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문민정부 이래 3개 정부에서 통일부총리, 교육부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원로 한완상 교수가 일생을 반추하는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후마니타스)를 펴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민청학련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6·29 선언, 냉전 시대 해체와 햇볕 정책, 그리고 2017년 촛불 시위까지 경험한 역사의 산증인이 쓴 회고록이다.

그가 얘기하듯, 과거의 일은 한낱 "꼰대 할아버지의 옛날 얘기"(11쪽)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한완상 교수는 역사를 되짚어 보며 반면교사 삼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과거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우리가 어떻게 뜻을 모으고 어떤 노력을 전개했는지, 어떤 실패와 좌절을 딛고 어떻게 작은 승리들을 일구어 냈는지 곰곰이 되짚어 봄으로써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부당한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더 정의롭고 더 평화적인 사회를 향한 실천들은 그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으리라 저는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147쪽)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 한완상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 336쪽 / 1만 7,000원. 뉴스앤조이 최승현

민족 비극 보며 키운
'사회 의사의 꿈'
내란 음모 휘말려 옥고
'군부 청산' 실패 아쉬워

한완상 교수는 초등학생 때 신사참배에 동원됐고, 가족이 식구처럼 여기던 소가 인민군에 빼앗기는 경험을 하고, 부정부패로 방위군 10만 명이 굶어 죽는 현상을 목도했다. 이때 느낀 감정들 때문인지 그는 어렸을 적 식민 통치와 분단, 독재를 겪으며 상처받은 한민족을 위해 '사회 의사(Social Doctor)'의 꿈을 꿨다고 했다.

1959년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1970년부터 모교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지식인'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정권의 탄압과 맞서게 됐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겪었다. 후에 정치인이 된 이철, 유인태 등이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권은 가장 큰 위협 세력이었던 대학생과 대학 교수들을 쫓아냈다. 1975년 1차 해직을 당했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주범으로 몰려 2차 해직을 당했다. 자신의 모친 빈소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내란을 획책했다는 이유였다. 1980년 5월 17일 남산에 끌려갔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다니엘이 갇힌 사자굴같은"(115쪽) 남산 지하 2층에서, 2주간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받았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내란을 음모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한완상 교수는 "고통은 시간을 끝없이 지루하게 연장시켰다. 고통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었다. 고통은 철저하게 '지금, 여기'의 아픈 현실이었다"(116쪽)라고 회상했다.

한완상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념을 높이 산다. 옥고를 함께 치뤘고, 미국 망명 생활도 함께했다.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일화도 책에 소개했다.

"1980년 7월 15일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공동 피고들이 일부는 육군 교도소로, 나머지 일부는 서대문 교도소로 각각 분리 이감되기 직전, 권정달과 이학봉 두 군부 실세가 DJ에게 와서 DJ의 생명을 담보로 타협을 제안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신군부와 손을 잡고 함께 일하는 제의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DJ는 무슨 조건으로 그런 제의를 하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두 사람은 신문 뭉치를 던져 주며 이것을 읽어 본 후 대답을 달라고 했답니다. 그 신문 뭉치에는 그때까지 DJ가 전혀 모르고 있던 광주 학살에 관한 보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 신군부가 편집·왜곡한 보도였지요. 그것을 자세히 읽고 난 뒤 DJ는 너무 놀랍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그들의 제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광주의 그 억울한 주검이 자기 탓으로 받아들여져 오히려 오열했다고요. DJ가 신군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도 민중의 억울한 고통에 동고하려는 그의 비장한 결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190쪽)

고난 끝에 1987년 봄을 맞은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힘을 합쳐 정권을 바꿔 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패했다.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그들의 관계 때문이었다. 한완상 교수는 이때 정권 교체를 이뤄 내지 못했던 것을 큰 아쉬움으로 삼는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두 명이 합리적으로 이어 집권하면 군사 권위주의와 군부 통치가 남긴 흔적을 청산할 것이라 믿었지만, 끝내 현실화되지 못했다.

문민정부 통일부총리를 맡으면서 냉전 종식의 여파를 한반도까지 끌고 오려고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와 노력했던 일이 무산된 것도, 국민의정부 교육부장관을 맡으며 학벌 타파를 위해 노력한 일이 무산된 것도 모두 한완상 교수에게는 아쉬움이다.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잔재를 아직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한완상 교수는, 정권 유지를 위해 언로를 막고 약자를 핍박하는 정치가들을 '친일 냉전 수구 지배 세력'이라고 칭한다. 양 김 대통령이 뜻을 같이하지 못하면서, 정권이 바뀌어도 '적폐 세력'은 남게 되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YS의 문하생들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YS의 정치적 아들로 자처하면서도 YS가 치열하게 반대했던 유신 체제 정책을 되살려 내는 데 앞장서고 있다"(307쪽)고 비판했다.

