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낙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이번 19대 대통령 선거 때 정권이 교체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최소 10명 중 8명이 어떤 식으로든 지난 10년과는 다른 세상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간절한 바람은 야권 대선 후보들을 지지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촛불 광장이 이뤄 낸 탄핵으로 앞당겨진 19대 대선 이후 세계에 대해 그리 낙관하지 않는다.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대선은 대통령만 바뀌는 것이다. 변혁되어야 할 수많은 조직과 구조, 문화는 그대로 버티고 있다. 둘째, 당선이 유력한 대선 후보나 그를 내세운 정당도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셋째, 정권 교체를 바라는 10명 중 8명에 속하지 않는 2명이 한국 보수 기독교회에서 다수이자 주류다.

물론 대통령이 바뀌면 그가 임명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고위직이 바뀐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민주 개혁 정권이 보여 준 가슴 아픈 시절을 기억한다. 괜찮은 사람 한두 명 들어간다고 쉽게 바뀌는 조직이나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전문 영역과 현장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던 사람들이 "현실은~" 운운하며 변해 가는 걸 가슴 아프게 지켜봤다.

더군다나 당선이 유력한 대선 후보나 그를 내세운 정당이 보여 주는 현실도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좋은 정치는 '내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 적'이라고 설정하지 않는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며 경청과 대화, 길고 긴 설득과 협의의 과정을 거치는 게 필수다. 그런데 승리해야만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인지, 당선이 유력한 대선 후보와 정당은 선거 기간 동안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줬다.

지금 한국 사회는 하나라도 더 가진 사람들이 유리하도록 작동하는 사회다. 그러니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회적 소수자나 상대적 약자들은 존재조차 삭제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고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리나 목소리는 '나중'으로 미뤄지기 일쑤다. 이런 때일수록 경청과 대화, 길고 긴 설득과 협의를 이끌어 갈 정치 세력은 신뢰받을 수 있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 어려운 현실 가운데 주춤하더라도 계속 믿고 지지하며 응원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당선이 유력한 대선 후보와 정당은 그런 기대에서 어긋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다.

초록은 동색!?

가장 답답하고 가슴 아픈 현실은, 이 땅에 사는 대다수 사람이 간절히 열망하는 정권 교체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보수 기독교인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교회는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가장 정치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최근에는 본인들이 앞장서 한국 사회를 지켜야 한다며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를 미화하기 시작했다. 선민의식으로 포장된 왜곡된 정치 참여는 어느새 '하느님의 뜻'이 되어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있었던 애달픈 역사적 경험을 '공산주의 척결, 좌파 반대'로 이끌어 수없이 많은 억울한 죽음과 피해자들을 만드는 데 앞장서더니, 이제는 또 다른 '허수아비 적'을 만들어 보수 기독교회와 교인들 이익을 지키는 데 활용하고 있다. 이 땅에서 사회적 소수자나 상대적 약자로 살고 있는 성소수자나 이주민들을 '동성애 반대, 이슬람 반대, 차별금지법 저지'라는 구호와 위협으로 부정하고 삭제하며 적대시한다. 그런 잘못된 이해와 선택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입장과 신앙적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흔들림 없는 신뢰를 보낸다.

그러니 예수님의 자리는 어느새 '담임목사'가 차지하고 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아니라 '목사로 오신 하느님'이 되어 버렸다. 예수의 자리를 대신했던 중세 교황을 반대한 개신교회에 작은 교황들이 차고 넘친다. 더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목사나 지도자들의 가르침도 '문자주의적인 성서 이해'와 '천국과 지옥 해석 틀'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이다.

이런 한국교회에는 작고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고 이 땅의 작고 연약한 사람들의 편으로 사셨던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예수의 길이 아닌 제국의 길을 따르는 교회와 교인들이 차고 넘친다. '공의와 사랑에 근거한 내어 줌'이라는 예수의 섬김과 질서가 아닌 '이기적 힘과 영향력에 기댄 착취와 무한 확장'이라는 제국의 통치 방식과 질서를 답습하는 종교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선택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포장하느라 급급하다.

그러니 오래 전부터 흔들던 '공산주의 척결, 좌파 반대' 깃발에 더해 '동성애 반대, 이슬람 반대, 차별금지법 저지'라는 깃발을 흔드는 게 하느님의 뜻이 되었다. 어떤 지향과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간에 그 깃발만 함께 흔들 수 있다면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부정부패나 혐오와 차별에 앞장서는 모습이 매우 유사한 사람들끼리 모였다. 그렇게 2017년 대선 국면에 일부 보수 기독교회와 교인들은 극우 정당에 가까운 정당과 대선 후보 측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선택을 했다.

