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 가(Why go to Church)?" 이 네 단어가 원래 제목이다. 짓궂게 한 번, 또 한 번 각각 다른 톤으로 여러 번 읽어 본다. 여러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여러 표정이 떠오른다. 발끈 화를 내며 "왜 교회 가?" - 어깨를 으쓱하며 "왜 교회 가?" -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니 "왜 교회 가?"

영국 성공회, 옥스퍼드 교구의 주교였던 존 프리처드 신부님의 얇은 책 <교회>(비아)를 읽고 나니, 이 책을 선물해 주고 싶은 청년 몇 사람 얼굴이 얼른 떠올랐다. 나는 책 선물 받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선물을 남도 좋아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책을 선물해 주었는데 읽어 보지도 않으면 어쩌나, 지레 조바심도 생긴다. 그래서 정성스럽게 편지를 써서 책에 끼어 넣기로 했다. 편지는 읽겠지? 편지를 읽고 나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들겠지? 여전히 일방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편지지를 골랐다. 펜을 들었다.

<교회 - 왜 교회에 가야 하는가? 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존 프리처드 지음/ 한문덕 옮김 / 비아 펴냄 / 120쪽 / 7,000원

*첫 번째 편지 – 여자 친구 따라 교회 처음 나온 청년 K에게

딱 한 번 만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파트너에 대한 K의 따뜻한 배려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나에게도 잔잔한 파문으로 와닿더군요. 여자 친구가 사귐의 조건으로 1년에 두 번만(성탄절, 송구영신 예배) 교회에 나와 달라고 했는데, 얼마 후 세 번으로 늘어났다는 (부활절 추가!^^) 얘기를 듣고 빵~터졌답니다. 결혼 후에는 매주 나오겠다고 순순히 약속하는 K의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되더군요.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겠죠? 하지만 훗날, K가 그 약속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할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선물합니다.

조금 읽어 가다 보면 금방 눈치채겠지만, <교회>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얇은 책은 교회 생활의 장점만 쭉 늘어놓은 교회 홍보물이 아니에요. 오히려 교회가 어색한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부분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냥 평범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비신앙인"으로 사는 것도 버거운데 굳이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내가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은 거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여러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 그럼에도 미소 짓고 잘 살아야 하는 일상, 파편화되고 일그러진 이 세상”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딴 세상 같이 보이는 거예요.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느끼는 어색함과 난감함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교회에 가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교회에 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류를 거스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은 곳곳에 덫이 놓여 있고 난처한 상황으로 가득한 곳에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는 일에는 위험 부담이 따릅니다." 이런 부분에 밑줄을 그으면서 나는 K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나도 이 얇은 책을 비교적 꼼꼼히 읽었으니, 언제든 궁금한 점이 있거나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그걸 핑계 삼아 또 한 번 만나도 좋을 거 같아요. 나는 교회에 담 쌓고 살아왔던 K의 젊은 나날 얘기가 궁금하답니다. <교회>를 읽으면서 제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문장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의 말이었어요. "나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신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움이라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보다 애절하게 들릴 때가 있어요. K는 이 말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 문장에 멈춰 서서 한참을 서성였답니다. 이십 대, 치기 어린 학창 시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교회에 대한 불만으로 '무신론자' 행세를 하던 때가 떠올랐어요. 그 후로 한참 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다가 "인간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다"(homo desiderium dei)라는 말과 만났지요. 이 라틴어 문장은 "인간은 하나님의 그리움이다"라고 번역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을 그리워하는 하나님…. 가끔 기도 중에, 예배 중에 그런 '서로 그리워함'이 사무치게 경험될 때가 있어요.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과 아름다움, 감격으로 꽉 찬 순간이죠. K에게 예배에 나와 달라고 부탁하는 여자 친구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그 기쁨을 함께하고 싶은 간절함이 아니었을까요?

<교회>를 읽으면서, 내가 목사로서 K에게 약속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내가 청년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은 교회의 모습이 이 책에 또박또박 적혀 있더라고요. 그것은 "누군가 정직한 물음과 의심을 가졌을 때, 그 질문들을 수면 위로 끌어내어 그 사람이 성숙한 방식으로 물음과 의심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길"을 제시하는 교회랍니다. 사실 그와는 정반대 모습으로 무조건 믿음과 순종을 강요하는 교회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에요. 그래서 나는 어떤 물음이나 의심이라도 성숙한 성찰과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목사라고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에 답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오히려 누군가의 진지한 물음과 의심 덕분에 목사도 더 깊은 사유로 초대되고, 거기서 깊이 있는 설교의 단초를 발견하기도 하지요. 약속합니다. 어떤 질문도 들을게요. 아니, 저를 위해서 부탁합니다. 많이 질문해 주세요.

잠시만 못 봐도 또 보고 싶은 마음에 그 사람의 모습을 '그리는' 연인들의 눈빛은 곁에 있는 사람까지 설레게 하더군요. 그 반짝이는 '그리움'이 결혼이라는 첫 번째 '그림'을 완성시키는 날이 서서히 다가오네요. 그때까지 이런 저런 일로 많이 바쁘겠지만 <교회>를 짬짬이 읽어 주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편지 – 교회에 나와도 여전히 외로운 청년 J에게

오랜만에 날아온 카톡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나는 J가 교환학생 한 학기를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한국 생활에도 잘 적응해 나가고 교회 사람들과도 활발하게 어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독한 외로움을 앓고 있음을 카톡 문자와 그 행간에서 짐작할 수 있었지요. 놀란 가슴에 얼른 답신을 보내 조만간 만나자고는 했지만, 나랑 만나 잠시 이야기한다고 해서 J의 내면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외로움의 음습함이 다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서 지독히도 나다운 방식으로 선물을 하나 준비했답니다. 막연한 외로움으로 만나서 막연한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막연하게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는 헤어지는 것 말고 다른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J에게 책 한 권 선물했는데 아주 기쁘게 독서하고 마음에 새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에도 얇은 책이에요.