한완상 교수는 현대 정치사를 일기에 꼼꼼히 기록해 왔다. 누구와 언제 만났으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회고록에 상세히 담을 수 있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적폐'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회
"거대 교회 만들기 포기해야"

뉴욕 유니언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한 한완상 교수는 청산할 세력은 빨리 청산하고 사회 약자들,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샬롬'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리로만 생각한 게 아니다. 북한과 '적대적 공생 관계'를 맺으며 정권 연장만을 위해 살아온 정치가들과 맞서며 체득한 것이다. 특히 '청산 세력'과 '기독교'는 자유롭지 않은 관계였다고 했다. 그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 1970~1980년대부터 문익환, 강원룡, 서남동 등 진보 기독인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권력과 결탁한 기독교 모습을 생생하게 봐 왔다.

"세속적인 냉전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이 결합되면 그곳에 정치적 권위주의가 독버섯처럼 번지게 됩니다. 개신교 주류 세력은 냉전 근본주의 신앙으로 문민 독재와 군사독재를 정당화시키는 일에 줄곧 앞장서는 역사적 잘못과 죄를 범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냉전적 사고에 물든 색깔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일에 나서기도 했지요." (129쪽)

그는 교회들이 정치권력에 헌신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웃을 외면하고 부패한 권력을 수호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약자인 '양떼'를 돌보는 것이 목사의 자랑이지 교회를 1,000명, 2,000명으로 키우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000명, 2,000명으로 교인 수가 늘어나는 일은 함부로 기뻐하고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거대 교회를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는 목사들은 진정한 목자 되기를 포기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들과 같다는 박창환 교수의 경고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진정한 목자 없는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난다고 복음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진정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어보신 후에 그렇다는 제자의 응답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내 양떼를 먹이라'는 당부였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곧 양떼를 돌보는 일이라고 깨우쳐 주신 것이죠. 이것은 약자를 돌보는 일이지 교회를 양적으로 키우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수천, 수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교회를 만들려고 몸부림치는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런 예수의 당부를 잊었거나 듣지 못하는 게 분명합니다. 아예 양떼 먹이기를 포기하기로 작정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그 큰 교회를 만들어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하려 하겠습니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이름과 고뇌도 모른 채 대기업 경영하듯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양떼를 먹이는 따뜻한 목회라 할 수 없지요." (136쪽)

한 교수는 1987년 길희성 교수, 이삼열 교수 등과 함께 새길교회를 창립했다. 평신도 열린 교회를 세워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신군부 체제의 폭정하에서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해치는 악의 세력을 거부하며,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하나님나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했다. 한 교수는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마음가짐을 당부했다.

"독선에 빠져서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외면하거나 더 상처 주고 있지 않은지, '성장'을 외치며 부패한 권력을 정당화하고 탐욕을 부추기는 게 아닌지,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대신 분란을 조장하고 분단을 지속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하여 하나님나라 대신 이 땅의 정당성 없는 정치권력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141쪽)

"30여 년 전, 서울대 김병종 교수에게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이사야의 비전을 표현해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중략) 저는 이 그림을 집에 걸어 놓고 매일매일 쳐다보면서 항상 제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혹 제 스스로가 사자처럼 갑질하는 강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자문하면서 말입니다."(335쪽) 뉴스앤조이 이은혜

책 맨 마지막 부분, 한완상 교수는 비로소 책 제목 작명 이유를 직접 밝힌다. 교인들에게는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라는 곡으로도 유명한 이사야서 11장 구절은, 이 메시지는 한 교수가 살아온 80년 인생의 지향점이다.

"사자는 정글의 제왕입니다. 최강의 갑질을 마음 놓고 하는 잔인한 적자(適者)입니다. 이런 정글 상황에서는 모든 동물, 특히 채식 동물은 사자 같은 갑의 먹잇감이 되고 말지요. (중략) 기원전 8세기 유대 왕국에 살았던 이사야는 역사학자요, 예언자로서 당시 강대국에 시달렸던 조국 유다 왕국을 사자 같은 잔인한 강대국에 시달렸던 조국 유다 왕국을 사자 같은 잔인한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고통받는 초식동물에 비유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적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정글같은 상황에서 정의화 평화를 이룩하려면, 적자요 강자요 표준으로 군림하는 갑들이 비적자요 약자요 비표준으로 억압당하고 수탈당하고 죽임까지 당하는 을들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32쪽)

"이런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사자들은 사회의 약자인 을들의 먹거리를 먹음으로써 사자의 육식 체질을 바꿔야 합니다. 사자들이 소처럼 여물을 먹어 그들의 체질을, 그들의 문화를 바꾸고, 그들의 적폐를 스스로 청산하려 할 때 비로소 황무지같은 곳이 장미 꽃밭으로 변화할 것이며, 사막같이 마른땅에 샘물이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는 새로운 질서를 꿈꾸며 살아 왔습니다. (중략) 독자들도 이사야의 꿈으로 우리의 비극적 현실을 바꾸는 일에 모두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든 고비를 넘은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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