대체 이들에게 '우리들의 하느님'이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무슨 의미일까. 이들에게 교회는 무엇이며 성서는 무엇일까.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성서와 대화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는 건 무엇일까.

성서는 기억과 증언이 묶인 책이다

신약학자이자 온건한 성공회 신학자인 마커스 J. 보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왜 신앙의 언어는 그 힘을 잃었는가>(비아, 2017년 4월 개정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은 네 편의 복음서를 비롯해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있다. 네 편의 복음서는 기원후 70년경 이후 기록되었으며 각기 다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예수에 관한 전승이 어떤 식으로 발전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중략) 맨 나중에 쓰인 복음서인 요한의 복음서는 9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승이 발전된 과정의 산물인 복음서는 '기억'memory과 '증언'testimony을 한데 묶어 놓았다. 복음서 이야기는 예수의 언행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기억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분별력을 가지고 읽다 보면 우리는 부활 이전의 예수에 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복음서는 일정한 증언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복음서를 읽으며 부활 이후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까지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경험과 성찰을 통해 얻은 예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136쪽

마커스 보그의 말처럼, 성서는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증언이 묶인 책이다. 그가 마르틴 루터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듯 "성서는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구유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와의 대화를 통해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성령의 도움을 통해 주님과의 동행이 시작되는 놀라운 경험을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많은 사람은 성서에 그 이상을 요구한다. 성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왜곡된 기대를 한다. 성서가 삶에 필요한 모든 정답과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또 하나의 책인 창조 세계, 즉 일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 주는 현대 과학, 의학, 사회학, 철학 등은 읽을 생각이 별로 없다. 읽더라도 신앙과는 별 상관없는 도구들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성서만' 읽고 삶에 필요한 모든 정답을 찾겠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서는 과학책이고 의학책이며 사회학책이기도 하고 철학책이 되기도 하는 '만능 책'이다. 그러다 보니 창조과학이라는 유사 과학, 다시 말해 사이비 과학이 통용된다. 과학책이나 의학책이 아닌데, 현대인들이 지혜를 모아 해결해야 할 온갖 질병과 생태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해 성서가 구체적인 정답을 준다고 과장한다.

심지어 성서가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말하는 '육체적 부활'의 증거를 대기 위해서 상관없는 성서 구절들을 조합하기도 한다. 그 부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질지에 대해 과감히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신비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은 존재할 수 없다. 무엇이든 항상 정답이 있고, 정답을 찾아가는 구체적인 지침까지 조합해 낼 수 있다. '알 수 없다'거나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고백은 대부분 불신앙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진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성서는 믿음과 생명에 대한 책, 
구원으로 이끄는 책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 요한 20:31(공동번역 개정판)

성서는 오직 '믿음에 대한 책이고, 생명을 주려는 책'이다. 그 믿음과 생명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과 증언을 모은 책이다. 만능 책이 아니다. 만능 책이 아니니, 당연히 의심도 가능하고 질문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성서를 읽어도 알 수 없거나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많다. 성서는 오직 우리 구원을 위한 계시, 즉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은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 왔다. 그 믿음과 생명의 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풍성하게 이어 왔다. 그 가운데 내가 속한 성공회는 '성서', '전통'과 함께 '이성'이 신앙을 형성하고 식별하는 중요한 기둥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논쟁하거나 신앙적 경험을 식별할 때에는 '성서, 전통, 이성'의 눈과 귀를 의지하라고 한다.

그 때문에 성공회에서는 창조적이거나 신앙적인 의심을 당연하게 여긴다. 합리적인 질문은 물론, 종종 근원을 묻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때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성서는 오직 믿음과 생명에 대한 책이기에, 우리들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구원은 보수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그 결이 꽤 다르다.