주일예배를 마치고, 마치 썰물 빠져나가듯 사람들이 가고 없는 공간에 우두커니 앉아서 시간을 보낸 적이 종종 있어요. 웃고 떠드는 소리로 북적거리던 건물이 완전히 어두운 정적 속에 잠겨 있는데, 괜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뚜벅뚜벅 내 발자국 소리만 울리게 하지요. 외로웠어요. '이제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여기를 잊고 지내지 않을까?' 사실은 교회가 잊히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잊히는 것이 슬프고 쓸쓸했던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은 불쑥불쑥 내 안에 침입해서 나의 고요한 쉼의 시간을 오히려 황폐하게 만들어 놓곤 해요. 나도 외로움 앞에서는 쩔쩔매지요. 그런데 J는 예배를 마치고 그냥 집에 가는 발걸음이 외로웠던 것 같아요.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기 바쁜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같이 놀 사람이 없다!"라고 하는 푸념은 얼핏 한가한 투정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갈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주 어린아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외로움의 문제는 끊이지 않고, 그 외로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꽤나 성숙한 깨달음, 혹은 삶의 태도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교회에 오면 서로 돕고 행복하고 밝은 분위기만 있을 것 같지만, 안 그렇잖아요. 나는 교회에 대한 책을 지금껏 꽤 많이 읽었고, 교회에 대해 이런저런 말도 많이 했지요. 그런데 마침 J의 카톡을 받은 후에 또 한 권의 <교회>라는 책을 읽게 됐어요. 그래서 읽는 사이, 사이 J를 떠올리며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해놓았어요. J의 또래들과도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너무 어렵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고리타분하지 않아서 좋은 책이에요.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왜 교회 가(Why go to Church)?"인데, 저자가 나름 거기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부분이 앞에 있어요. 그런데 나는 저자의 '답'보다도 거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고민한 흔적들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그 흔적들을 시적인 언어로 단아하게 그려 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예컨대 이런 부분이에요.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시간을 가로막고, 견고하기만 할 것 같던 삶에 균열을 냅니다. 삶에 균열이 가면 우리 시야는 꽃 한 송이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집니다. 삶의 목적, 의미에 관한 물음이 자연스레 솟아납니다." 저자도 멋지게 썼고 번역도 맛깔스러워요. '균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가 '큰 물음'에 부딪히게 되는 상황에 대한 좋은 비유 같아요. 어쩌면 J가 맞닥뜨린 외로움의 문제는 ― 비록 죽음이나 이별 같이 삶을 뒤흔드는 엄청난 파열의 사건은 아닐지라도 ― '균열'이라고 할 수 있죠. 쓰라려요. 꽃도 다 소용없죠.

교회에 오면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교회 밖에서는 나눌 수 없었던 이야기나 경험을 공유하면서 든든함을 느끼지요.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외로움이 찾아오더라고요. 아주 끔찍한 외로움이에요. 그 외로움 속에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오잖아요. "결국은 모두 혼자야!" 그런데 그게 의외로 좋은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만일 그 탄식을 이런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죠. "왜 나는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이런 외로움에 시달리는가?" 사실 그 물음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물음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랍니다. <교회>에 이런 말이 있어요. "올바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곳,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아마도 교회일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아마도"라는 말이 좋더라고요. 너무 확실성을 강요하지 않고 불확실함 속에서 조금씩, 가끔 실패하면서,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도 될 것 같은 편안함을 주더라고요.

외로움이 꼭 괴롭기만 한 것일까? 왜 우리는 홀로 있는 걸 이렇게 지독히도 싫어하는 걸까? 우습게도 그런 우리가 또 어떤 때는 사람들을 죄다 피하고 싶어서 잠수를 타기도 하잖아요. "평소에는 마주칠 일조차 전혀 없을 사람"을 교회에서는 봐야 하는데, 그것이 우리를 꽤나 피곤하게 합니다. 혹시 우리는 나랑 비슷한 사람, 나의 비위를 잘 맞춰 주는 사람, 내가 어울릴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생각과 말이 통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만 어울리려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에 이런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생각할 수 있는 공간, 생각하기를 멈출 수 있는 공간" - 저는 그 옆에 굵은 느낌표를 쳐 놓았어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생각이 가능한 공간,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런 생각까지 멈추고 가만히 나를 비추는 "영원의 빛 한 줄기를 느낄" 수 있는 곳. <교회>는 소박하지만 호소력 있는 말로 '예배'를 강조하고 있어요. 예배를 통해 "우리 자아를 주인으로 여기게 만드는 모든 우상을 쫓아내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그 예배를 위해서 예배 전의 마음가짐, 찬양을 할 때 좀 더 유의해야 할 것, 설교를 삶으로 살아 내기 위한 노력 등, 내가 청년들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을 <교회>가 대신해 주고 있어요. 사실은 목사인 내가 들어야 할 말이 더 많아요.^^

책 한 권 선물해 주면서 이렇게 중언부언 장광설을 늘어놓았으니, 다시 만날 때 또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겠네요. 그래도 나는 J의 투덜거림이 좋아요. 그 안에서 진짜 교회를 만나고 싶은 열망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답장해 줄래요? "왜 교회 가나요?"

손성현 /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와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천감리교회 청년부 담당 목사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에버하르트 부쉬의 <칼 바르트>(복있는사람), 한스 큉의 <이슬람>(시와진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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