 곳에 매장하는 강제적 법령이 있었지만, 중세로 넘어오면서 이 경향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아마도 이는 성자숭배 사상, 연옥 교리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

시신을 거룩한 자(성자)들이 묻힌 곳에 함께 묻으면 그의 공로에 힘입어 내세에서도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이런 사상 기원이 아프리카 원시 부족 문화에 있다고 보는 종교학자가 많다). 이것이 발전하여 사람들은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신을 묻기 시작했다. 결국 교회 앞마당에 공동묘지를 만들거나 교회 내부에 묘지를 만들게 되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 교회당 내에 시신을 안장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중세 시대 교회는, 이를 통해 교회 운영 재정의 가장 큰 부분을 유지했다. 구석 미사, 또는 위령미사(Winkelmesse)라고 불린다. 죽은 가족의 묘를 교회에 안치하고 돈을 내면, 사제가 매일 정해진 시간만큼 가족을 대신해 중보 기도와 미사를 드렸다. 당연히 헌금 크기와 기도의 양은 비례했다. 심지어 그 기도의 양만큼 연옥의 벌이 경감될 수 있다고 믿었다. 루터는 이런 미사 행태를 미신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회에서 필히 제거되어야 할 구습으로 꼽았다. 그러니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토르가우 성채교회에 무덤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3)

이제 이 교회에서 가장 빛나는 구석인 설교대로 눈을 돌려 보자. 설교대가 교회당 중앙에 위치한 까닭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간혹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니 이렇게 중앙에 설교대를 놓았다는 설명도 있지만, 알고 보면 정중앙은 아닐지라도 이런 식으로 가운데 배치한 교회는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에는 마이크가 없었으니 설교가 가장 잘 들리는 위치를 찾은 것뿐이다.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제 언급할 설교대는 보통 특별한 게 아니다. 위치 때문이 아니라 여기 새겨진 세 편의 부조 때문이다. 종교개혁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지, 개신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그 거대한 신학적 설명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세 편의 부조는 모두 복음서에 나오는 사건을 담고 있다.

가장 왼편에는 예수가 간음한 여인과 둘러선 사람들 사이에서 땅바닥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사건이다. 이 부조는 '교회는 용서하는 곳'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루터의 신학에서 이는 아주 분명하다. '교회는 죄인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용서하는 곳이다.' 이 사상은 루터의 <대교리문답>(1529년) 가운데 '사도신조' 해설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직무는 이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양심은 죄 용서의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통해 매 순간 위로받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중략)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 둘째는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짐을 함께 지며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죄 용서가 없는 곳이면 어디나 '교회 밖'입니다. 기쁜 소식(복음)이 없는 교회 공동체에는 죄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는 진정한 거룩함도 없기 마련입니다. (중략) 이것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여기서 '비그리스도인'이란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으로 여기지 않고 그저 심판자로만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심판자 하나님을 이용해 이웃을 심판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 밖 사람', 비그리스도인입니다. 분명히 교회 밖의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4)

이 내용을 요약하면 '용서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이는 면죄부를 팔면서 없는 죄까지도 만들어 돈벌이하던 중세 말기 교회에 대한 반테제로 이해할 수 있다. 루터에게 교회의 직무는 복음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온전하게 집행되고, 용서가 실천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루터식으로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설령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도 이웃을 가르고 심판하는 자는 '교회 밖 사람'(비그리스도인)이다. '교회 밖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Salus extra ecclesiam non est)은 보통 종교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되고는 한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망각한 내부 비판용으로 사용된다.

중앙에는 열두 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종교 선생들을 가르치던 사건을 새겨 놓았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이 장면에서 예수는 가장 중앙 상석에 자리 잡고 있다. 에수는 손에 성경을 들고, 밑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을 가르친다. 이를 통해서는 '교회에서는 말씀이 가장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에는 요한복음 2장 13-17절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우측 부조는 누구를 위한 조각인가 하는 점이다. 500년 전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아무리 개신교 최초의 교회당이라고는 하지만 중세 신분제 질서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를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지원했고, 다른 제후들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교회에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있었다. 1층에는 평민이, 2층 뒷좌석에는 영주와 귀족이 앉았다.

지금도 이 교회에 가 보면 2층 뒤편 벽면에 영주들 깃발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좌석에 앉아서 설교대를 보면 세 가지 부조 중 오직 하나만 보인다. 그게 바로 예수가 채찍을 들고 성전의 환전상을 뒤엎어 버리는 장면이다. 사실 이건 의도적이다. 교회 내에서 돈 많이 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목에 힘주지 말라는 '경고'다. 우측 면에 있는 부조는, 교회란 영주나 귀족의 돈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움직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세 부조를 모두 종합해 보자. 중앙의 열두 살 예수의 모습을 통해 '오직 말씀만으로'(sola scriptura), 좌측 용서의 조각을 통해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우측의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종교개혁 원리를 보여 준다.

토르가우 성채교회를 둘러보면서 한국교회를 반추해 본다. 과연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은 개신교회인가.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담임목사

각주

1) 루터가 죽고(1546), 폰 보라는 줄곧 비텐베르크에 살았다. 그러나 1552년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불어닥쳤고, 자녀들과 함께 토르가우로 거처를 옮기다가 도시 근처에 나와서 마차 사고를 당한다. 그 때문에 골반뼈가 부러졌고, 폐렴까지 겹쳐 3주 후 사망하게 된다(1552년 12월 20일). 토르가우 시 교회에는 폰 보라 시신이 안장돼 있고(Stadtkirche St. Marien), 세계에서 유일한 폰보라기념관(Katharina-Luther-Stube)도 이 도시에 있다. 그렇다고 갈 만한 곳으로 추천하기는 어렵다. 2017년 4월 다큐멘터리 촬영 때 짬을 내서 가 봤는데 폰 보라의 사가였다던 이곳에는 유물이 거의 없었다. 크기도 몇 평 되지 않는 곳에 해설판만 몇 개 붙어 있었다. 유료가 아니라면 잠깐 들를 만한 곳이다.

2) WA 30, II, 696, 3-14.

3) 교회에 시신을 묻는 것은 실은 '시신을 교회에 맡겨 버린다'는 뜻이다. 하나님 품에만 맡기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일종의 굳건한 종교적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부자들 묘가 교회 안쪽에 있는 반면, 가난한 자들 시신은 교회 밖에 있다는 점이다. 중세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 주변에 큰 구덩이를 파고 무수히 많은 시체를 함께 매장했다. 그것이 다 차면 흙으로 덮어 묻고, 이전에 사용했던 구덩이를 도로 팠다. 그러면 그 구덩이에는 이전에 묻었던 시체가 모두 썩어 몇 조각 뼈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면 그걸 회수해 항아리에 함께 담아 교회 한쪽에 보관하고 그 구덩이에 다른 시체를 매장했다고 한다. 부모든 자식이든 누가 죽어도 산 자들의 책임은 오직 시신을 교회 옆에 묻는 것으로 끝난다. 시신을 교회에 맡겨 버리는 일로 끝났다. 산 자들은 죽은 자에게 무관심했다. 교회에 시신을 맡긴 이상, 그 시신의 심판과 부활은 교회가 책임질 것이었다. 공동묘지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공동묘지는 장사를 지내는 장소, 축제를 벌이고 춤을 추는 장소였다. 어떤 경우에는 시체가 땅 위로 드러나 냄새가 진동해도 별로 신 경 쓰지 않았다. 오죽하면 '묘지에서 춤추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효됐을까.

4) <마르틴 루터의 대교리문답>, 최주훈 역 (서울: 복있는사람), 22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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