"성서적 해석 틀 안에서 구원은 죄와 용서, 천국과 지옥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구원은 죽음 이편의 삶에서 맞이하는 변환 - 개인적 변환과 정치적 변환 - 을 뜻한다. 즉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환을 모두 아우른다." - 61쪽

"구원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한 면에서 구원은 개인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구원은 일관되게 집단적이다. 구원은 우리가 공동체, 사회, 국가에서 어떻게 함께 사는지를 관심한다. 달리 말하면, 구원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한지, 어떠해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넓은 차원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political이다. 이때 정치politics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언어와 마찬가지로 당파주의, 부정, 비리 의혹, 자기 이익 등으로 축소된 현대적 의미에서 벗어나 폭넓은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넓은 의미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정치적이다. 이는 천국과 지옥 해석 틀로 구원을 협소하게 이해할 때 흔히 간과되는 차원이다. 역사-은유적으로 성서를 읽으면 구원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중요한 차원을 되살릴 수 있다. 구원의 정치적 의미는 출애굽과 예언자들, 예수와 바울로의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구원의 정치적 의미는 두 부분, 정의와 평화에 초점을 맞춘다." - 76-77쪽

이 때문에 나는 앞선 수많은 성공회 신자와 사목자 그리고 신학자처럼 "성공회는 정치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말하는 정치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변환을 가져오는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를 뜻한다. 그래서 나는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적인 교회'에 속한 신자이자 사제라고 말한다.

나와 너, 우리의 교회와 사회가 정의와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정치, 그 가운데 사회적 소수자나 상대적 약자가 쉽게 삭제되거나 밀려나지 않도록 편드는 정치에 참여하는 교회.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친히 전하신 복음에 동참하는 정치적 선택을 하는 교회의 신자이자 사제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 어떠하든, 그 시작이자 끝인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선언하신 말씀은 이것이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가 4:17-18(공동번역 개정판)

예수께서 선언하신 가난한 이들에게 전한 복음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펼쳐 읽으신 성서가 증언하는 가난한 이들, 묶인 사람들, 눈먼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에 해당하는 이 시대와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 눈먼 사람들, 묶인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해방과 자유가 선포되는 은총의 해가 간절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짓밟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 신명 27:19(공동번역 개정판)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 이사 1:17(공동번역 개정판)

"이 야훼가 말하지 않더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건져 주며, 더부살이와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고." - 예레 22:3(공동번역 개정판)

"하느님 아버지 앞에 떳떳하고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 야고 1:27(공동번역 개정판)

성서가 말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 더부살이"를 문자 그대로 부모 잃은 사람, 남편 잃은 사람, 이주노동자나 난민 정도로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떤 때는 '그 정도로만 읽어도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마커스 보그의 말처럼 성서를 역사-은유적으로 읽는 교회와 신자들은 그 이상을 읽는다. 성서가 말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 더부살이"를 사회 구조와 관계 속에서 언저리로 밀려나거나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성서적 언어'라고 이해한다.

그런 사회적 소수자나 상대적 약자들이 이 시대와 사회,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다수 교회와 교인은 그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을 볼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다 보니, 사회 일반의 경험과 의식의 흐름대로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에 대해서 단순하게 정의하고 떠든다. 그것이 어떤 혐오와 차별, 배제를 담고 있는지 모르고 함부로 내뱉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네가 너의 형제를 보았다면, 너는 너의 하느님을 본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성서와 전통, 이성에서 보고 듣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대로 보고 들어야만 정확하게 이해하고 건강하게 반응하며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매우 좁고 왜곡된 방식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제국의 통치 방식과 질서를 그대로 답습한다. 그런 일부 보수 기독교회와 교인들은 '혐오와 차별, 배제의 프레임과 언어'로 제국의 기독교이자 금기의 기독교를 복음의 도구인 것처럼 거짓 증언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성서, 전통, 이성의 눈과 귀로 식별하며 만나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복음을 전하는 도구인 기독교는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교회와 신자들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편드는 사랑과 포용, 개방의 프레임과 언어'로 이웃을 주님 섬기듯이 살기에 공존과 사랑의 기독교로 불린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어떤 혐오와 차별, 배제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다. 공포와 불안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온전한 도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다. 공포와 불안에 기댄 혐오와 차별은 결국 우리들의 하느님을 증오와 저주의 신으로 왜곡한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을 통해 부활의 주님으로 증언되어야 한다.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취급을 받는 이 시대와 사회의 소수자나 상대적 약자들 한가운데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우리 이웃의 얼굴과 삶을 통해 주님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또 한 번의 역사적 분기점이 될 19대 대선. 공포와 불안에 기대어 혐오와 차별, 배제의 깃발을 흔드는 일부 보수 기독교회와 교인들과는 다른 교회와 신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렇게 또 다른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삶으로 증언하며 전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더욱 더 많아져야 한다. 완전한 사랑은 결국 두려움을 몰아낸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 1요한 4:18-21(공동번역 개정판)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